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결투 #7
* * *
검을 휘두르면 반드시 누군가가 상처입고, 허공에는 진하고 선명한 붉은 선이 그러졌다.
그럴 때 마다 기사들의 고통 섞인 비명소리가 연무장에 울려퍼져, 듣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팔십, 구십.
그 참상의 주범은 킬리네어 공작과 약속했던 대로 구십에 이르는 동안에도 사망자를 내지 않았다.
상대의 숨통을 붙여 두면서도 철저하게 짓밟는 솜씨, 그리고 헬레나 자신의 기량이 몰라볼 정도로 늘어난 결과였다.
물론 온전할 수만은 없다는 듯 몸 곳곳에 생채기가 나 있었으나 지극히 경미한 수준이었다.
오히려 생채기에서 느껴지는 따가움이 머리를 비우고 집중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었다.
“ 허, 허어……. ”
마지막 열 번째 조이자, 마지막 제물이 연무장에 올랐다.
삼십이 쓰러질 때부터 방심을 버리고 날카롭게 신경을 가다듬었던 이들이 꼴사납게 널브러진 상황이기에, 이들 또한 긴장의 빛이 역력한 기색으로 검을 쥐고 덤벼들었다.
킬리네어 공작은 그 악몽 같은 광경을 보며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가 같은 귀족파를 포함한 중립파 곳곳을 뒤지며, 또 그 왕국 밖의 영역에도 손을 뻗어 끌어 모은 기사들이 한 여자의 칼끝에 쓰러져간 탓이다.
“ 저 비천한 자작놈의 아들만 없었어도…! ”
원망스럽다. 저런 비천한 놈이 없었다면 애당초 크라우저 공작과 척 질 일도 없었고, 이렇게 가슴 졸일 일도 없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휘하 귀족들을 부리고 다루며, 이권 다툼을 하며 세력을 넓히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알버스 킬리네어는 날벼락을 맞은 입장에서 그리 분노를 곱씹을 수밖에 없었으나, 그가 무심코 중얼거린 말 한 마디가 불리하기 짝이 없던 판도를 결정적으로 틀어놓게 되었다.
“ 커, 커헉……. ”
고지가 눈 앞이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저지르다니!
헬레나는 구십구의 기사를 쓰러뜨리고, 나머지 한 사람을 꺾어버리면 끝나는 이 시점에 저지른 실책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진 탓에 킬리네어 공작의 작은 중얼거림마저 주워들었고,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말았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명백했다.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지온 알트람을 깎아내리는 소리에 활화산마냥 치솟은 살심 때문이었다.
애꿎은 기사가 죽는 일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으나, 이로 인해 패배하게 되었다는 짙은 허무함이 헬레나의 심장을 싸늘하게 식혔다.
그녀가 심장을 찌른 기사는 즉사했고, 그로 인해 공증인이 킬리네어의 승리를 입에 담게 되었으니까.
◎◎◎
세상에.
나는 기사의 가슴팍을 깊게 파고 든 검을 보며 무척 큰 아쉬움을 느꼈다.
구십구에 이은 나머지 한 명을 남겨둔 때에, 헬레나가 실수로 상대 기사의 숨통을 끊어버린 탓이었다.
구슬땀을 흘려가며 지금껏 잘 싸워 왔으나, 그녀가 애써 세운 공든 탑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져버렸다.
그러니 기사의 몸에서 검을 뽑는 동작에도, 나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오는 걸음에도 힘이 없었다.
킬리네어 측에서 보면 비참하기 짝이 없는 결과이기는 하다.
백의 기사를 내보냈으나 그 대다수가 기사로서의 명줄이 끊어졌으니 비참하기 짝이 없는, 굴욕적인 승리처럼 보였기에.
그래도, 승리는 승리다.
잔뜩 일그러져 있던 킬리네어 공작의 인상이 펴지는 것만 보아도 그 점은 명백했고, 부정할 수도 없을 노릇이다.
애초에 그런 조건을 깔고 시작한 한 판이었으니.
“ 미안, 미안해……. ”
쯧. 불쌍하게도.
헬레나는 퀭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약간 달뜬 수준이었던 호흡도 크게 흐트러져 있었으며, 손을 덜덜 떨기까지 했다.
한 순간의 실수로 승수 하나를 놓쳤으니 어지간히 죄스러울 만도 했다.
