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다크엘프 용병 레드후드 #6
* * *
“ 후우……. ”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채 숨을 죽였다. 곡식을 감싼 포대와 포대 사이에 끼여 숨이 막혔음에도 어찌어찌 견뎌내고 있었다.
이미 곡식을 실은 짐마차가 영지를 나와 전선기지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평온하게 군량을 전달하는 것이 좋기는 하다.
평소 신경도 쓰지 않는 남의 나라 내전이라고는 해도, 지금은 내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웠으니까.
다만, 행운인지 불행인지… 보급선이 중간 정도에 다다랐을 즈음 소란이 일기 시작했다.
“ 왔다! 엘프년들이다! 도망… 커억?! ”
보급부대는 몇 개 조로 나누어 각기 다른 길로 향했었다.보급의 손실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한 당연한 조치였다.
순전히 운에 의지하는 점에서 소극적이긴 했으나, 보급부대에게 할애할 만한 여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격전지에서 힘을 빼면 그만큼 틈이 생긴다는 이유에서다.
“ 나왔… 나왔습니다! ”
“ 알아요! 일단 칼 꽉 쥐시고 얌전히 계세요. ”
본래 당장 도망칠 것을 권유하려 했으나, 그랬다간 아군 측이 사형시킬 지도 모른다는 말에 생각을 바꿨다.
당시 나와 처음 만났던 보급병은 그 가능성을 염려하지 못했는지 입을 쩍 벌리며 놀라워했었다.
물론 나 또한 놀랍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소극적이지만 병사들을 내 그늘에 숨기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다른 병사들도 어차피 죽을 거라면 도박이라도 해보자는 말에 무척 공감한 눈치였다.
“ 허어……. ”
군량미 꾸러미를 헤집으며 나오고 보니, 참 놀랍기 짝는 광경이 눈을 사로잡았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잿빛 피부에 긴 기럭지.
거기에 손에 쥔 작은 활의 시위를 능숙하게 당기거나, 혹은 마법을 사용하여 숨통을 끊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던 탓이다.
바람이 거칠게 부는 소리를 보면 그쪽 계열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 같은데 시동어를 읊는 기색도 없다.
아마도 엘프들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한 정령마법에 의한 결과처럼 보였다.
정령마법은 편의상 마법이라고 분류하지만, 사실 보통 마법과는 선을 달리한다고 한다.
일반적인 마법이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면, 정령마법은 사실상 의지를 자유롭게 발현하는 권능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나는 보급병들을 쓰러뜨리고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는 다크엘프를 바라보다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 사이 다른 병사들은 커다란 군량미 뒤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다.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으니 두려운 것도 당연했다.
죽는 것도 한 번 죽어본 놈이 잘 죽는다고, 경험이 없는 사람이 서투른 것은 자연스러웠기에.
“ 멈춰! ”
나는 상대가 마법을 사용하는 낌새를 보이자 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강철멘탈 덕에 두려움은 덜하고 침착함은 더했으나, 여기서 어처구니없이 죽을 수는 없을 노릇이었다.
본래 멈추란다고 멈추라는 사람은 잘 없다.
그래서 이 말의 유행이 된 사건은 두고두고 조롱거리가 되었다.
인터넷 상에서도 상대를 비꼬듯 놀리거나, 아니면 그 상황 자체를 웃기는 데 사용하는 식이었다.
그러니 이 다크엘프 무리도 내 말을 무시하고 활을 쏘거나 마법을 쓸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현실은 내 예상과 달랐다. 흥미롭다는 듯 눈에 이채를 빛내며 천천히 다가온 것이다.
아니, 이걸 진짜 멈추네?
“ 그래. 멈추라기에 멈춰 줬는데… 상상 이상으로 건방진 놈이네? 아니면 그냥 철이 없는 건가. ”
“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다른 점이 신경 쓰이는데? ”
그들은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 말에서 내려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농염하면서도 길쭉한 몸이 코앞에 다가오자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킬 뻔했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아도 무척 매력적이었기에.
“ 나이도 얼마 안 되어 보이고, 곱상한 것이나 분위기를 봐도 절대 이렇게 다닐 만한 부류는 아닌 것 같은데. 너 누구야? ”
유난히 여우 같은 눈꼬리가 도드라지는 여자가 피식 웃으며 내 턱을 쓸었다.
