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40화 (40/192)

〈 40화 〉 결투 #2

* * *

오랜만이다.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크라우저 공작령을 보며 감격에 젖었다.

지방 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사람들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 부유하군……. ”

엘렌은 짐마차를 모는 내 옆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높고 큰 성곽은 어느 영지에서나 볼 법 했지만, 공작령의 것은 궤를 달리한다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리라.

“ 역사도 있지요. 오래되었지만 꾸준히 보수를 해서 단단하기도 합니다. ”

“ 그래. 척 보기에도 그런 것 같군. ”

그녀는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꺼리는 기색이 없는 것을 보니 예의상 맞춰주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 아무튼… 이제부터 범의 아가리로 들어가는 셈인가. 긴장 좀 해야겠어. ”

능청스럽게 말하는 것과 달리, 엘렌의 표정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헬레나의 인품을 충분히 설명했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보이는 긴장감이었다.

상대가 보기 드문 소드마스터에 공작 직위를 가진 사람이니만큼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는 말도 있으니까.

“ 설마… 지온 알트람 님이십니까? ”

잡생각을 품은 채 성문에 다다르자 위병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내가 공작령에서 태어나 자란 알트람의 인간이었기에 금방 얼굴을 알아본 듯싶었다.

더해, 헬레나의 곁을 지키며 이곳저곳 들쑤신 적도 있었고.

“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제 막 돌아왔어요. ”

“ 영지를 떠나셨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이렇게 뵙게 되니 정말 놀랍군요. 그러고 보니……. ”

문득, 반갑게 인사를 건네던 위병의 미소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내 옆에 자리 잡고 있던 엘렌과, 그 뒤를 따르던 다크엘프의 무리를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내가 영지를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은, 그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는 말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단, 문제가 있다면 다크엘프를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이 대륙에서 나고 자란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상식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상식에 얽매인 인간이 아니었기에 위병을 온건하게 나무랐다.

나를 위해, 더 나아가 헬레나를 위해 힘써 줄 이들을 당연한 시선을 조금이라도 걷어내기 위해서였다.

“ 어떤 기분이실지 저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데려 온 손님입니다. 그러니, 부디 조금만 이해 해 주시죠. ”

“ 아, 예에……. 잘 알겠습니다. ”

위병도 그 점을 충분히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별도의 심사 없이 성문을 통과시켜 주었다.

자랑같이 들리겠지만 이 공작령 내에서는 내 얼굴이 출입증과 같았던 덕이다.

“ 죄송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런 시선을 보내지 않도록 하고 싶지만……. ”

“ 풋.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미 반세기가 넘도록 받아 온 시선이다. 상처는 받을 만큼 받았고, 오히려 저런 시선이 아닌 쪽이 더 의심스럽다. ”

엘렌은 피식 웃으며 나를 위로했다.

그녀는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시선이 반가울 지경이라고까지 했다.

우호적인 척 다가왔던 남자에 대한 배신감이 쓰디 쓴 경험으로 남아 있었기에.

“ 하긴, 그렇지요. ”

다크엘프가 어떤 시선을 받는지는 잘 알지만, 최소한 이곳에 머무는 동안이라도 이 시선들을 바꿀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나의 새로운 목표이기도 했다.

물론 그 목표 또한 결투에서 이긴 뒤에야 해볼 법 하겠지만…….

“ 어서 오십시오. 무사하셔서 천만 다행입니다. ”

시선의 가시밭을 뚫고 저택 정문에 이르니, 앤디가 반갑게 나와 우리를 맞아주었다.

더구나 다크엘프의 면면을 보고도 꺼림칙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감사할 지경이었다.

“ 앤디도 여전히 정정해 보이니 다행입니다. ”

“ 크흠. 정정이라니요.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닙니다. 본인이 젊다고 해서 말씀이 좀……. ”

“ 하하. 죄송합니다. ”

나는 앤디와 반갑게 근황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눈 뒤, 마구간 쪽으로 짐마차를 몰았다.

새삼스럽지만 면허 딸 때 외에는 해 본적 없었던 운전을 원 없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참. 도착하시마자 집무실로 오시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

나와 함께 몸소 마구간까지 온 앤디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피로가 쌓인 내게 또 움직이라는 말을 전하는 것이 몹시 미안해 하는 기색이었다.

