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다크엘프 용병 레드후드 #5
* * *
“ 시장 조사라고…? ”
“ 그렇다니까요? 귀족 여러분들이나 전쟁을 치르시는 분들이 저희를 고깝게 보시는 것은 알지만, 저희도 나름대로 절실해서 이러는 거지요. 그래도 폭리를 취하지는 않았습니다. ”
산과 물을 넘어 다다른 마르구스 백작령의 검문소에서, 나는 위병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위병의 경계심을 가라앉혀 의심의 눈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본래 이 마르구스 백작령은 내가 가던 길과 다소 떨어져 있어 우회를 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영지였다.
효율적인 것으로만 따지면 길을 쭉 따라 1,3 왕자들의 영역인 엑서스로 가는 것이 옳았으나, 이렇게 한 데에는 내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곡식을 4왕자의 영지에서 팔아버렸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전쟁특수를 노리고 온 상인이 진영을 가릴 필요는 없다.
그저 물건을 살 고객이라면 진영을 가리지 않아도 별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묘하게 찝찝했다.
혹여 4왕자 측에 곡식을 공급했다는 이유로 트집 잡힐 지도 모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까지 온 것은 좋았으나… 이곳은 현재 통행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는 상황이다.
간단히 비유하자면 민간인이 군부대 앞에 다다른 것과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출입이 아예 통제되느냐, 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이곳까지 물자를 팔러 온 상인들이 통제를 받아 들어가기도 했고, 다른 영지에서 들어오는 보급물자를 수시로 싣고 오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 그래… 칼 스무 자루를 팔러 왔다고? ”
“ 그냥 빈 손으로 보내긴 뭣하니까 돈이라도 벌어 오라고 병장기를 떠넘겼지 뭡니까? 수도 별로 없는데. ”
나는 평범한 상인 행세를 계속하기 위해 도적들이 흘린 병기를 챙겨 왔었다.시장 조사를 명분으로 겸사겸사 물건을 팔러 왔다면 조금이라도 의심을 풀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이곳은 격전지를 코앞에 두고 있어 돈을 찔러준다고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쓸데없는 의심을 살 뿐이라고 생각했다.
“ 으음… 물건은 뭐 딱 병졸이 쓸 만한 정도로군. 그래도 이전 곡식의 거래 증명서까지 들고 있으니……. ”
이 위병은 짐부터 시작하여 내가 내민 서류까지 꼼꼼히 살폈다.
그 탓에 시간이 제법 걸렸으나, 결국 통과를 받아낼 수 있었다.
“ 자, 증명서다. 잃어버리면 귀찮아 질 테니 알아서 잘 처신하라고. ”
“ 예. 고맙습니다. ”
나는 위병이 내미는 출입 허가서를 받아들어 품에 잘 갈무리했다.
이것으로 안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으나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위병이 길안내 겸 감시를 위해 붙인 병사와 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단, 그렇다고 해서 급히 도망쳐서는 안 되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거래를 끝마치면 병사는 알아서 떨어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그 때까지는 쓸데없이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렇잖아도 마을 곳곳에는 병사들이 열을 이루어 순찰을 돌았고, 병장기와 갑옷들이 스치는 소리만 들려올 정도로 삭막하다.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 이 정도면 되겠나? ”
“ 어우, 그럼요. 충분합니다. ”
그렇게 보급창고 근방까지 이동한 뒤, 나는 한 남자와 시원스레 거래를 마쳤다.
애초에 이윤이 목적이 아니었던지라 골치 아픈 협상을 할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돈을 받고 금방 자리를 뜰 수 있었다.
“ 참. 이곳에 온 상인들은 어디서 머무릅니까? ”
“ 아무 집에 들러 돈을 주고 자는 경우도 있고, 주인이 도망간 건물을 찾아 쉬는 경우도 있지. 보통은 여관 마구간에서 지내는 경우가 많다. 너처럼 짐마차를 끌고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 ”
그 후, 나는 길을 돌며 순찰을 하던 병사 하나를 붙잡고 여러 가지를 물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기에 정보료 대신 은화 두 개를 찔러주었고, 그 결과 유용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감사합니다. 바쁘신 와중에 붙잡은 것 같아 죄송하네요. ”
“ 됐어. 아무튼 제 몸 간수나 잘 해라. ”
“ 네. 병사님도요. ”
나는 병사와 헤어진 직후 곧장 아무 여관으로 향했다.
영업은 하지 않으나 영주의 명령으로 인해 마구간은 열려 있기 때문에, 보통 이곳에 짧게 오가는 상인들이 주로 애용하는 곳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내가 스쳐 지나며 확인한 상인들만 해도 그 수가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적당한 여관 마구간을 찾느라 제법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 거 참, 어린 친구가 이런 곳까지 장사를 하러 왔나? ”
내가 마차를 대기 무섭게 옆 칸에 짐마차를 대고 누워있던 남자가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짐마차에 짐이 없는 것을 보니, 이 남자도 막 누군가와 거래를 마친 모양이었다.
