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다크엘프 용병 레드후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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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바탕 요란스럽게 신고식을 치룬 후, 영지에 돌아온 우리는 이스 크라우저에게 커다란 질타를 받았다.
공작이 되자마자 다른 공작에게 시비를 걸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저쪽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 해서 이쪽이 선전포고를 한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더구나 흠집 없이 차분한 태도를 고수했던 헬레나가 그 주범이었으니 믿거 어려워하는 기색도 엿보였다.
헬레나는 정신이 병들어있다.
악화되지는 않았으나 완치되지도 않아, 지금처럼 계기가 있을 때 마다 그런 기색을 거침없이 내비치곤 했다.
나는 진작 그것을 알고 있었으니 한숨 쉬면서도 받아들일 뿐이었으나 이스는 그렇지 못했다.
그는 헬레나의 인격적인 면만을 보아왔을 뿐, 그 속에 품은 광기가 어떠한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스는 결국 이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찌 되었던 공작위를 정식으로 물려준 뒤였으며, 이미 공증까지 받은 안건을 뒤집을 수도 없을 노릇이었던 탓이다.
아쉬운 소리를 내는 순간 상대측에서 어떤 대가를 요구할지 모를 일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아버지, 저는… 도저히 그 여자를 용서할 수 없어요.
헬레나가 이스의 앞에서 처음으로 드러낸 가면 뒤의 얼굴이 큰 충격을 준 아니었을까.
아무튼,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게 된 원인은 내게 있다.
아그네스의 얼굴을 알았다면 장미 정원에서 마주한 순간 당장 튀어버렸을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골치 아픈 일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이 꼴이 났고, 뒤늦게나마 귀족들의 면면을 익히며 미리 피해야 할 상대를 가늠해 두었다.
인간은 일이 터지고 나서야 후회한다고들 하던데, 내가 딱 그 꼴이었다.
“ 아. ”
호랑이 위에 올라탄 순간 움직임이 멎을 때 까지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남은 기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 뇌리에서 번갯불을 튀기는 것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 헬레나. “
” 응…? 무슨 일이야? “
헬레나는 크라우저 뒷마당의 연무에서, 평소보다 두 배 이상으로 강도 높은 훈련을 마치고 쉬는 중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살짝 달뜬 숨을 토해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살짝 닿기만 해도 손이 베일 것 같이 날카로운 분위기는 덤이었다.
” 블루네일 쪽에 다녀오려고 해. ”
그 순간 뒷마당의 공기가 급속도로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내전이 한창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조금 거리가 있을 블루네일 왕국에 들르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눈치였다.
그렇잖아도 날카롭게 다듬어진 칼날 같았던 헬레나가, 내 말을 듣는 순간 한층 더 날카로운 살기를 흘렸다.
“ 왜? 어째서? ”
“ 그곳에서 엘렌 레드후드를 데려오려고. ”
이럴 때 무슨 나사 빠진 생각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지금 같은 상황이기에 엘렌을 데려올 명분이 섰다고 생각했다.
반세기 이상 용병 활동을 하며 악명을 떨친, 그리고 엘프로서 타고난 힘이 있다면 확실하게 승리를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았다.
더해, 붕괴의 한 축을 담당하는 여자를 지켜볼 수 있다는 이점도 얻을 수 있었다. 일이 잘 해결되기만 한다면.
“ 엘렌… 레드후드? 그 다크엘프 계집? 왜? 어째서? 혹시 그런 부류가 좋은 거야? 나는? 나는? ”
엘렌의 악명은 대륙에서도 제법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헬레나 또한 그 정보를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는 상태였고, 그렇기 때문에 음습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살짝 꺾인 고개에 빛이 사라지는 눈동자. 입술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왜 라는 말.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오싹한 공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공포 그 자체였다.
강철멘탈이 아니었다면 진즉 뒷걸음질 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내심 한숨을 쉬며 마음을 더 가라앉힌 뒤, 코가 닿을 듯 가까이 다가온 헬레나의 양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몸을 빙글 돌려 짙은 나무그늘 아래까지 밀어붙였다.
“ 지… 우웁! ”
내 이름을 부르려던 헬레나의 입술을 막고, 억지로 범하듯 키스했다.
마치 그날 밤처럼, 당장이라도 불이 터져버릴 듯 격렬한 키스였다. 호흡조차 가쁘게 해야 할 정도였다.
“ 응… 츄웁……. ”
헬레나는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기다렸다는 듯 혀를 섞어왔다. 질척한 물소리가 귀를 때렸다.
반쯤 감긴 채 파르르 떨리는 눈꼬리 아래에 감춰진 눈에 점점 빛이 돌아왔고, 뺨은 키스의 열에 달아올라 점점 붉은빛을 띠었다.
“ 하아…! ”
그렇게 제법 긴 시간을 공들인 뒤 입을 떼자,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헬레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입술을 떼자 서로의 입술이 투명한 실선으로 이어진 것을 볼 수 있었다.
“ 이 정도면 내가 헬레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 것 같아? ”
“ …응. ”
다소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저지른 일이지만 효과는 좋았다.
나름대로 극약처방이랍시고 해 보긴 했는데, 어색함 없이 잘 풀린 듯싶다. 그렇지 않았다면 헬레나가 이렇게까지 부드러워지지는 않았겠지.
나는 이 기세를 이어가자 생각하며, 헬레나와 이마를 맞댄 뒤 천천히,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키스로 기선제압을 했으니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였다.
“ 헬레나. 내가 좀 더 현명하게 행동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나는 그 점이 무척 후회돼. ”
아그네스를 처음 만나 대처했을 때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생각하고는 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 해서 늘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처럼 불길이 더없이 크게 치솟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한다.
내가 그러했듯, 또는 누군가가 그러하듯 늘 실수를 한다.