그에, 나는 전혀 그럴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부른다면 시종이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

“ 알겠습니다. 그러면 죄송하지만, 이분들은 따로 별실에……. ”

“ 물론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결투를 위해 먼 땅에서 이곳까지 오신 분들을 그냥 방치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엘렌 레드후드라는 분은 지온 님과 함께 찾아오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

아무리 오물 취급을 받는 다크엘프라도 내 손님 자격으로 온 이상 함부로 대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러니 보통 손님을 대하듯 별실로 직접 모셔가려는 생각이겠지만, 엘렌과 함께 들어오라는 것이 조금 놀라웠다.

예상했던 일이긴 해도 놀라운 것은 놀라운 것이었다.

“ 좋다. 그렇게 하지. ”

엘렌은 설령 귀족의 앞이라 해도 얕보이지 않기 위해 반말을 포함한 딱딱한 말투를 사용했다.

또, 그녀 또한 헬레나를 당장 만나볼 생각에 제법 즐거워 보이는 듯 했다.

불이 타는 것 같은 눈과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그러면, 앤디는 나머지 다크엘프 분들을 안내해 주세요. 엘렌은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

“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나머지 분들은 저를 따라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엘렌을 제외한 무리는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들의 머리를 바라보다, 곧 결심을 굳힌 듯 군말 없이 앤디의 뒤를 따랐다.

그에 나 또한 스쳐 지나는 하인들과 짤막하게 인사를 나누며 응접실로 향했다.

절제된 화려함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하는 복도. 저택 내부의 차분한 분위기까지.

하나같이 반갑기 그지없었던 덕에 절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반대로 엘렌은 다소 불편해 하는 기색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 여깁니다. ”

다소 풀린 마음을 품고 계단을 걷고, 복도를 걷다 익숙한 문 앞에 이르렀다. 응접실이었다.

“ 음. 복잡한 사정은 집어 치우더라도, 천재로 소문 난 마스터를 직접 보게 되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겠어. ”

“ 그렇게 생각하시니 다행이네요. 그러면… 열겠습니다. ”

나는 엘렌과 짧게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조심스레 응접실의 문을 두드리려 했다.

살짝 구부린 손가락이 문에 닿았고, 곧 똑똑 소리를 냈다. 아니, 내려 했었다.

“ 밖에 있지요? 들어와요. ”

그러나, 한 발 먼저 익숙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나를 굳어버리게 했다.

대외적 가면을 쓴 헬레나의 목소리였다.

“ 기척으로 알았나보군. 역시 마스터는 마스터인가. 익스퍼트도 할 법한 기예 같기도 하지만……. ”

엘렌은 이 와중에도 팔짱을 낀 채 상대방을 분석하기 바빴다.

그 탓에 문을 열고 들어가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 까지 모두 내 몫이 되었다.

“ 지금 막 돌아왔습니다.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

나는 죄인마냥 고개 숙여 사과했다.

목소리를 떨기까지 하여 정말 미안하다는 듯한 감정을 실었다.

필요한 일이기는 했으나 걱정을 끼쳐버린 것은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제가 걱정한 건 아나요? ”

고개 숙인 내 머리 위로 헬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눈치 채기 어려울 만큼 토라진 기색이 담긴 목소리였다.

나도 눈치가 썩 빠른 편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헬레나의 감정 변화에는 민감한 편이었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고집을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 알면 됐습니다. 고개를 드세요. ”

찝찝한 명령이기는 하지만 어쩌겠나. 고개를 들라는 데 들어야지.

나는 낯빛을 굳힌 채 고개를 들어, 긴장한 기색이 잘 드러나도록 자세를 바로 했다.

온화하기 짝이 없는 헬레나의 눈빛을 보면 안심해도 될 법 했지만, 지금만큼은 각을 유지하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 수고 많으셨어요. 지온은 많이 피곤할 테니 우선 들어가 쉬세요. ”

“ 네…? ”

기껏 엘렌과 함께 불러놓고 벌써 쉬라고?

물론 고마운 배려이긴 한데, 의구심이 싹트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기껏 오라고 해놓고 얼굴만 슥 본 뒤에 가라는 말을 했으니, 어찌 보면 상대를 무시하는 처사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 생각이 틀렸다고 외치기라도 하듯, 헬레나의 목소리가 한 여자의 발목을 잡았다.

“ 엘렌 레드후드라고 했던가요? 당신에게는 할 말이 있으니 잠시 남아 주시죠. ”

◎◎◎

대체 무슨 영문이지.

