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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47화 (47/192)

〈 47화 〉 농업의 민족 엘프 #1

* * *

“ 부, 부디 하, 한 번만 살려 주세요…! ”

수수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드레스에 장신구 또한 없는, 척 보기에도 안쓰러워 보이는 몰골이다.

나는 공작의 딸에서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된 아그네스를 보며 남몰래 고개를 저었다.

내 입장에서 보면 원망스럽기 그지없는 여자라 할지라도 그 마지막이 저러니 다소 안쓰럽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살려달라는 탄원을 넣을 생각도 없었다.

모든 결정은 오로지 그녀의 앞에 다리를 꼬고 앉은 헬레나가 내려야 했기 때문이다.

“ 살려 달라고……. ”

헬레나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상박을 툭툭 두드렸다.

빛이 사라진 눈빛만 보아서는 당장 사단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텐데묘하게 시간을 끌며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다.

아그네스의 목을 직접 베겠다는 이유로 끌고 오기는 했으나, 꼭 죽여야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아그네스의 목을 베겠다는 것은 그 생사여탈권을 헬레나가 쥐겠다는 뜻이었다.

알버스 킬리네어는 알면서도 그를 받아들였고, 그 결과는 보시다시피 이 꼴이다.

“ 하지만, 너를 살려 준다고 한들 아무런 득이 없잖아. 이제 와서 킬리네어 공작가의 위세를 업을 수도 없는데다, 그렇다고 해서 도움이 될 만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

“ 되, 될게요! 되겠습니다! 어떤 일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목숨만은……. ”

자부심을 벗어나 오만하기 짝이 없던 여자의 모습은 그늘조차 보이지 않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목숨을 구걸하는 몸짓 하며, 비굴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까지.

귀족이라는 탈을 벗겨낸 아그네스는 그저 어디에서나 볼 법한 소시민이었다.

“ 그럼 창부로서 평생 살라고 해도 그럴 수 있어? ”

“ 그, 그건…! ”

바닥 중의 바닥. 노예 중에서도 가장 낮은 노예를 요구하는 헬레나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단순한 창부가 아니라 한 푼도 벌지 못한 채 모든 수입을 앗아가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살고자 발악하는 아그네스 또한 주춤할 수밖에 없었으나, 이 순간이 그녀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결정적인 구실이 되었다.

“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렸다더니 거짓말이었네? 그런 여자를 살려두면 골칫거리밖에 안 될 테니……. ”

“ 아, 아니에요! 하겠습니다! 아니, 제발 시켜주세요! 시켜만 주시면…! ”

헬레나는 아그네스의 뒤늦은 절규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허리춤에 꽂아 두었던 검을 뽑아 휘둘렀다.

마치 날벌레를 쫓아버리는 듯 가볍기 짝이 없는 손짓이었지만 그로 인한 결과가 가볍지는 않았다.

아그네스의 심장이 있던 곳에 희고 날카롭기 짝이 없는 칼날이 아주 깊숙이 박혔으니까.

“ 쿨럭! 이, 망할… 개 같은……. ”

죽어가는 여자는 피를 토하며 눈에 한껏 힘을 주었다.

조금 전 까지 꼴사납게 목숨을 구걸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오만하기 짝이 없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셈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 더 이상 비굴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리라.

“ 틀린 말은 아니네. 나는 지온의 암캐니까. ”

“ 미친… 년……. ”

누가 듣기라도 하는 날엔 집안이 뒤집어 질만한 소리에 절로 당황했으나, 다행히 듣는 귀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다.

“ 그러니까 건드리질 말았어야지. 이건 전부 네가 자초한 일이야. ”

“ 지옥에나… 떨어져라. 이 망… 망……. ”

아그네스는 시종일관 비릿한 미소를 띠는 헬레나를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다.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긴 했지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지는 쉽게 상상이 갔다.

“ 그럼… 이제 이 고깃덩어리를 깔끔하게 치워야겠지? ”

헬레나는 아그네스의 시체에서 검을 빼내며 중얼거렸다.

아그네스를 사람이 아닌 단순한 고깃덩이로 취급하는 듯 무덤덤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사람을 죽였다 해서 놀랄 시기가 지났음을 감안해도 냉랭하다 못해 오싹함을 느끼게 하는 태도였다.

“ 지온, 사람을… 아니. 이런 시체를 치우는 건 거북하겠지. 우선 태워버린 후에 뒤처리를 하는 게 좋겠어. ”

나는 헬레나의 말에 내심 깜짝 놀라고 말았다.

