〈 48화 〉 농업의 민족 엘프 #2
* * *
내 입에 맞는다고 해서 꼭 남의 입에 맞으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내 입에 맞지도 않는 것을 팔수도 없을 노릇이다.
나는 때 아닌 딜레마에 머리를 싸매며 포도를 씹어 먹다, 답을 내려 줄 집안의 어르신, 체스를 찾았다.
본래 가장 먼저 헬레나에게 보고하는 것이 당연했으나, 내 요리에 길들여진 미각을 곧이곧대로 믿기가 찝찝했던 탓이다.
“ 포도를 맛보라. 그것도 다크엘프가 만든……. ”
체스가 있는 곳에는 이스도 있다. 나는 어느 사이에 깜빡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저 충성심 강한 체스는 내가 부른다고 해서 올 위인도 아니었으니, 어찌 보면 필연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 예. 제가 먼저 맛을 보았습니다만… 경쟁력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
체스와 이스, 두 남자는 접시에 담긴 포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제법 넓은 도량의 소유자이기는 하나 관념이 뼈에 박힌 이들이었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오히려 다크엘프도 상관없다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면 그게 더 이상하게 보였을 것 같다.
“ 직접 맛을 보았다라……. 그렇군. ”
이스는 내가 솔선하여 맛본 것을 마음에 둔 듯 몇 번이고 되뇌다, 이윽고 결심을 다진 듯 포도 한 알을 집어 한 입에 털어넣었다.
“ 이, 이스 님! ”
그에 체스가 까무러치게 놀랐다. 누가 보면 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먹은 사람인 줄 알겠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반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영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참 푼수 같기도 하지…….
우물우물. 적막 속에서 이스가 포도 씹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고작 포도를 씹을 뿐인데도 숨이 턱 막힌다는 느낌을 받았고, 공기가 탁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 맛이… 있군. ”
포도를 씹어 삼키는 이스의 표정이 제법 밝아졌다. 포도의 맛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 정말 맛이 있습니까? ”
“ 음. 이런 것으로 허언을 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래도 정 믿지 못하겠거든, 자네도 한 번 맛을 보게. 그러면 나와 같이 생각이 바뀔 테니까. ”
“ 알겠습니다. ”
체스는 이스의 권유가 떨어지기 무섭게 포도를 집어삼켰다.
한껏 찌푸린 얼굴도 다림질한 옷 마냥 빳빳하고 깔끔해진 상태에, 주의를 기울여 맛을 확인하는 변화가 소름 끼쳤다.
사실 이중인격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 확실히… 여느 포도보다 뛰어난 맛이군요. 대륙의 모든 포도를 먹어본 적이 없으니 장담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제가 먹은 것들 중에서는 가히 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
체스의 평가는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대화의 내용만 들어보면 칭찬 일색이나, 그것을 입에 담는 표정과 목소리가 진중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히 포도 감별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그래. 자네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향후에 주력 상품으로 삼을 만 하겠군. 알트람 상회에서 팔아 보겠는가? ”
“ 이스 님의 명령이라면 따르겠습니다만… 이번에는 헬레나 님이 허락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크엘프에게 작물을 키우게 하여, 그것을 팔게 하겠다는 생각은 그분의 시종인 지온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니까요. ”
체스는 내가 세운 성과는 곧 헬레나가 세운 성과라는 뜻을 밝히며 제법 정중하게 사양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더러운 손으로 키운 포도를 떠맡기 싫다는 기색은 눈곱만큼도 없어, 단순히 절차를 제대로 밟자는 생각이었을 뿐이리라.
“ 음…….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일세. 지온의 생각에 찬성하여 행동으로 옮긴 것도 그 아이이니, 그 성과를 손에 쥐는 것도 그 아이여야 마땅하겠지. ”
“ 지온, 들었느냐? 이스 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앞으로의 사업 계획은 헬레나 님께 보고한 후 정하도록 해라. ”
“ 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
요약하자면 헬레나가 알아서 해결하라는 결론이 나왔으나, 두 귀족의 보증을 얻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겼다.
좋은 것도 많이 먹어보며 살았을 남자들의 평가였으니 믿을 만 했다.
나는 가볍게 인사를 한 뒤 포도를 들고 헬레나의 방으로 향했다.
구태여 미룰 일도 아니었으니 곧장 방을 찾아 허가를 받으려는 생각이었다.
