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결투 #1
* * *
나와 떨어져 있던 다크엘프들이 돌아왔다.
함께 가겠다는 결론을 안고 왔다. 천만 다행이었다.
“ 하아……. ”
나는 뜨거운 숨을 한껏 토해내며 여유를 만끽했다.
이것으로 반쯤 이긴 셈이었으니 안도감이 들 법도 했다. 아직 안심하기에는 일렀으나 큰 산 하나를 넘은 것 같았다.
유산을 얻기 전이라고는 하나, 세계를 흔드는 세 축중 한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었기에.
“ 그것 참 다행이네요. 그럼 언제 출발하실 생각입니까? ”
“ 지금 떠날 거야. 굳이 질질 끌 필요는 없으니까. ”
엘렌은 홀로 말에 올라타며 시원스레 답했다.
결정이 빠른 것은 좋지만 설마 오밤중에 출발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말 놀라울 지경이었다.
“ 하지만 연락도 없이 갈 수도 없지. 그러니 나 혼자 이야기하고 올 테니까, 나머지는 여기서 기다려. ”
거기다 고지 위의 진지로 말을 모는 것은 엘렌 혼자였다.
듣기론 미리 이야기했던 대로 움직인 것이라고 하는데, 만에 하나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한 것 같았다.
아마도 토사구팽 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려 한 결과겠지.
남아 있는 다크엘프 무리도 그것을 아는지 말에 탄 채 긴장이 역력한 기색을 보였다.
물론 나 또한 올리비아의 말에 올라 탄 채 숨만 쉬고 있었다. 고지 쪽에서 일이 터질 경우 재빨리 반응해 달려가기 위함이었다.
일이 터지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고는 하지만, 세상 일은 모르는 법이니까.
“ 어, 왔다. ”
경직된 공기가 흐르던 와중, 올리비아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저 멀리서 달려오는 엘렌을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들기도 했다.
묘하게 나사가 빠진 듯한 느낌이었으나,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안전하다는 뜻이리라.
“ 어떻게 됐어? 별 일은 없었고? ”
“ 내가 떠나는 것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기색이었어. 그래서 손을 쓸 것 같기도 했는데 결국 그만두더라. 아마 내가 설치면 큰 손해가 날거라 생각한 거겠지. ”
엘렌은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날아오는 질문에 침착하게 답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곧 잡아먹힐 사냥개 신세가 될 법 했으나, 이곳에서 아예 뜨겠다는 보장을 한 덕에 억지로 보내주는 기색이었다고 한다.
만약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다면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기습을 했을 지도 모른다는 말도 했다.
“ 어쨌든 별 탈 없이 마무리 지었으니까 당장 떠나자. 그리고 방향은 알고 있으니 안내 할 필요 없어. ”
“ 그것 참 반가운 소식이네요……. ”
나는 바깥으로 나오기 전 상인에게 주었던 짐마차와 돈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일이 성공한다면 가지고 갈수도 없을 것 같아 미리 넘겼는데, 막상 떠날 때가 되니 아까워진 탓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며 자신을 합리화하려 애썼다.
이미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설령 짐을 넘기지 않았더라도 문이 열릴 때 까지 기다려야 했다.시간이 엄청나게 낭비되는 셈이다.
그럴 바에야 지금 떠나는 것이 훨씬 나았다.
또, 돈주머니는 미리 잘 챙겼으니 상실의 아픔이 그나마 덜하기도 했다.
◎◎◎
우리는 여행 아닌 여행을 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잡담을 나누는 일도 많아졌다.
덕분에 엘렌과 다크엘프에 관한 정보도 자연스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중에서 놀라운 것은 엘렌이 모아둔 돈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비상시 사용할 돈을 마련해두기는 했지만, 그녀의 경력을 생각해보면 새 발의 피와 같았다.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았다.
아직 그 정도로 친하지 않았기에 다소 무례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내 빈약한 머리로 생각해 보건데, 보통 용병들처럼 헤픈 씀씀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 야채? ”
격전지를 벗어나 첫 야영을 하던 날.
남은 돈으로 새로 사들인 마차에서 재료를 꺼내 요리하던 중, 엘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러 야채나 감자 등의 재료만 있는 것이 신기했나보다.