화장 풍습이 아예 없는 세계는 아니었으나, 시체 정도는 돌려 줄 것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을 가지고 원한 관계를 따질 수도 없었고.

다만, 이 와중에도 하인들을 배려해 시체를 치우지 않게 하는 것은 칭찬할 만 했다.

독살 시도라는 명분이 있었던 케인과는 다르게, 이번 시체는 오로지 사적인 감정에서 나온 결과였기으니까.

“ 흔적도 남기지 않겠다는 거야? ”

“ 응? 당연하지. 감히 지온에게 손을 대려고 했던 짐승인걸. 땅에 묻히는 것조차 아까워. ”

“ 그래도 시체 정도는 남겨주는 게 좋지 않을까. ”

나는 시체까지 능욕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헬레나를 살살 달래려 애썼다.

내 자신이 찝찝하다는 이기적인 이유가 첫째였지만, 과거 골칫덩어리였던 여자의 마지막을 조용히 묻어가고 싶다는 이유도 있었다.

무엇보다, 뼛가루를 만든 뒤 그것마저 남기지 않고 날려버린다면 신계에 돌아가서도 마음의 짐이 될 것 같았다.

“ …하아. 지온은 참 친절하기도 해. 알았어. 적당히 공동묘지 같은 곳에 묻도록 시킬게. ”

“ 고마워. ”

다행히, 헬레나는 내 부탁을 받아들여 시체를 매장하기로 정했다.

그로 인해 다소 번거로운 일을 처리해야 했으나 평생 찝찝하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일이 꼬여 이렇게 극단적인 지경에 치닫기는 했지만 마지막까지 그럴 필요는 없겠지.

◎◎◎

그리하여 며칠 동안은 제법 바쁜 시간을 보냈다.

우선 헬레나의 방 청소부터 시작하여 시체를 깨끗이 닦아내고 향유를 바른 뒤, 장의사를 찾아가 적당히 양지바른 곳에 묻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킬리네어 공작가에 관한 일도 무척이나 빠르게 처리했다.

헬레나의 말을 들어보니 귀족파의 세력을 약화시킨다는 목적은 허울 좋은 명분일 뿐이었고, 실상은 엿이나 한 번 먹어보라는 뜻에서 내민 조건이었을 뿐이었다고.

그런 의미에서헬레나가 지정한 다음 킬리네어 공작은 그 집안의 삼남이었다.

본래 작위 계승권과는 가장 거리가 먼 남자가 공작이 되었으니 당분간 바람 잘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삼남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애를 쓸 테고, 졸지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린 장남 등은 그 자리를 뺏고자 온갖 술수를 벌이겠지.

“ 포도밭을 만들자고? ”

“ 네. 나무도 몇 그루 심기도 하겠지만, 여러분이 포도를 만들어서 팔면 어떨까 해서요. ”

그렇게 구역질이 날 법한 업무를 전부 처리한 후의 어느 날.

나는 다크엘프 무리와 그들이 받은 땅에 모여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섯이서 살기에는 너무 넓은 땅이었기에 어떻게든 꾸며야 했다.

그냥 황무지 위에 집 한 채만 덩그러니 짓고 살기엔 너무 허전하기도 했고.

“ 우리가 포도를 만든다 한들 누가 사 주기는 할까? 너 같은 괴짜가 여러 명 있는 것도 아니잖아. ”

엘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지극히 현실적인 반대를 입에 담았다.

다른 다크엘프도 그에 공감하는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 또한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모처럼 같은 울타리 안에 살게 된 이들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을 노릇이었다.

적어도 크라우저 영지 내에서만이라도 오물 취급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싶었다.

가장 빠르고 간편한 방법은 헬레나의 한 마디 명령이면 되겠지만, 강제로 따르게 한들 아무런 효과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여태까지보다 더욱 음습하고 경멸 어린 시선들이 이들의 뒤를 쫓아다닐 것 같았다. 즉, 빠르기는 해도 실속은 없는 셈이다.

“ 그렇긴 하죠. 그러니 포도를 재배해서 와인을 만들고, 우선 그것을 크라우저 저택 내에서만 취급할까 해요. ”

“ 즉, 소일거리 삼아 귀족을 위한 사치품을 만들어 달라는 말이네. ”

“ 맞아요. 눈이 뒤집어질 만큼 훌륭한 와인을 만들어서 손님들에게 대접하면, 자연스럽게 찾는 사람이 많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보내는 시선도 나아질 것 같고요. ”

“ 우리를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그런 와인을 만들 수나 있을까? ”

현실적인 반대에 이어 현실적인 의문이라. 지극히 타당하기는 하다.

