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다크엘프 용병 레드후드 #7
* * *
“ 하아. ”
한 다크엘프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보았다.
희고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고독을 곱씹는 듯,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크엘프는 여자였고, 엘렌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레드후드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지긴 했으나 정작 본인은 그 이름을 썩 내켜하지 않았다.
그저 얕보이는 것보다 훨씬 나았기에 묵인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고민하고 있었다.
몇 년 전 블루네일의 내전에 참여한 이후 지금까지 이 전장에 붙들려 있는 것에도 염증이 나기 시작했다.
너무 오랜 시간 한 장소에 붙들리는 것도, 끝도 없이 피와 살을 보는 것도 거슬렸다.
하지만 이곳을 벗어나 새로운 거처라 할 전쟁터를 찾는 것도 번거로웠기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었다.
전쟁에 익숙하기는 하나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오랜 세월을 보냈기에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레드후드라 불리는 엘렌의 속내였다.
“ 혼자 구석에서 뭐해? ”
엘렌은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웃었다.
익숙하기 짝이 없는 올리비아의 목소리였으니 경계할 필요가 없었다.
“ 알잖아? 사람이 많은 곳은 번잡해서 싫어. 쉴 때는 조용히 쉬고 싶어. ”
“ 우리가 죄인은 아니잖아? 오히려 공적으로만 보면 이만한 충신이 없는데… 엘렌은 너무 소극적이야. ”
“ 그렇다 해도 저들에게 있어 우리가 오물인 건 변함없겠지. 실력은 평가할 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칭찬하기도 싫고, 가까이하기도 싫은 그런 것 말이지. ”
오물이라. 지금의 다크엘프를 표현하기에 이것만큼 잘 어울리는 말이 없다며, 엘렌은 피식 웃었다.
그에 올리비아는 눈살을 찌푸리다 말고 허탈하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엘렌이 이러는 것도 하루 이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익숙해지고 만 탓이다.
“ 아. 엘렌을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 데려왔는데. ”
올리비아는 문득 여기에 온 이유를 떠올리며 손뼉을 탁 쳤다.
어느 새 쳐진 어깨엔 힘이 들어가 있었고, 표정도 제법 생기가 넘쳤다.
“ 나를? 참모, 아니면 뭐 유격장군? 그것도 아니라면 좀 더 높은 쪽인가. ”
“ 아니야. 소테르 쪽에서 왔대. ”
“ 소테르…? 소테르의 인간이 여기까지 왔다고? ”
순간, 소테르의 이름을 접하는 엘렌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타 국가나 먼 영지에서 찾아오는 이들이 종종 찾아오기는 하나, 이 격전지까지 발을 들인 이는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 이름은 알아? ”
관심을 가질 수 없을 상황이었던 탓일까. 엘렌의 목소리에 조금씩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늘 같은 생활만을 반복해 지루하기 짝이 없던 차였기에 반갑기도 했다.
“ 응. 지온 알트람이라고, 혹시 알아? 귀족의 자식 같긴 하던데. ”
“ 알트람… 알트람……. ”
올리비아를 비롯한 용병단은 주위에 큰 관심이 없으나, 엘렌은 달랐다.
홀로 용병 생활을 시작했던 여자로서, 그리고 용병단의 머리로서 주위 소식에 밝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꾸준히 전쟁터를 배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엘렌은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다 눈을 크게 떴다. 헬레나의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처럼, 헬레나의 결투 소식이 전란에 불타고 있는 블루네일까지 다다른 결과였다.
“ 알지. 그 소드마스터 크라우저의 애인이라는 소문을 들었어. ”
“ 크라우저?! 거물도 보통 거물이 아닌데, 그런 여자의 애인이야? 깜짝 놀랐네. ”
어쩐지, 귀티가 나더라니. 올리비아는 지온의 생김새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가 크라우저의 애인이라고 하니 여러모로 납득이 갔다.
문제가 있다면 그런 귀족이 다크엘프를 소탈하게 대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 그런데 왜 그런 귀족이 다크엘프를 접하고도 싫은 티 하나 안 낸 걸까? 진짜 이상하네……. ”
올리비아의 입술 밖으로 튀어나오는 의문은 지극히 당연했다.
오물을 살갑게 대하는 인간은 본 적도 없거니와,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었다.