나로서는 그 감정에 온전히 공감하지는 못할 테지만, 그녀가 어떤 상태이고 또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는 안다.
바깥인 것을 잊고 내게 반말을 할 정도로 자기 관리가 불가능한 상태니까.
“ 고생했어요. 정말 멋있었습니다. 새삼 다시 반했어요. ”
들것에 실려 어딘가로 옮겨지는 기사들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겠으나, 내게 있어서는 헬레나가 우선이었다.
본 적도 없는 기사들이나 공포에 질린 시선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다.
“ 그, 그래도, 내가 실수만 안 했어도……. ”
“ 저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헬레나와 엘렌이 가볍게 승리하면 제가 나설 자리가 없잖아요. 그러면 제 실수를 스스로 해결하고 싶다는 다짐을 지키지 못하는 셈이고요. ”
나서는 것을 썩 즐기는 편이 아니었으나, 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앞서 생각했을 때에도 그렇고, 그저 멀찍이서 구경만 할 생각이었다면 엘렌을 데리고 온 시점에서 느슨함을 풀었겠지.
“ 다행… 이라고? ”
“ 네. 다행이요. ”
내가 먼저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듯 웃자 헬레나도 점점 정신줄을 잡는 듯한 기색이었다.
떨림이 멎고 눈에 총기가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 정말…? ”
“ 네. 그러니 기왕 제 차례가 온 김에, 꼭 이겨서 올게요. ”
나는 헬레나의 손을 꼭 잡아 준 뒤 연무장 위로 올랐다.
우리 쪽에서 먼저 선수를 내보내는 것 또한 킬리네어 공작과의 협의사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협상안이 썩 불리하고도 말할 수만은 없었다.
어차피 상대가 나오면 쓰러뜨려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이며, 상대측에 마스터가 없는 이상 누가 나선다 한들 거기서 거기였다.
물론 마탑에서 마법사를 끌어들이는 수도 고려해 볼 법 하지만, 애초에 대인전에 익숙한 이들이 아니기에 와봤자 별 도움은 안 되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정령마법을 사용하는 엘렌은 무척 이질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 자작의 아들이 공명심에 불타 사리분간을 못 하는 건가? 이런 결투에 갑옷도 없이 나오는 꼴이 참 우습군. ”
연무장에 오른 기사는 대뜸 나를 도발하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상대를 깔보는 꼴이 킬리네어 공작과 꼭 닮아 있어, 혹시 그의 직속 기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도발에 대꾸를 할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애초에 오러 블레이드 앞에서는 무슨 갑옷을 입던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굳이 저런 말을 하는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것을 알고도 저런 말을 한다면 오러 블레이드도 끌어내지 못하는 기사라는 셈이니, 근심거리를 하나 더는 셈이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그리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것일까.
기사는 대꾸도 하지 않는 내 반응에 크게 모욕을 당했다는 듯, 검을 뽑아들기 무섭게 오러를 불렀다.
성격은 오만하고 더럽지만 검을 뽑는 솜씨나 자세 등을 보니 제법 공작의 신뢰를 받을 것 같았다.
어쨌든, 이로 인해 날로 먹는 것은 글러먹은 셈이다.
“ 준비가 된 것 같으니, 시작하시오. ”
국왕의 엄숙한 선언이 귀를 울리자, 기사 측에서 기다렸다는 듯 연무장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기사지만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한 듯 했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헬레나가 기사들을 무더기로 쓰러뜨리는 것을 보며 무뎌진 감이 자리를 찾았다.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다소 부끄럽지만… 실력은나보다 약간 위 정도다.
그 말은 즉, 충분히 해 볼만 하다는 뜻이었다.
“ 엇…?! ”
거 봐라.
상대가 워낙 생각 없이 휘두르긴 했지만,그래도 익스퍼트 상급의 검을 가볍게 피해내지 않았는가.
“ 어이쿠. 참 위험했네요. ”
나는 빈틈을 찌르는 대신 거리를 두며 상대를 조롱했다.
헬레나처럼 빠르고 강했다면 당장 틈을 찔러 흐트러뜨리겠지만, 내 역량으로는 확신할 수가 없었기에 내린 선택이었다.
주먹과 검이라는 사거리 차이도 있었고.
“ 네놈…! ”
“ 아니, 뭘 그리 화를 내고 그러십니까? 공작님 밑에서 일하시는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본인이 공작이라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그건 너무 제 주제를 모르는 것 같은데. ”
도발이 잘 먹혀든 덕일까. 기사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몹시 화가 난 것은 반응으로만 봐도 명백하나, 검을 휘두르는 솜씨가 깎이지 않은 것이 유감이었다.