그것이 돌이킬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다르겠으나, 실수라는 놈은 늘 사람의 뒤를 따라다니기 마련이다.
스스로를 합리화하려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 합리화에서 그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이번 경우는 뒷수습이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아직 결투는 벌어지지 않았고, 시간은 제법 넉넉하다.
그러니 그 사이에 내가 아는 강자를 포섭함으로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었다.
더구나, 개미지옥에 빠져버린 순간부터 이렇게 되리라 예상했었다. 그러니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 지온, 그건 네 잘못이……. ”
“ 아니. 내 잘못이 맞아. 물론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결과는 보시다시피 이래. ”
헬레나는 풀이 죽은 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차분함이 돌아왔으니 평범하게 생각을 할 수 있을 테고, 그러니 내 말이 완전히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려웠으리라.
“ 결투는 이미 성립되었고, 이제 와서 취소할 수는 없어. 그러니… 하다못해 결투에 이길 수 있도록 돕게 허락해 줘. ”
“ 하지만……. ”
“ 헬레나. 나는 네 옆에 부끄럽지 않은 남자로 있고 싶어. 네가 약혼자라 불러 준만큼, 최소한 너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가 확인하고 싶어. ”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콧날을 닿게 하여 더욱 얼굴을 가까이 댔다.
서로의 숨이 섞여 하나가 될 만큼 가까웠다. 내 결심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목소리에 힘을 주기도 했다.
그 성과가 있었는지, 헬레나는 겁이라도 먹은 듯 위축된 기색으로 물었다.
“ 그래도… 지온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잖아? ”
“ 필요하지. 꼭 필요해. 내가 스스로를 용서하기 위해서라도 꼭. 나를 위해서라도. ”
과거의 헬레나라면, 또 내가 어느 정도 성장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일이 흘러가지는 못했을 것 같다.
아니, 애초에 그 시기에는 이런 일이 벌어질 틈이 없었을 것이다. 크라우저 공작령 내에서 머무르던 때였으니까.
하지만 시간은 지나고, 사람은 성장하여 밖으로 나가게 된다. 나갔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충돌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충돌을 일으킨 것이 다름 아닌 나 자신이기에 책임을 져야 했다.
현실적으로 온전히 모든 책임을 짊어질 수 없는 상황이라도 그래야만 했다.
또, 지금은말하지 않았지만… 돌아오는 날, 헬레나에게 내 속내를 밝힐 생각도 있었다.
“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겠네. 내가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을 거지? ”
“ 아마도. ”
“ 그렇다면… 허락할 수밖에 없잖아. ”
◎◎◎
헬레나의 허락을 받은 직후, 나는 알트람의 저택을 찾았다. 정확히는 그곳에 머무르고 있던 체스였다.
“ 헬레나 님을 제대로 말리지 못한 것은 네 책임이 크다. 그 점은 알고 있겠지? ”
“ 예. 잘 알고 있습니다. ”
“ 젊은 분이시니 혈기에 넘쳐 이런 일도 저지를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
체스는 긴 한숨을 내뿜으며 나를 가볍게 나무랐다.
힐난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나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식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 그렇다 한들, 한 번 물려버린 것부터 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로구나. 하필 문란하기로 소문난 아그네스 영애의 눈에 들어서……. ”
체스도 아그네스의 소문을 잘 알기에 고개를 저으며 한탄했다.
미리 그 얼굴을 알았다면 피했으리라, 라는 생각을 그 또한 하고 있는 듯싶었다.
더 나아가, 헬레나가 좀 더 사교계에 발을 들였다면 하는 푸념도 늘어놓았다. 고개를 푹 숙인 것도 그렇고, 무척이나 답답해 보였다.
“ …후우. 이렇게 푸념을 한다 한들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겠지. 이미 말이 튀어나왔으며, 엎질러진 물이다. ”
체스는 제법 오랜 시간을 홀로 푸념하다,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과 다르게 힘이 들어간 눈빛을 보니,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라 호소하는 것만 같았다.
“ 그래, 앞으로 어찌 할 생각이냐? ”
“ 블루네일 왕국으로 갈 생각입니다. 그곳에 가서 엘렌 레드후드를 영입해 데려올 생각이고요. ”
“ 그 부정한 다크엘프를 말하는 것이냐?! ”
체스는 엘렌의 이름을 거론하기 무섭게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다크엘프가 부정하다는 인식은 엘프나 인간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나는 다크엘프가 부정하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러니 우선 내가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만 설명했다.
“ 부정이라 하더라도, 레드후드가 세운 전공은 결코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아버지도 그 점은 잘 아시겠지요. ”
“ 음. 그 점은 확실히 부정하기 어렵지. 반세기가 넘도록 전장에서 구르는 괴물이니까. ”
사소한 결투부터 시작하여 암살, 규모의 크고 작음을 떠난 온갖 전쟁터에 참여하여 살아남은 용병이다.
물론 패배할 때도 있었으나 반드시 살아남았고, 또 그녀가 참여해 이긴 전투가 훨씬 더 많았다.
그로 인해 쌓인 경험치, 그리고 강함은 대륙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뛰어났다.
그러니 그 힘을 끌어들이면 확실한 승리 하나를 거머쥘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 그러니 가겠습니다. 가서 데려올 생각입니다. ”
“ …승산은 있다고 보느냐? ”
지금은 실리적 힘이 더 필요할 시기다.
크라우저 공작령 내에도 뛰어난 기사들이 있기는 하나, 정령과 마법을 부리는 레드후드보다 몇 수 뒤처지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니 더욱 가치 있는 것이라고체스가 인정한 듯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승산을 묻지는 않겠지.
그리고,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이랬다.
“ 확신은 하지 못합니다만, 있다고 생각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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