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 다크엘프 용병 레드후드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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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약했던 온화함은 온데간데없고, 냉랭한 기운이 그 자리를 감돌았다.
땅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니 과거에 크게 데인 전적이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일반적으로 지불하는 돈이었다면 차라리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나, 말이 쏟아져 나온 뒤다.
평범한 인간인 내가 그로 인해 점점 험악해져가는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정면으로 파고들까. 아니면 살살 달래볼까.
나는 뇌리에 떠오른 두 가지 갈림길을 두고 고민했다.
어느 쪽으로 가던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명백하나, 어느 쪽이 좀 더 효율적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 오물에 관한 이야기는 둘째 치고, 땅과 관련해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
짧으면서도 긴 고민을 거쳐, 나는 정면으로 파고들 생각으로 운을 뗐다.
이런 일은 나중에 큰 화근으로 번질 가능성도 있고, 어차피 부딪혀야 한다면 지금 해결하는 것이 현명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 너 같은 인간이 그걸 왜 궁금해 하지? ”
먼저 건드린 것은 나다.
그러니 엘렌의 말투에 가시가 돋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결과였다.
“ 저는 당신을 데려가러 왔습니다. 그러니 불만이 있다면 그것을 듣고 최대한 해소할 생각이고요. 무엇보다, 당신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
“ 알고 싶다라.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나? ”
“ 능력은 없지만 들을 준비는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준비야말로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
다크엘프는 멸시받는 것이 당연하고, 장본인들 또한 그에 염증을 품은 채 익숙해진 상태다.
그 탓에 쓸데없이 시비를 걸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길 터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떠올린 것이 있었다.
만약 그들을 오물취급하지 않고 대한다면 처음에는 의심할 것이다.
상식을 깨는 행동이니 무언가 꿍꿍이가 있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꿍꿍이를 감춘 이들조차 넘을 수 없는 선이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표정 연기를 해도, 우호적인 척을 해도 넘을 수 없는 선이,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있을지 모른다.
때문에, 내가 그 선을 넘어 진심으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나쁘지 않은 결과가 나올 듯 했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진심을 다해 설득하는 것뿐이었으니까.
“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
“ 네. 제가 마법사라면 마나의 맹세를 해서라도 진심을 보였을 겁니다. ”
마나에 맹세는 어기는 순간 모든 능력이 봉인되는 강력한 제약이다.
마법사들만이 사용 가능한 점, 그리고 스스로의 맹세에 의해 적용된다는 제약이 따르나, 진심을 보이기에는 그만한 것이 없었다.
나는 새삼스레 마법사가 되었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를 품으며 눈에 힘을 주었다.
엘렌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찍어 누르려고 애썼다.
“ …좋다. 그 정도로 확신이 깊다면 이야기 해 주마. ”
다행히 내 진심이 전해졌는지, 엘렌은 눈에 힘을 풀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것은 처음으로 배신을 당하고, 그 대가를 치르게 했던 회한의 기록이었다.
우호적인 척 하며 토지를 넘겨준다는 말도, 그것을 미끼로 그녀의 힘을 마음껏 휘두른 뒤 처분하려 했던… 하나의 악몽이기도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우습게도 정말로 땅을 주기는 줬다는 것이다.
엘렌이 말했던 대로 좁쌀만한 정도였으나, 훗날 그것마저 아까워 독살 시도를 했다는 점이 꺼림칙했다.
“ 너 같은 오물에겐 한 점의 땅도 아깝다고 하더군. 독으로 약해진 몸에, 그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분통이 치솟던지……. ”
엘렌은 그 때 일을 떠올리는 것조차 혐오스럽다는 듯 두 손을 꽉 쥐었다.
뼈가 으스러져라 세게 쥐어댔다. 그 탓에 손아귀에서 피가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고통보다 기억에 아파하는 표정과, 한 방울씩 아래로 떨어지는 피.
그 모두가 무척 안쓰럽게 보여, 나는 올리비아를 향해 시선을 들어올렸다.