다크엘프가 불길함과 부정을 타고 난다는 것이 이 세계의 정설이었던 탓이다.
“ 뭐가 이상한지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
그러므로, 엘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날카로운 눈빛을 띠는 것 또한 당연했다.
◎◎◎
졸립다.
전쟁터에도 휴식은 있듯, 야습할 기미가 없다면 이곳의 밤도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품까지 해대는 것은 너무 나사가 빠진 것이 아닌가 싶지만, 다크엘프가 지키고 있는 이상 당장 죽을 걱정은 없어 보였다.
“ 전쟁 경험이 제법 있나보지? ”
고요한 밤 속에서 다나가 말을 걸어왔다.
덕분에 반쯤 졸음에 잠긴 뇌가 깨어나는 것 같았다. 다크엘프끼리 대화할 때와 다르게 딱딱한 말투였다.
다만, 전쟁 경험은 없지만 전투 경험은 있다.
그 덕에 긴장감이 덜 한 것일지도 모른다.
“ 아뇨. 없습니다. ”
“ 없다고? 그런데도 그렇게 태연하게 졸거나, 하품을 할 수 있는 건가? ”
“ 나사가 빠져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죠. 거기다 지금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조용하기도 하고. ”
내 무심한 대답에 다나가 몹시 기막혀했다.
경험도 없는 놈이 전쟁터 특유의 무거운 공기에서도 태연하기 그지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마 나 또한 신의 축복이 없었다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시종일관 딱딱하게 굳어 있었을 것 같다.
“ 그걸 자기 입에서 말하는 것 자체가 참 대단하군. ”
“ 감사합니다. ”
칭찬은 아니겠지만 칭찬처럼 받아들이고 감사를 표하자 다나의 표정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화가 나서 일그러지는 식이 아니라,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달리 말하면 심경이 복잡해 보였다.
“ …어흠. 아무튼, 엘렌을 만나러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 참 신기하군. ”
“ 신기하긴 하겠죠. 하지만 저는 절실했습니다. 그러니 여기까지 온 거고요. ”
사람은 살면서 똥을 쌀 수 있다. 아니, 반드시 쌀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 똥을 어떻게 치우느냐에 따라 사람의 수준이 결정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했다.
물론 똥을 치우려다 더 큰 똥을 싸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럴 경우엔 여지없이 욕을 얻어먹기 마련이나, 일말의 여지마저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똥을 싸고 튀어버리는 사람보다는 그 마음가짐이 훌륭하기에.
아. 그렇다고 해서 똥을 접하는 사람들의 화가 사라진다는 말은 아니다.
“ 그 절실하다는 이유가 뭐야? ”
“ 그건 저 멀리서 다가오는 여자에게 말하도록 하죠. 같이 들으시면 될 테니까. ”
나는 조금씩 가까워지는 말발굽소리를 들으며 숨을 죽였다.
제법 낯이 익은 올리비아를 포함한 다섯의 다크엘프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렌이 머리로 존재하는 용병단은 총 여섯. 그리고 내 옆에 서있는 다나를 포함한 다크엘프의 수도 여섯이다.
즉, 지금 다가오는 여자들 중에는 내가 찾던 여자도 있다는 뜻이었다.
“ 그래. 오나보군. ”
다나도 내 뜻을 알았는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크엘프의 청력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니, 내가 말하기 전부터 땅을 울리는 말발굽소리를 들었을 것 같았다.
“ 워, 워. ”
이윽고, 그들은 고삐를 다루어 말의 움직임을 막고, 잠시 풀숲에서 쉬게 한 뒤 땅을 밟고 섰다.
조금만 움직여도 손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다행히 우호적인 기색을 엿볼 수 있어, 지금 당장 나를 어찌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 네가 나를 만나고 싶다던 놈이냐? ”
다섯 중에서도 키가 작고 소녀 같은 여자가 목소리를 냈다.
겉을 감싸는 분위기는 그들 중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몸은 아니었다.
아름다움은 둘째 치더라도 체형 조건에서 여러 가지가 부족했다.
하지만 말을 건네는 태도와 주위의 반응을 보아하니… 이 소녀가 엘렌이라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 네. 지온 알트람입니다. 그러는 그쪽은 엘렌이 맞습니까? ”
“ 찍는 실력이 제법 좋군. 그래. 내가 엘렌이다. ”
소녀, 엘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쪼그려 앉았다.