“ …이제 왔어? ”
가벼운 노크를 거쳐 문을 열고 들어가니, 헬레나의 뾰로통한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입술을 삐죽이는 것도 그렇고 불만 가득한 눈빛을 보니 당장이라도 불만이 날아들 것 같았다.
“ 아… 늦어서 미안해. ”
“ 당연히 미안해야지! 다크엘프들이 있는 곳에 보내는 것도 억지로 꾹
참으면서 견디고 있는데, 하다못해 다녀와서는 가장 먼저 얼굴을 비쳐야 하는 게 예의 아냐?! 그리고……. ”
헬레나의 잔소리는 게임 좀 그만하라고 들볶는 마누라의 목소리와 몹시 비슷하게 느껴졌다.
결혼 해 본적은 없지만, 인터넷에서 여기저기 떠돌던 온갖 소문을 담은 글과 몹시 유사했다.
당시에는 썰이라고 했는데… 요즘에도 그렇게 표현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 그러니까 좀 더 신경 써 달라는 거지? ”
“ 그래! 잘 아네! ”
적당히 흘려듣고 요점을 얘기하고 나서야 속사포같이 쏘아내던 불만이 뚝 그쳤다.
말하는 것도 그렇고 어린아이가 따로 없지만, 한편으로는 제법 이해도 갔다.
헬레나는 다크엘프를 오물 취급하지 않아 그들의 외모를 냉정하게 평할 수 있고, 그 결과 내가 눈이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다크엘프가 매력적인 것은 부정하기 어렵지만, 헬레나를 두고 바람 필 생각이 없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위험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 그러면, 우선 이 포도부터 먹고 얘기하자. 처음으로 수확한 이것 때문에 이스 님이 있는 곳에 갔다 와야 했으니까. ”
“ 아버지에게…? 그랬구나. ”
헬레나는 충분히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인 뒤, 내가 내미는 접시를 받아들여 군말 없이 포도를 입 안으로 넣었다.
이스와 체스가 보여주었던 일반적인 반응과 너무도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어찌 보면 그녀가 평범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낼 수도 있었으나, 헬레나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대로 인한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륙전쟁을 일으킨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자였으니까.
“ 맛있어! 정말 맛있어! 포도만 먹어도 될 정도로 훌륭한 맛이야. 이 정도면 굳이 와인으로 만들 필요도 없지 않을까? ”
나와 헬레나는 같은 요리를 먹고 산 세월이 길기에, 자연스레 입맛도 비슷해졌다.
그러니 저렇게 기뻐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으나, 나는 다행이라고 내심 안도했다.
“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널리 팔려면 역시 와인으로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 멀리 팔면 팔수록 품질이 내려가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 같고. ”
“ 그렇긴 해. 포도보다는 아무래도 가공을 거친 와인이 유통기한도 길고, 바르칸 백작령처럼 매직 아이템으로 제작한 냉동 창고를 들이는 것도 마음에 걸리니까. ”
헬레나는 창고가 있다면 시도해 볼 만 하다는 뉘앙스로 고민했지만, 막상 냉동 창고를 쓴다 하더라도 썩 효과는 없을 것 같았다.
도로는 어느 정도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지만 운송 수단이 짐마차로 한정된 이상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또, 설령 팔더라도 공작령 안으로 한정되거나, 혹은 아주 가까운 곳이 한계일 테지.
“ 결국 내가 처음 생각한 대로 와인이 답이겠네. ”
“ 어쩔 수 없지. 와인 제작 기술자는 이미 저택 안에 대기시켜 놨으니까, 당장 보내도록 할게. 오크통은 미리 만들어 뒀으니까 함께 딸려 보내면 될 거야. ”
헬레나의 결단력은 빨랐고, 또 신속했다.
와인 만들기가 목적인 이상 그 밑 준비를 미리 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했지만, 이렇게 하인을 불러 시키는 것을 보니 참 빠르다는 생각뿐이었다.
“ 이제 이걸로 완성품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으니까… 다시 우리 일을 마무리 지어야지? ”
잠깐 한 눈을 팔게 했던 헬레나가 다시 요사스러운 눈빛을 내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는 확연히 화가 가라앉은 기색이었으나 끝을 볼 생각인 것은 여전한 듯싶었다.