“ 예. 엘프는 육식을 잘 하지 않잖아요. 아닌가요? ”
“ 그건 보통 엘프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지. 우리는 그 정도로 까다롭지는 않아. 주는 대로 받아먹는 게 보통이고, 더럽혀지지만 않으면 그만인걸. ”
모닥불 곁에 앉아있던 엘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엘렌의 그 표정을 보고 국이 끓는 냄비 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인생의 회한이 뚜렷이 드러나는 얼굴을 마주하기가 거북했던 탓이다.
아마도 먹을 것을 가릴 여유가 없었던 탓에, 억지로라도 식성을 바꾸어 왔겠지.
“ 그건 먹을 수 있는 거지,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요. 거기다 야채도 잘 조리하면 맛도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
나는 감자 껍질을 벗긴 뒤 얇게 썬 것을 도마에 올리며 피식 웃었다.
고기나 밀가루 음식을 주로 삼는 식생활에도 익숙해 졌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먹고 지내왔던 근본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니 채식 생활에도 익숙한 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절간음식처럼 전을 부치고 정성을 들이면 좋았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야영 중이다.
내가 생각한 요리를 하기에는 번거롭기 짝이 없는 환경이다.
그러니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하는 것이 현명했다.
“ 자, 차린 건 없지만 어서들 드세요. ”
나는 그릇에 스프를 담아 각자에게 건넸고, 얇게 썰어 지진 감자는 도마에 올려둔 채 알아서 집어먹도록 했다.
이것마저 일일이 덜어주기엔 식기도 모자랐고, 무엇보다 귀찮았다.
“ 응. 잘 먹을게……. ”
엘렌을 비롯한 다크엘프는 킁킁대며 스프의 냄새를 맡아보는 등 무척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이곳의 스프라 하면 보통 진한 육수에 깍둑썰기로 넣은 건더기가 포함된 것이 보통이며, 고급 레스토랑은 건더기를 빼고 육수의 맛을 진하게 살리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만든 육수가 연하다는 말은 아니다.
버섯과 배추, 양파 등을 넣고 푹 끓였으니 맛은 괜찮았다.
간도 적당히 잘 되었으니 불만스러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 맛이… 있어! ”
다크엘프 무리는 조심스레 한 모금 들이킨 스프의 맛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반짝이는 눈으로 스프를 먹음직스럽게 먹는 모습이 그 증거였다. 덕분에 나도 한 시름 놓고 마음 편히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입에는 맛있어도 다른 종족의 입에도 맞으리라 장담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이열치열.
여름의 더위는 더위로서 해결한다는 지혜가 담긴 말이지만, 이 정도 날씨에 이열치열을 논할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따뜻한 수준이라 지옥불반도의 여름보다 훨씬, 비교도 안 될 만큼 쾌적했기 때문이다.
“ 고마워. 맛있었어. ”
엘렌을 위시로 한 다크엘프들은 입가에 초승달 같은 미소를 걸며 만족스러워했다.
고기보다 야채를 좋아한다는 내 생각이 다시 한 번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설거지 좀 도와주실래요? ”
“ 응. 당연히 그래야지. ”
나는 엘렌에게 부탁하여 함께 설거지를 할 생각이었으나, 이들은 각자가 식기를 비롯한 조리도구를 손에 나눠 쥐었다.
적당히 도움만 받으려던 것이 아예 일을 미루는 결과가 되어 찝찝했다.
“ 아. 제가 할 테니까 전부 가져가지는 마세요. 잠깐 도움만 받으려고 했는데……. ”
“ 괜찮아. 모처럼 맛있는 요리를 대접받았는걸. 모두 손 놓고 있기도 찝찝해서 그래. 이해해 줘. ”
엘렌은 설거지를 하려던 내 앞을 가로막으며, 한 발 먼저 정령마법을 사용했다.
허공에서 폭포처럼 시원스레 쏟아지는 얇은 물줄기를 보니, 물의 정령이라 알려진 운디네의 힘을 빌리는 것이 분명했다.
조금 전 스프 끓일 물을 충당할 때도 비슷한 식이었다.