여전히 빠르고 복잡한 검로를 그리고 있었기에.
“ 쥐새끼 같은 놈…! 더 이상 피할 자리도 없을 거다! ”
기사는 악에 받쳐 씩씩대면서도 나를 비웃었다.
피하기만 계속하다 보니 어느 새 연무장 끝에 몰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연무장 바깥으로 나선다 한들 별 문제는 없었다.
애초에 그런 규칙이 있었다면 헬레나를 포위했던 기사들은 나서보기도 전에 싸울 기회를 잃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대가 궁지에 몰린 것처럼 느낀 것은 어째서냐.그 이유는 바로 무대의 경계선이 마치 운신의 폭을 제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막상 밖에 넓은 공간이 펼쳐져 있어도, 이런 환경에서 싸우면 발을 딛고 선 무대만이 전부라는 압박에 시달려 사고가 좁혀진다는 구절이 그 근거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런 내용의 글을 읽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렇기에 저 기사는 다 잡은 생쥐를 보는 것 마냥 입맛을 다셨지만… 꼭 그런 이유 뿐만은 아니었다.
당장 발 딛을 곳이 제한되었다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바닥으로 뛰어내리는 도중 틈을 드러낼 가능성도 높아 보였다.
“ 죽어라! ”
애초에 내가 항복을 하면 헬레나는 자동으로 패배한다.
그러니 항복을 입에 담을 수는 없을 노릇이었고, 기사 또한 그것을 아는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휘둘렀다.
“ 아이고…! ”
나는 도박빚에 시달리다 인생 종 친 인간마냥 울상을 지으면서도, 재빨리 가슴팍 안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발도술을 쓰듯 연미복 재킷 안쪽에 숨겨 두었던 더크를 뽑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얼핏 검로가 여럿으로 보이고 복잡해 보인다고는 하나 그 실체는 하나다.
정말로 여러 개의 검으로 휘두르는 것이 아니기에 선 하나만 제대로 막아내면 그만이었다.
말은 잘 하네. 그렇게 이론대로만 굴러가면 누가 고생하냐.
누군가 내 생각을 읽는다면 이런 말을 하며 매도할 지도 모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의 나는 그 말을 직접 실천할 기량이 있었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대부분 헬레나가 닦아 준 기량이지만…….
“ 뭣?! ”
날과 날이 부딪히고 마찰을 일으키자 기사의 안색이 하얗게 물들었다.
아직 크게 위험한 것은 아니나 크게 허점을 찔린 탓에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입만 살았을 뿐 피하기만 하던 애송이가 오러 블레이드까지 써가며 자신의 검을 막아낸 것이다.
아무리 기사가 보통 사람에서 벗어난 능력을 휘두른다 해도 그 감정마저 비범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뭘 그리 놀래요? 더크 처음 보나? ”
나는 더크의 손잡이를 한층 더 강하게 부여잡으며, 빈 손으로 검을 든 팔목을 낚아챘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기에 기사가 반응하는 것보다 한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 흥! 고작 맨 손으로 건틀릿을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
기사는 재빨리 당혹감을 수습한 뒤 남은 손을 나를 향해 휘둘러왔다.
격투술도 훈련한 듯 제법 빠르고 흔들림이 없는 주먹이었다.
그저 유감스러운 점을 꼽는다면, 검에 비해서는 그 수준이 한참 뒤떨어진다는 점이었다.
“ 그러는 니 팔뼈는 무쇠인 줄 아냐? ”
그렇기에 고개를 트는 것으로 남자의 주먹을 피해낸 뒤, 일부러 말을 편히 놓으며 남자를 더욱 강하게 도발했다.
오러를 손에 두를 수 있다면 건틀릿의 강철마저 구길 만 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또, 오러를 손에 두르는 훈련을 하고는 있지만 그 성과가 미미하기도 했고.
단.
그렇다고 해서 남자의 건틀릿을 잡은 것이 아예 헛수고라는 뜻은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건틀릿을 꼈다 하더라도 그 안의 팔마저 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끄, 끄으으으…!! ”
즉, 건틀릿 째로 팔 전체를 뒤틀어 버리면 제아무리 기사라 하더라도 꼼짝 못한다는 뜻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