구속마법을 풀어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 허튼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계속해서 활을 겨누고 있어도 좋습니다. 그러니 풀어주시죠. 부탁드립니다. ”
낯선 이방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
특히 지금처럼 전쟁을 치르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랬다.
아군이 아닌 사람에게 마음을 열었다 거하게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아군조차 통수를 치는 세상이라 생각은 하지만, 그렇게 모두를 의심하며 살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기 어렵고, 믿을 사람은 믿어야 마음이 한 결 편해져서다.
나는 올리비아도 그렇게 생각해 주길 바라며 눈을 반짝였고, 그 결과는 성공이었다.
몸을 감싸고 있던 압박감이 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던 덕이다.
“ 쯧. ”
그 직후, 나는 혀를 차며 옷의 소매를 찢었다.
여러모로 더럽혀졌으니 최대한 먼지를 털어내는 것이 최선이었고, 힐을 하면 그만인 상처라도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최소한 이 천으로 상처 부위라도 감싸주고 싶었다.
“ 손 줘 봐요. ”
“ 엇…?! ”
내가 반쯤 강제로 다친 손을 잡아끌자, 엘렌의 입술에서 반쯤 놀란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인간이 스스럼없이 손을 잡는 것도 그렇고, 그 상처를 감싸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겠지.
“ 전장에서 반세기 이상 구른 것 치고는 손이 부드럽네요. 엘프라서 굳은살이 별로 생기지 않는 건가. ”
매듭을 묶고 거의 마무리가 되었을 무렵, 무심코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활도 사용하는 여자 치고는 굳은살도 별로 없었다. 오히려 검을 손에 쥐고 사는 헬레나가 더 딱딱할 지경이었다.
그러니 놀랄 수밖에.
“ 너는 다크엘프를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냐? ”
“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오히려 밤하늘이 생각나서 아름답기만 하네요. ”
스스로 생각해도 낡은 냄새가 진동하는 멘트를 잘도 내뱉었다.
덕분에 미약한 구토감이 느껴질 지경이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마무리를 지었다.
제법 단단히 조였으니 지혈 효과는 확실할 것 같았다.
그래도, 아예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은 아니었다.
잿빛 피부 위에 흐르는 달빛과 그 빛을 받아 반짝이는 땀방울을 보니 무심코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다.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이 문제이긴 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한다면 이 말을 들은 여자들이 죄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다는 점이다.
인간과는 그 시기를 나누는 기준이 다를지언정, 몸에 쌓인 세월과 경험이 변하지는 않았다.
즉, 이런 낡아빠진 말도 제법 잘 통했다. 우연히 떠올린 것이지만 의외로 효과가 좋았다.
“ 정말 그렇게 생각해? ”
봐라. 이렇게 말투가 부드러워진 것만 보아도 그 효과를 체감할 수 있었다.
거기다 눈빛에도 날카로움이 사라졌으니 거의 다 넘어온 셈이었다.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그랬다.
나는 이 기세를 몰아 토지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자 입을 열었다.
“ 물론이죠. 그리고, 이참에 말씀드리는 거지만… 여러분에게 약속할 토지는 빈말로도 비옥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땅덩어리가 크고 상태가 나쁘지 않지만, 텅 빈 공터와도 비슷해요. 그래도 그 땅에서 식물을 가꾸고, 나무를 심어 조그맣게나마 숲을 가꿀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것이 싫으시다면 본성 외곽에 넓은 숲이 있으니 그곳에서 살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
내가 사려는 땅은 넓이가 제법 있으나 건물 하나 없이 황량하다.
크라우저의 공작령에는 그럭저럭 넓은 숲이 있으나 성벽 밖에 있어 다소 소외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이라도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도 이 두 가지가 내가 마련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
그러니 어느 하나라도 마음에 들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 우리는 굳이 숲에서 살 필요가 없어. 그러니 꼭 숲과 관련지을 필요는 없는데? ”
“ 꼭 숲이 아니어도 된다는 말이지, 숲을 싫어한다는 말은 아니잖아요. 여러분들은 엘프니까 자연스럽게 숲을 좋아할 것 같은데… 아닙니까? 최대한 마음이 편안해지는 환경이기도 하고요. ”
나는 그들을 다크엘프가 아닌 보통 엘프처럼 대하듯 물었다.