다크엘프도 엘프이기는 하나 와인을 만들어 본 적은 없을 테고, 하물며 전쟁터에서 대부분의 생을 보낸 이들이다.

무언가를 키우는 것과 연이 먼 것도 당연했다.

“ 물론 와인을 만드는 기술자는 따로 초대할 계획입니다. 거기에 여러분이 만드는 포도가 합쳐지면 분명 성공할 수 있겠죠. ”

“ 정말 그럴까…? ”

“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여러분이 비록 전쟁터를 전전하고 오물 취급을 받기도 하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식물을 키우는 것에 기쁨을 느끼는 엘프라는 뿌리가 변하지는 않았다고. ”

어찌 보면 내 생각을 강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눈을 반짝이며 감동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들을 보니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새삼 확신했다.

성향과 겉모습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이들 또한 엘프라는 뜻이다.

◎◎◎

나는 헬레나의 결제를 받은 이후 곧장 계획에 착수했다.

다크엘프가 살 집을 짓고, 이 황량한 터를 가꾸는 일이었다.

집은 통나무에 간단한 처리를 거쳐 만들었다.

본래 마음 같아서는 어디서나 볼 법한 자그마한 주택 같은 형태로 만들고 싶었으나, 나무가 좋다는 요청을 받아들여 통나무집을 만들게 되었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터를 가꾸는 일이었는데, 이 때 다크엘프도 엘프라는 말을 가장 절실히 실감했다.

인부들을 도와 외곽의 나무를 옮겨 심을 때도, 포도를 심어 키울 때도 그랬지만… 그 성장 속도가 가히 비상식적인 수준이었던 탓이다.

나무는 이곳이 내 자리라는 것 마냥 크고 울창하게 자라났다.

마치 성장판이 닫히고도 키가 커지는 사람을 보는 듯 했다.

몇 달에 걸쳐 첫 결실을 맺은 포도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맛이 좋았다. 청량하고 깔끔하면서도 농후한 단맛이 무엇인지를 절실히 느끼게 하는 일품이었다.

굳이 와인으로 만들 필요도 없이 이대로 팔아치워도 차고 넘칠 것 같았다. 아마 엘프가 직접 재배했기에 이런 맛이 나는 것이리라.

“ 와… 뭐가 이렇게 맛있어요? ”

제법 오랜 시간을 거쳐 일궈낸 토지는 더 이상 황무지가 아니었다.

엘프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 그런지 잘 손질된 숲 속 마을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 그… 그렇게 맛있어? ”

“ 네. 적어도 제가 먹어 본 포도 중에서는 최고로 맛있네요. ”

애초에 이 대륙에서 포도를 먹어본 것 자체가 드물었던지라 잘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고급품임을 확신하게 하는 맛이 분명했다.

포도를 썩 좋아하지 않는 내가 연거푸 알맹이를 먹을 정도였으니까.

엘렌은 그 칭찬이 기뻤는지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웃었다.

그렇잖아도 그녀의 동료들과 다르게 가녀리고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어, 정말 가녀린 소녀 같은 인상을 주었다.

“ 내 손으로 밭이나 나무를 가꿔보는 건 처음이라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네. ”

“ 다행 정도가 아니에요. 이제 와서 생각한 거지만… 재배자를 비밀로 하고 팔면 삽시간에 유명해질 정도가 아닐까 생각해요. 그 후에 이름을 밝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

나는 순간적으로 꼼수를 부려볼까도 생각했으나, 곧 고개를 저으며 그럴 생각을 접었다.

그렇게 얍삽한 짓을 하다 몰아칠 후폭풍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 불편하더라도 천천히 나아가는 것이 편할 것 같았다.

정 안되면 내수용으로만 써도 그만이고.

“ 제가 장사는 잘 모르지만… 역시 정직하게 하는 게 낫겠죠. ”

“ 그래. 시간은 많이 있으니까 천천히 해도 괜찮아. 이런 생활을 하는 것도 꿈만 같으니까… 사실 더 바라고 싶지도 않긴 해. ”

현 상황에 만족하는 것이 비단 엘렌 뿐만이 아니라는 듯, 주위에서 이야기를 주워 담고 있던 다른 다크엘프들도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흉악스럽다 알려진 소문과는 다르게 소탈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 알겠습니다. 제 입장에서 더 바라고 싶지 않다는 말씀을 들어주기는 힘들겠지만… 느긋하게 가죠.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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