이미 내 명줄을 쥐고 있으니 알아서 처신 잘 하라는 듯이 느껴지는 행동거지였다.
그에, 나는 침착하면서도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촉촉하면서도 부드러운 손가락에 등줄기가 떨렸지만 태연자약하게 행동했다.
“ 저는 지온 알트람입니다. 블루네일 옆에 있는 소테르에서 왔습니다. ”
“ 소테르…? 거기서 여기까진 왜? ”
“ 당신들… 정확히는 엘렌을 만나러 여기까지 왔지요. ”
다크엘프는 그 특유의 피부로 인해 더럽다고 경시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고작 피부가 잿빛인 게 뭐가 문제냐 싶을 수도 있겠으나, 이곳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질 못했다.
상대가 아무리 매력적인 용모를 하고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이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예를 들자면, 온 몸에 똥칠을 하고 다니는 여자를 가까이 한다고 상상해보면 될 것 같았다.
“ 엘렌…? 너, 엘렌이랑 아는 사이야? ”
“ 얼굴도 본 적 없습니다. 하지만 흔히 알려진 레드후드는 그녀의 성씨도 아니거니와, 그렇게 부르는 것을 내켜하진 않을 것 같아서 이름으로 부를 작정입니다. ”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여자를 향해 성의를 담아 답했다.
엘프도 여느 귀족들처럼 성씨라는 것을 달고 사는데, 인간들과는 다르게 그들이 사는 마을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가령 마을의 이름이 그린이라면, 엘렌 그린이 되는 식이다.
두 여자는 내 성의를 알아냈는지 잠시 묘한 기색을 띠었다.
아주 잠깐 뿐이었지만, 나는 그 속에서 다소 우호적인 기색을 읽어낼 수 있었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그 낌새를 느꼈다.
“ …그런 것은 어디서 알아낸 거야? ”
“ 소문이나 책을 통해 알아냈지요. 당신들도, 엘렌도 엘프니까 당연히 규칙을 따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엘프고, 엘프의 성씨는 마을의 이름을 그대로 옮겨오니까요. ”
나는 엘프라는 말에 힘을 주어 답했다.그 덕에 차분함을 찾았던 여자들의 표정에 다시 한 번 균열이 일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감정을 잃고 무언가를 쏟아낼 듯 위태로운 상태였다.
그녀들도 그것을 알아냈는지 흠칫하는 모습을 보이다, 갑자기 한껏 굳어진 낯빛을 띠었다.
화를 내는 것은 아니었으나 무언가 몹시 걸리는 듯한 기색이었다.
“ 보통 인간보다 엘프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지만…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기분 나쁘리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애초에 다크엘프는 엘프가 아니라……. ”
“ 저는 피부색으로 당신들을 판단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크엘프의 미신을 굳게 믿는 보통 엘프들에게는 미안하지만요. ”
불길함과 더러움의 상징으로 두려움을 받거나 경멸을 받는다.
그것이 다크엘프에게 쏟아지는 시선들이라고 알고 있으나,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조금이라도 호감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가식이 아니라 최대한 진정성을 담아 이야기했다.
그리고 진심은 통한다고 하던가.
여우같은 눈꼬리의 여자는 피식 웃더니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마치 누군가를 놀리는 것 같은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 좋아. 데려가주지. 하지만 허튼 짓을 못하게 구속은 해야겠어. 어쩔래? ”
“ 네. 그렇게 하시죠. ”
“ 와… 움찔대는 기색도 없이 바로 답하네? 시원해서 좋아. ”
그녀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킨 채 정령을 불러 일으켰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대기의 흔들림이나 마나의 변화가 그 존재를 알려주고 있었다.
다만, 나는 그 존재를 느긋하게 느낄 겨를도 없이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정확히는 상체만 밧줄에 꽁꽁 묶인 듯한 불편함이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아마 마법을 통해 구속 한 것이 분명했다.
“ 올리비아. 정말 데려갈 생각이야? ”
여태껏 가만히 있던 다소 부드러운 인상의 여자가 목소리를 냈다.
처음 의문을 입 밖에 낸 이후로 처음 듣는,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나를 엘렌에게 데리고 가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옆 나라에서 왔다는 것도 그렇고, 구속을 당해도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어 수상쩍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지나친 여유는 당연히 의심을 살 법 했으니까.