그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 아직 일이 남지 않았어? ”
“ 안 남았어. 그리고 있다 해도 상관없어. 지온을 혼내는 게 먼저니까. ”
일단 일을 핑계로 빠져나가려는 수단은 통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가장 명분과 실리가 그럴 듯한 변명이었으나 일이 안 남았다고 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만약 일이 남았다면 적당히 달래 볼 법 했는데, 그럴 가능성도 없어진 셈이다.
결국, 내게 남은 길은 여느 때처럼 헬레나를 조련하여 따르게 하는 것뿐이었다.
“ 헬레나… 벌써 잊었어? ”
“ 뭐, 뭐가?! ”
나는 눈꼬리를 가늘게 뜬 채 피식 웃으며 거리를 좁혀갔다.
한 걸음, 한 걸음씩… 몸에 휘감긴 뱀이 숨통을 조이듯 압박했다.
그 와중에도 뻘짓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있었으나,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을 보니 효과가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 그 날, 바르칸 백작의 저택에서…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 안 나? ”
그 때의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얼굴에서 불이 솟는다.
어두운 욕실 안에서 보냈던 시간은 그토록 자극적인 밤이었고, 헬레나도 흥이 돋아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 그게……. ”
“ 기억나지? 안 난다고 하면 내가 슬플 것 같은데. ”
나는 어느 새 가까워진 헬레나의 턱에 손가락을 얹으며 짐짓 슬픈 티를 냈다.
내가 생각해도 가증스럽고 역겹기 짝이 없는 태도였으나, 이것 또한 방편이라는 생각을 합리화하려 애썼다.
그러자, 이 순진한 헬레나는 내 연기에 그대로 속아 넘어갔다.
조금 전 까지 나를 몰아붙이려던 그녀는 온데간데없이, 내 소맷자락을 붙들며 위로하려 애쓰는 기색을 보였다.
“ 아, 아냐! 기억 나! 전부 기억나! ”
“ 그러면, 그 때 헬레나가 뭐라고 했는지 말해 봐. 굳이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돼. 듣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
내가 당장 답을 달라는 듯 눈을 번뜩이며 몰아붙이자, 헬레나는 모기가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런 벌건 대낮에 말하기엔 참 부끄러운 단어를 참 잘도 뱉어냈다.
“ 잘 말했어. ”
그 상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했으나, 나는 헬레나의 부드러운 뺨을 쓰다듬으며 약간 낮게 깐 목소리로 칭찬했다.
나도 부끄럽기는 매한가지였지만 이 아이 같은 여자를 달래주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 아…! 칭찬해 주셔서 기뻐요. ”
이 순간만큼은 주종이 뒤집된 상태다. 내가 주인이고, 헬레나가 하인이었다.
아니, 하인을 넘어 강아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소에도 응석을 잘 부리는 편이기는 해도, 지금처럼 허리를 낮추는 정도가 달랐다.
주인으로서 부리는 응석과, 지배받는 입장에서 부리는 응석에서 확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기에.
“ 그래. 헬레나는 참 착하구나. 내가 말하는 걸 금방 받아들여주기도 하니까 참 기특해. ”
“ 주인님……. ”
그녀는 서로의 주종관계가 뒤집힌 김에 철저하게 비굴해지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나를 주인님이라 부르는 것도 그렇고, 뺨을 붉힌 채 아양을 떠는 태도 하나하나가 남자의 심장을 흔들어놓고 있었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새삼스레 추측할 것도 없지만 아직은 이른 시각이다.
반쯤 은퇴해서 먹고 자는 생활만 한다면 모를까, 엄연한 일과 시간에 그 일로 진을 뺄 수도 없을 노릇이다.
더구나, 애완동물을 키우는 데 있어 필요한 건 먹이를 적당히 주는 절제력도 포함되어 있다.
귀엽다고 해서 마구잡이로 퍼주면 크게 건강을 해치게 되는데, 가히 지금의 내 상황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 그러니 오늘 일과가 끝날 때 까지 기다려.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
“ 하, 하지만… 저는 지금 당장 주인님의 품이 그리운걸요. ”
“ 그래도 참아야해. 알았지? 헬레나는 착한 아이니까, 잘 참고 견디면 그만큼 상을 줄게. ”
헬레나는 상이라는 단어에 눈빛을 반짝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과자에 낚여버린 애가 따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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