나무에 기대앉은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다.
“ 다행이 잘 찍었네요. 아무튼, 여기까지 오신걸 보니 대화를 나눌 생각이 있으신 거죠? ”
“ 무슨 말을 할지 들어볼 생각은 있다. 하지만, 보나마나 알버스 킬리네어 공작과의 결투 때문에 날 찾은 거겠지. ”
나는 엘렌의 말을 듣고 눈에 힘을 주었다. 다 아는 듯이 말하는 듯한 모습에 놀랐기 때문이었다.
알버스와 마찰이 생겼다는 소식이 사람을 타고 퍼져나갈 것이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
본래 이런 부류의 가십거리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공작끼리의 마찰이니, 적당히 씹고 즐기기엔 더없이 맛있었으리라.
그럼에도,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전으로 정신없는 블루네일의 영지에서, 하물며 매일같이 피가 터져나가는 격전지까지 전해졌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 제법 놀랐나보군. 하지만 격전지라 해도 하루 종일 싸우는 것도 아니며, 사람과 사람끼리 잡담을 하며 소문이 나는 것도 여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더구나 보급을 통해 들어오는 건 물자만이 아니지. ”
“ 그렇다고 해서… 당신처럼 사정에 훤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
“ 그것까진 나도 모른다. 어쨌든, 그 소문난 결투에 나를 끌어들이려는 생각 같으니… 협상을 해 봐야겠군. ”
엘렌은 내가 말을 꺼내지 않았음에도 모든 사정을 훤히 꿰고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격전지에서 그럴 여유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마 전쟁터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얻은 여유겠지.
“ 좋습니다. ”
이야기가 빨리 진행되는 것은 나로서도 바라 마지않던 일이다.
더구나 단칼에 거절하지 않고 협상이란 말을 꺼낸 것에서 희망을 엿보았다.
너무 섣부른 생각인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조건에 따라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았다.
“ 어디… 내가 네 제안을 받아들인다 치면, 상대는 당연히 익스퍼트 급의 실력자가 될 터다. 전쟁터라면 모르겠지만 일대 일로 싸우는 상황에선 제법 어려운 상대겠지. 그 점을 고려해서 대가를 말해 봐. ”
엘렌은 몹시 친절하게도 견적 계산에 도움을 주려 했다.
단순히 일을 빨리 마무리 짓기 위함이 아니라, 어딘가 다른 꿍꿍이속을 감추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관심법이라도 있었으면 참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하며, 우선 내가 생각한 대가를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읽지도 못할 상대의 속내를 망상하다가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땅을 드리겠습니다.”
엘렌을 포함한 다크엘프들의 속내는 당연히 알 수 없다.
다만 머물 곳이 없기에 마을에서도 쫓겨났고, 지금 이렇게 전쟁터를 배회한다는 것을 안다.
그로 인해 그들이 편히 쉴만한 땅을 제공해주면 어떨까 하는 결론을 내렸다.
알트람은 따로 갖춘 영지가 없다. 기껏해야 저택을 포함한 주위 일대와 상회 건물이 세워진 곳이 전부다.
그러니 당장 통 크게 땅을 떼어줄 수는 없을지라도, 땅을 매입하여 주는 것은 가능했다.
체스에게도 허가를 맡아 둔 상황이다.
“ 땅… 이라. ”
엘렌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알쏭달쏭한 반응이기는 한데, 고민하는 것만 보아도 제법 성공적이라 생각했다.
생각할 가치조차 없었다면 코웃음을 치거나 단칼에 거절했겠지.
나는 조금씩 거칠게 뛰는 심장소리를 들으며 마른 침을 삼켰다.
시간으로 따지면 잠깐일지도 모르나, 내게는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는 순간 엘렌의 굳게 닫힌 입술이 열렸다. 그 행동 자체는 무척 반가웠다.
“ 땅이면 어떤 땅이지? 오물 처리장이나 만들 법한 구석에, 그것도 밀 한 톨 같은 황무지를 말하는 건가? ”
그저, 서릿발 같은 목소리와 날카로운 눈매가 문제였을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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