엘프는 숲에서 살며, 숲을 좋아하는 종족이다.
그것은 다크엘프라 해도 마찬가지리라 생각했다.
보통 엘프가 타락하여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돌연변이처럼 태어났을 뿐이니까.
“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줘. ”
잠깐의 침묵 뒤, 엘렌은 그 짧은 한마디를 겨우 짜냈다.
분위기와는 별개로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니만큼, 의견을 통합하여 결정해야 하는 것은 명백했다.
“ 그러시죠. ”
고로,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여 그 시간을 주는 것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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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막상 그렇게 말을 꺼내기는 했으나, 엘렌의 마음은 이미 반쯤 기울어진 상태였다.
스스럼없이 손을 잡으며 천을 감아준 것도 그렇고, 말 한마디마다 느껴지는 진심이 그녀를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흔들리는 것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다크엘프 전부가 엘렌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나는 받아도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
“ 속단하기에는 이를지도 몰라. 그래도 진심이 느껴지는 건 부정하기 어려워 보여.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그렇잖아. ”
올리비아가 포문을 열어젖힌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땅에 관한 이야기에 화장기를 뺀 것도 마음에 들었으며, 누구나 손대기 싫어하는 다크엘프의 피부를 스스럼없이 만진 것도 제법 높게 쳐줄만 했다.
엘렌에게 우호적인 척 다가왔던 놈들마저 끝까지 접촉을 거부했으니까.
“ 아~ 진짜 아깝다. 잘생긴 것도 그렇고, 성격도 괜찮은 것 같은데 벌써 임자가 있다는 게……. ”
“ 얘도 참. 내가 공작이라도 그런 남자애가 곁에 있으면 진즉에 꼬셨지. ”
“ 하긴. 겉으로도 흠을 잡기 힘들어 보이는데, 성격마저 저러니…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게 이상해. ”
이들은 단단히 꽁깍지가 씌여 지온을 옹호하기 바빴다.
그에 엘렌은 홀로 쓰게 웃으며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었으나, 내심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
직접 손까지 잡힌 당사자였으니 그럴 수밖에.
“ 아무튼, 어떻게 할 거야? 엘렌이 머리니까 방침을 정해야지. ”
의견이 갈릴 수는 있으나, 결국 결정권은 엘렌의 손에 있다.
올리비아는 그것을 알기에 급히 대화를 멈추고, 엘렌을 바라보며 결정을 독촉했다.
지온 알트람에 대한 호감과는 별도로, 어떤 결정을 내리던 따를 생각이었다.
그것은 다른 다크엘프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할까.
엘렌은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침묵 속에서 입을 꾹 다물며 생각에 잠겨들었다.
호의는 호의일 뿐이며, 또 예전과 같이 뒤통수를 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상태다.마음이 흔들리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그러나, 마침 잘 되었다는 생각도 했다.
전장에서 피를 보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판도가 변하는 순간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 없는 것은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슬슬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다만 그 경우, 엘렌을 포함한 용병단은 괴물이 둥지를 튼 곳으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 으음──. ”
그래도, 도망칠 만하다. 이곳에서 수많은 병사를 뿌리치는 것보다, 마법을 사용해 한 명의 발목을 잡으며 도주하는 것이 훨씬 승산이 있다.
소드마스터가 간담을 서늘케 할 정도이기는 하나, 대비하면 안전할 수 있다.
엘렌은 침음을 흘리며 고민에 고민을 마친 뒤, 마침내 무겁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 가자. 이 전쟁터도 지긋지긋하잖아? 그러니 이쯤에서 떠나는 것도 좋은 선택이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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