“ 예. 어쩌다보니 그리 됐습니다. 저희 상회의 신조가 좀 거칠어서, 저도 거기에 따르는 중이지요. ”
본의 아니게 말문을 트게 되었지만 나쁘지 않은 흐름이다.
대화를 하면 자그마한 정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할 수 있었기에, 나는 상인 경험을 쌓으려 하는 인간인 척 말을 이어나갔다.
“ 허허. 얼마나 거칠기에 자네 같이 어린 사람을 이런 곳까지 가게 하는가? ”
“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제법 기대를 받고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까지 온 데에는 제 욕심도 있고요. ”
“ 반쯤은 스스로 왔다는 건가? 그것 참, 어린 데도 아주 대단한 친구로군. 내 아들에게 본받으라 하고 싶을 정도야. ”
상인은 정말 감탄스럽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미안해질 정도였다.
“ 그렇게까지 칭찬하실 일은 아닙니다. 사실 둘러본다는 목적이 더 크니까요. ”
“ 둘러본다? 전쟁터에 관심이 있나보지? ”
“ 없으면 거짓말이겠지요. 전쟁터에서 소비되는 물자의 일부만 팔아치울 수 있어도 지속적인 이윤이 남을 테니까요. ”
군량, 병기, 생필품 등등. 보통의 전쟁은 그런 물자를 소비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 소비가 지나치면 국력이 쇠약해지기 마련이라고 들었다.
물론 군수물자를 생산하며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도 있다고는 하는데,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 상당히 냉정한 친구로군. ”
“ 제 짧은 생각이지만, 어떻게 말해도 좋게 포장할 수가 없는 일이니까요. ”
“ 그래… 결국 남의 전쟁에서 이득을 본다는 건 그런 거지. 지원이 아닌 거래가 되는 이상, 좋을 수가 없을 게야. 아니, 지원이라 해도 결코 좋은 뜻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 ”
상인은 지원을 빌미로 삼아 이득을 뜯어낼 속셈을 드러낼 수도 있다며 한숨 쉬었다.
나도 그 말이 옳다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 그러고 보니, 어르신은 이곳에서 제법 오래 거래하신 모양입니다? 말씀을 들어보니 이곳 사정에 훤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
“ 그야… 몇 년 이상 계속된 내전이고, 나도 그 틈을 탄지 올해로 이 년 정도가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
“ 오. 짧다고는 말하기 힘든 시간동안 거래를 하셨군요. ”
이 년이라. 나는 그 세월동안 꾸준히 이곳을 드나들던 상인을 놀랍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가깝기도 하고 조건도 나쁘지 않아 4왕자 진영과 지속적인 거래를 했다고 하더니, 전쟁 당사자 이상으로 제반사정에 훤했던 것이다.
아니, 사실상 전쟁의 당사자라 보아도 무방할 듯싶었다.
격전지와 가장 가까운 이곳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니까.
“ 음. 그래서 대충 어느 주기로 어떻게 싸울지도 어렴풋이 감이 오는 것 같아. 아마 다른 상인들도 마찬가지겠지. ”
더구나, 이 남자는 보급 현황에 관해서도 제법 잘 아는 눈치였다.
이 영지에 머무는 시간이 길수록 자연스레 알게 된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보는 눈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려워 보였다.
“ …그 중에서도 식량 보급이 참 어려워. 그 악명 높은 다크엘프가 어떻게든 전부 불태우려 덤벼드니까. 희생자도 제일 많은 위험한 임무지. 열에 다섯은 죽는다고 봐야 돼. ”
다크엘프. 그 말을 듣는 순간 뇌리에 번갯불이 튀겼다.
자칫 뇌가 타버리는 것이 아닐까 착각할 만큼 강렬한 느낌이었다.
여기까지 온 것은 좋았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했던 차, 아주 좋은 방법이 보인 덕이었다.
“ 혹시, 보급병이나 그 책임자와 안면이 있으십니까? ”
◎◎◎
이곳의 보급은 밤에 이루어진다.
처음에는 낮 시간대에 전선기지로 보급을 했으나, 엘렌의 보급털이 이후 밤이나 새벽으로 시간을 바꿨다고 한다.
그럼에도 모든 보급품이 온전히 전해지질 못하는 상황이었다.
전체 보급품이 10이라면 평소에 전해지는 양은 5정도였으며, 운이 좋으면 8정도가전해진다고 한다.
그런 상황임에도 보급은 필요했고, 희생을 줄이고자 호위 병사를 늘여보기도 했으나 죄다 헛수고였다.