“ 응. 재밌잖아. 아까 내가 슥 건드려도 기분나빠하는 기색 하나 없던 것도 그렇고, 오히려 강아지 같이 조르는 눈치던데? ”
“ 그랬… 나? ”
“ 뭐야? 못 봤어? 그랬다니까. 거기다 말에도 진심이 느껴지잖아. 너는 안 그래? ”
“ 거짓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서……. ”
이들은 갑작스레 자기들끼리 언성을 높여 다투기 시작했다.
정녕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묻어버린 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또 적을 앞에 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태연자약했다.
너무 여유로워서 오싹할 지경이었다.
“ 아무튼 데려가자. 거기다 엘렌을 만나고 싶어 하니 용건이라도 들어 봐야지. 내용은 보나마나지만 그 조건이 궁금하거든. ”
“ 하긴… 의뢰를 하러 왔다니 내칠 수도 없긴 해. ”
그녀들은 시원스레 나를 데려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전쟁에서 오래 살아 온 경험자답게 결정 속도가 제법 빠른 편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의심에 사로잡혀 앞으로도 제법 긴 시간을 끌었으리라.
그 시원스러움이 나로서는 참 반가웠지만, 떠나기 전 한 가지 부탁을 해야만 했다.
나를 믿고 여기까지 데려 온 병사들의 목숨을 끊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 으음… 병사들이라. 그러지 뭐. 어차피 너에 대해 말한다 한들 저놈들만 손해고, 적당히 잘 도망쳤다 말하면 봐주겠지. 우리가 보급선을 끊기는 하지만 전멸은 안 시켰으니까. ”
여자, 올리비아는 마치 일부러 전멸시키지 않는 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그 탓에 나는 그녀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올라타는 와중에도, 말이 어딘가로 달려가는 와중에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왜 일부러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머리를 돌고 돌았기 때문이다.
“ 너 진짜 신기하다? 손가락은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이렇게 뒤에서 딱 붙어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아? ”
“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네요. 교제하는 여자가 있는 몸으로 이렇게 다른 여성에게 안겨 있으니 양심에 찔립니다. ”
문득, 나는 등을 꾹 누르는 살덩이의 감촉에 죄스러움을 느끼며 답했다.
헬레나의 것보다는 못했으나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였으니, 마치 바람이라도 피우는 듯한 기분이었다.
덤으로 뭘 먹고 자랐는지 코를 파고드는 체향마저 달았다.
“ 오? 사귀는 여자가 있어? 누군데? ”
“ 헬레나라고 합니다. 매력적인 여자에요. 올리비아 씨도 충분히 아름다우시지만, 헬레나 보다는 덜하겠죠. ”
“ …아, 그래? ”
얼핏 지긋지긋한 애인 자랑처럼 들릴지도 모르나, 너도 제법 예쁘다는 뜻을 담았다.
덕분에 손발이 낙지마냥 오그라드는 듯 했으나, 성공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마음을 추슬렀다.
다행히 효과가 없던 것은 아니었는지, 올리비아의 목소리에 어색한 기분이 감돌았다.
여유가 없어지고 뻣뻣한 느낌이 감도는 것을 보니 반쯤 성공한 듯도 싶었다.
“ 다 왔어. ”
고요한 밤하늘 아래 말발굽 소리만이 울리던 와중, 올리비아는 어느 숲 초입에 멈춰 섰다.
고지와도 썩 멀지 않은 거리인지라 숲을 통해 기습을 걸어볼 만도 했다.
물론, 이곳에서 전쟁을 하는 이들도 그 점을 알았을 것 같이 분명했다.
하지만 고지의 주인이 흔들림 없는 것을 보니 실패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숲을 이용해 기습한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 너는 여기 있어. ”
올리비아는 말에서 내리게 한 뒤 적당한 나무 그늘 아래에 앉혀두었다.
조금 전과 달리 제법 사려 깊은 손길이 느껴졌다.
“ 다나. 나는 가서 엘렌을 데려 올 테니까, 너는 여기서 이 남자가 허튼 짓 못하게 감시해줘. 안 할 것 같긴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
“ 응. 걱정 말고 다녀 와. ”
그리곤 다른 다크엘프에게 부탁을 한 뒤 홀로 말을 몰아 고지 쪽으로 달려갔다.
엘렌을 데리러 간다며 떠났으니, 저 고지에 세운 간이 진영에 내가 기다리는 존재가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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