물의 정령으로 씻고, 바람의 정령으로 남은 물기를 털어내 마무리 한다.
나는 그 친환경적이면서도 효율 넘치는 세척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언제 어디서나 샤워를 할 수도 있을 테고, 물 부족으로 죽을 일도 없어 보였다.
유용성이 뛰어나다 못해 넘쳐흐를 지경이었다.
“ 고생했어. ”
내가 씻은 식기를 차곡차곡 정리하고 오자, 엘렌이 생글생글 웃으며 가죽으로 만든 물병… 수통을 내밀었다.
운디네로 만든 물을 차게 식혀 청량감이 넘치는 물이었다.
이런 시대에 저런 물을, 이런 여름에, 그것도 야외에서 손에 넣을 수 있다니. 정말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 씻는 건 전부 여러분이 하셨잖아요. 아무튼 잘 마실게요. ”
“ 설거지가 아니라, 저녁을 준비해 줘서 고맙다는 거야. ”
저녁이라. 고용주가 밥을 먹여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고, 엘렌도 그것을 잘 아는 여자였다.
그럼에도 밥을 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것은 단순히 밥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입맛에 맞추어 준 것이 고맙다는 뜻이겠지.
키야!
나는 시원함이 넘치는 물을 한껏 들이 킨 뒤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바깥에서 이런 물을 마시게 해 준 것도, 물을 편히 마련하게 도와준 것도 감사했기에.
“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이렇게 시원한 물도 주시고, 정말 여러모로 많이 도움을 받고 있어요. ”
“ 그렇게 고개 숙일 것 까지는 없잖아. 얼른 일어나. ”
엘렌은 민망하다는 듯 허둥대며 내 어깨를 잡아 위로 올렸다.
본래 다크엘프는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지만, 내가 싫어하지 않다는 것을 안 이후론 스스럼없이 손을 대기도 했다.
내쪽에서 먼저 평범하게 대해 달라는 말을 하기도 했었고.
“ 정말 고마워요. 엘렌이 나서준다면 결투에서 이길 수 있을 테고, 그러면 헬레나가 노에가 되는 것도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
“ 너무 확신하지는 마. 나도 어떻게 될지 확신하기 어려우니까. ”
엘렌은 내 아부에 얼굴을 붉힌 채 겸손을 떨었다.
전쟁터에 몸 담고 사는 여자로서 방심하지 않는 태도가 보기 좋았다.
덕분에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더 강하게 갖게 되었다.
비록 세 번의 결투 중 한 번의 승리라 할지라도 그 하나가 중요했다. 그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나를 쌓으면 훨씬 압박감이 덜하고,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지니까.
“ 그래도요. ”
“ …크흠! 아무튼, 이 이야기는 그만하자. 묻고 싶은 게 있거든. ”
“ 묻고 싶은 거요?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답해 드릴게요.”
그녀는 부끄러운 기색을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내게 질문을 던졌다.
대화를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것 같은데, 나로서도 나쁠 것 하나 없었다.
그래서 기꺼이 그러겠다고 답했더니, 제법 심각한 질문이 날아왔다.
“ 크라우저 공작은… 어떤 사람이야? ”
크라우저 공작, 즉 헬레나의 인격을 묻는 엘렌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비록 그들을 고용하고 데려가는 것은 나이나, 그 땅의 주인인 헬레나의 허가가 없다면 전부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더불어, 내가 알트람의 힘을 빌려 사려는 땅 또한 헬레나의 땅이다.즉, 실질적인 그들의 고용주가 바로 헬레나다.
그러니 그 성향이 어떠한지 들어두려 했다. 용병단의 머리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듣고 헬레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에게 집착하고, 그것을 빼면 소극적이면서도 마음이 약하나, 그것을 철저히 숨길 수 있는 여자.
그리고 다크엘프를 거론했을 때에도 혐오감 하나 드러내지 않았던 넓은 아량을 가진 여자이기도 했다.
정확히는 이곳 사람들이 그러하듯 오물 취급하는 혐오감과는 다른 부류였지만… 단순한 오해일 뿐이었다.
“ 헬레나 님은……. ”
그러니, 나는 자신을 갖고 헬레나의 인격에 대해 열변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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