별동대로 나서는 엘렌의 용병단이 사사건건 방해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상인의 중개로 소개받은 보급병에게 그런 사정을 들었다.
직접 사지로 나서는 만큼 생생함이 넘쳐흐르는 이야기였다. 보급관을 알았다면 이야기가 더 쉬웠겠지만, 보급병과 이어진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 짐마차에… 숨게 해 달라고요? ”
보급병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상인의 중재도 놀라운데, 난생 처음 보는 인간이 이런 말을 하니 어이가 없을 만도 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도 그렇고, 이 보급병의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 될 것 같아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 네. 꼭 좀 부탁드립니다. ”
“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건 아시죠? 걸리면 사형일지도 모른다고요. ”
전시에 외부인을 안으로 들인다? 충분히 사형이 될 만도 했다.
블루네일의 군법을 모르기에 단정할 수는 없으나, 이 남자가 말한 대로 사형에 처할 법도 했다.
그러니 단칼에 거절하려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 어차피 죽을 확률이 높은 임무 아니던가요? 물론 목숨이 위험하지 않은 전쟁은 없지만, 보급 임무는 이상하게도 죽는 사람이 더 많다고 들었습니다. ”
“ 그, 건……. ”
열에 다섯이 죽는 보급 임무. 그렇기에 그 악랄함은 최전방 못지않았고, 병사도 그것을 잘 아는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말을 잇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 병사 분께 처음으로 말하는 건데, 저는 레드후드의 용병단을 빼돌리려 왔습니다. ”
“ 예에?! ”
내 목적이 레드후드 그 자체라는 것을 듣자 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범한 상인 같은 놈이 이런 말을 꺼냈으니 놀랄 만도 했다.
“ 어, 어째서요? ”
“ 개인적으로 그들의 힘이 꼭 필요할 데가 생겨서 그렇습니다. 또 급하기도 했습니다. 이야기를 하려면 접근을 해야 하는데, 딱히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았고요. ”
그 목적이 궁금했기에 질문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으나, 나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다는 것으로 얼버무렸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구구절절 이야기 할 만 한 내용이 아니기도 했고, 무엇보다 사연이 너무 길었다.
그리고 그 사연을 밝히려 하면 가명까지 쓰며 온 이유가 사라질 테고, 그렇다고 해서 새롭게 앞뒤를 끼워 맞추기도 번거롭다.
그렇기에 적당히 얼버무리려 넘어가려 했다.
다행히 병사도 그 이야기를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잠깐 짬을 내어 나온 것이기에 금방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근무지 이탈과 같은 죄는 아니었으나 곧 순찰 대열에 합류해야 하는 것이 그 이유였다.
참고로, 이 병사와 순찰을 도는 다른 병사들에겐 적당히 뇌물을 주어 넘어가도록 했다.
“ 그래도 위험하기는……. ”
“ 압니다. 위험하죠. 하지만 저를 숨어들게 해 주신다면, 적어도 레드후드나 그 휘하 용병들이 당신을 해치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목숨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가는 셈이겠지요. 그리고 설득에 성공하면 용병단이 빠진 만큼 향후의 보급선이 크게 안정될 지도 모릅니다. 아닌가요? ”
“ 목숨을……. ”
죽을 것이 빤히 보일 만큼 위험한 임무다.
그러니 희망을 걸고 나를 숨어들게 하여 살 기회를 노리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지만, 나라면 그렇게 했을 것 같다.
어차피 상부는 병사 한 사람의 목숨을 그리 중요히 여기지 않는 편이다.
그 피해 규모가 커진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상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 당연했다.
적어도 이 땅의 지휘관들은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이 병사도 그것을 알기에 우물쭈물 하는 기색이었으나, 나는 그 마음을 돌리려 최대한 자신감 있는 태도를 보였다.
내심 승산이 희박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사로잡혀 있어도, 입에서는 태연하게 기만을 토해냈다.
“ 그래요. 그리고 설령 그들을 설득할 수 없다 하더라도, 당신이 도망칠 시간은 벌겠습니다. 약속하죠. ”
애초에 이곳까지 오며 무사하리라는 생각을 버린 지 오래다.
육체의 질김 하나를 믿고 칼이 몇 대 꽂힐 각오도 해 두었다.
찔려본 적은 없지만, 독을 먹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던 경험도 있었다. 덕분에 견딜만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내 말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그에, 병사는 말없이 낮은 신음만을 흘렸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한 것을 보아 결심이 서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 침묵의 끝에서, 병사는 아주 만족스러운 답을 내놓았다.
“ 해보죠. 어차피 죽을 가능성이 높은 도박이니, 한 번 더 도박을 한다고 한들 무슨 문제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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