엘렌은 자신과 마주보고 앉는 것도 모자라, 친절하게 차까지 끓여 내어주는 공작을 보며 당혹을 금치 못했다.

자신을 이런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힌 것부터 시작하여, 도저히 오물을 대한다고는 믿기 어려운 대접이었다.

물론 보통 손님이라면 이 정도 대접을 받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엘렌은 보통 손님이 아니다.

설령 결투를 하기 위해 왔더라도 세상의 통념이 그리 쉽게 바뀌는 것도 아니었다.

즉, 엘렌을 대접하는 헬레나 또한 제법 별종이라는 뜻이었다.

“ 드시죠. ”

“ 고맙소. 잘 마시도록 하지. ”

엘렌은 반 존대를 하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가슴 깊이 스며드는 청량한 향과 맛이 마음을 편히 해 주는, 손님에게 내는 차로서는 가히 최상품에 가까웠다.

더구나 울창한 숲을 떠올리게 하는 느낌까지 있었다.

그러므로, 엘렌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 반세기가 넘도록 전쟁터를 전전하며 살아남은 강자라고 들었어요. 그 역량을 저를 위해 써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

“ 으음……. 너무 정중한 태도에 몸 둘 바를 모르겠군. 그래도 너무 감사함이 지나친 것 같소. 나 또한 대가를 받고자 하는 속물적인 계산을 품고 왔으니, 좀 더 편히 대해주시오. ”

대가라.

헬레나는 부담스럽다는 듯 안절부절 못 하는 엘렌을 보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우선, 그녀에게 있어 최우선 순위라 말할 수 있을 지온이 데려 온 여자이니만큼 소홀히 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가치를 평가 한 남자의 안목을 깎아내리는 짓이었으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 생각한 것이 대가다.

지온이 집안의 힘을 빌려 토지 매매를 할 것이라는 소식은 들었으나, 정작 헬레나는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는 이상 땅을 떼어주는 것도 그녀 스스로가 할 일이며, 알트람의 돈을 떼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즉, 지금 당장 땅을 떼 주는 것도 헬레나 마음대로라는 뜻이다.

“ 땅 문제 말이군요. 좋습니다. 우선 외곽지역인지, 아니면 이 성 안에서 살 것인지 말씀해 주시죠. ”

“ 염치없는 부탁이 될 지도 모르지만 성 내부에 살고 싶은데… 가능하겠소? ”

“ 가능하죠. ”

다크엘프가 사람의 마을에 터를 닦고 사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엘렌의 용병단은 그런 반발마저 전부 힘으로 찍어 누르고 숙소를 마련하기도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불편한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억지로 얻은 신기루 같은 안식이었으니까.

그래서 저도 모르게 다소 주눅이 든 채 물었는데, 너무도 시원스러운 답에 무심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기대를 버리고 던진 질문에 긍정적인 답이 돌아왔으니, 엘렌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 가능… 하다고? 정말이오? ”

“ 네. 하지만 토지는 반으로 나누어 지급하겠습니다. 목숨 걸고 나서주는 것을 배려하여 우선 반을 선금 대신으로 드리고, 나머지 반은 성공보수로서 드리죠. 받아들이겠습니까? ”

“ 물… 물론이오! ”

그것도 토지의 반을 계약금 대신으로 받기까지 했으니엘렌의 마음이 들뜨는 것도 당연했다.

지금 그녀의 눈에는 헬레나가 전설로 전해지던 천사로 비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천사에게 인도 한 지온은 가히 신의 사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본래 너무 좋은 조건을 내밀면 오히려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이 엘렌의 성격이었다.

하지만 곧장 서로의 사인이 새겨진 계약서를 두 장 작성하여, 그 중 한 장을 넘겨주는 배포에 넋이 나가버리고 말았다.

더구나 크라우저를 상징하는 도장까지 찍었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설령 상대가 발뺌을 해도 계약서로 물고 늘어질 여지를, 신용을 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대우를 받은 이상 대가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

엘렌은 스스로가 중상을 입더라도 반드시 상대를 죽이겠다는 열의에 불타고 있었으나… 문득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에 섬뜩함을 느꼈다.

“ 참. 지온과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꼭 좀 들려주셨으면 좋겠는데요? ”

그것은 부드럽고 온화한 목소리가 맞나 싶을 정도로 싸늘하게 식은, 날카로운 칼날을 떠올리게 하는 목소리였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