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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30화 (30/192)

〈 30화 〉 왕궁의 연회 #6

* * *

이야기라. 좋다.

킬리네어 공작은 그 말을 남긴 채 한 발 먼저 연회장을 떴다.

한껏 시비를 걸었다 쪽박만 찼으니 화가 날 만도 했으며, 무엇보다 헬레나의 매듭을 짓자는 말에 공감한 듯싶었다.

그에 나와 헬레나는 공작의 등을 따라 그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의 원흉은 아그네스는 뺀 채였다. 이제 와서 그 여자가 자리에 낀다 한들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 옳은 선택이었다.

“ 쯧. 일단 앉아라. 사람이 앉는 자리를 짐승에게 권하는 것은 꺼림칙하나…세워두는 것도 몹시 거슬리니까. ”

공작은 영 내키지 않는 듯한 투로 자리를 권했다.

가시 돋친 말투나 생생하게 일그러지는 표정이 그를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헬레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공작과 마주보고 앉았다.

아마 공작이 자리를 권하지 않았다 해도 알아서 의자를 빼고 앉았을 것 같았다.

행동에 거침이 없어 보이는 것이 그런 느낌을 주었다.

“ 고작 하찮은 자작의 아들 놈 하나 때문에 이 사단을 내다니. 실로 어이가 없을……. ”

“ 입 닥쳐. 한 번 더 네놈의 입에서 지온을 깎아내리는 말이 나오는 순간, 네 목이 바닥을 구르게 될 거다. ”

헬레나는 은근한 살기를 흘리며 공작을 날카롭게 째려보았다.

보통 귀족들처럼 평범한 교양 수준의 운동이나 검술만 익힌 공작이었기에, 헬레나가 흘린 살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용케 버티기는 했으나 확실히 겁먹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 짐승 같은 년. ”

공작도 그것을 알았는지 가볍게 혀를 찰 뿐이었다.

이렇다 할 반박이 없으며 얌전히 넘어가는 듯한 기색을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좋다. 본론으로 들어가지. 내게 영지전을 신청한다고 했던가? 내가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

“ 어떻게 될 지는 그대의 상상에 맡기마. ”

헬레나의 입가에 음산하기 짝이 없는 미소가 서렸다.제안이 거절당한다 하더라도 결코 포기할 기색이 없다는 인간의 얼굴이었다.

공작도 그것을 알았는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오만한 태도는 여전했으나 어딘가 위축된 기색이었다.

“ 영지전을 치르면 양쪽 모두가 큰 피해가 나온다. 그건 알고 있겠지? ”

“ 그래서 뭐? 내가 고작 이해득실이나 따지자고 전쟁을 거는 줄 아는가? 이건 자존심의 문제다. ”

그녀의 자존심은 곧 나라는 것인데, 듣는 입장에서는 몹시 낯 뜨거워지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몹시 심각한 상황임에도 기쁘게 느껴지는 내가 나사가 빠진 건가 싶기도 했다.

그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다.

그리고, 공작도 자존심이라는 말을 거론하자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만한 귀족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이니만큼 자존심이라는 단어에 몹시 민감한 것이리라.

“ 그래… 자존심이라. 설령 미친개라 해도 공작의 혈통이라는 것에 변함은 없으며, 네년이 공작이라는 것 또한 변하지 않는 일이지. 좋다, 어느 정도는 인정해 주마. ”

그러니 영지전 대신 결투를 신청한다며, 공작은 천천히 운을 떼었다.

“ 짐승 같은 네년을 보니 먹이를 물 때 까지 도저히 포기할 기색이 아닌 것 같고, 그렇다 해서 영지전을 치르는 것도 문제다. 고로 전통적인 방식인 결투를 통해 일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귀족답게. ”

영지전이 너무 전면적이고 규모가 크다는 것에는 동의한다.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것이 현명할 정도다.

그러니 이쪽 입장에서는 참 반갑기 그지없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어찌 보면 헬레나의 강경한 태도가 잘 먹혀든 결과처럼 보이기도 했으니까.

“ 결투라. 네놈이 승패를 가리겠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지. 좋다. 자세한 조건을 말해 봐. ”

헬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공작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공작을 찢어버릴 수만 있다면 무엇이 된다 한들 크게 상관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결투는 상호간의 합의만 있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어, 당사자들이 협의를 마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영지전도 비슷한 맥락이었으며, 물론 공증과는 별개다.

“ 좋다. 결투는 총 세 번으로 치루고, 승적이 많은 쪽이 이기는 걸로 하지. 불만은 없나? ”

“ 그 세 번의 결투에 나는 반드시 끼어야 할 것이다. ”

“ 그럴 생각이다. 네년은 상대의 목덜미에 직접 이빨을 꽂아 넣어야 만족할 짐승이니까, 끼우는 것은 당연하겠지. ”

총 세 번의 결투라는 것이 상당히 묘하기는 했다. 가위바위보도 삼세판도 아니고, 결투 삼세판이라니.

하지만… 그럴 듯하다 여겨지기도 했다. 설령 헬레나가 지더라도 나머지 둘에서 공작이 승리를 거머쥐면 되기 때문이다.

헬레나로 인한 부담을 상쇄하면서 승률을 높이는, 제법 계산된 제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작의 조건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 하지만, 네년은 소드 익스퍼트 급의 강자 백 명을 한 번에 상대해야 한다는 것이 조건이다. 더구나, 그들을 죽여서도 안 돼. ”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에 힘을 주었다. 익스퍼트 백을 상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나, 그들을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익스퍼트 또한 마스터에 비해 미약하기는 하나 오러 블레이드를 꺼낼 수 있다.

그것은 헬레나의 칼끝을 조금이라도 막아낼 수 있다는 이야기였으며, 그 수가 많아질수록 칼끝이 막힐 가능성도 높아졌다.

그리고, 그 틈을 타 헬레나를 무력화 시키려 든다면… 무척 어려운 싸움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워낙 소문만 무성한 소드마스터라 그 무력 수준을 정확히 측정할 수 없으니, 익스퍼트 백 명으로 충분히 이겨내리라는 계산처럼 보였다.

검을 휘두르는 헬레나를 누구보다 자주 보았다 확신하는 나조차 바닥을 본 적이 없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런 점에서 볼 때, 공작은 마스터의 바닥도 의외로 깊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익스퍼트 백 명이라는 구체적인 수를 제시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니면, 내가 앞서 생각한 대로 한 판을 내주더라도 나머지 두 판으로 이기리라는 계산일지도 모르고.

“ 알았다. 받아들이지. ”

당연히 헬레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공작 자신이 해볼 만한 싸움이라 생각했기에 건 제안이겠지만, 헬레나 쪽도 반갑기는 매한가지였으리라.

이유야 어찌되었던 공작 스스로가 매듭을 짓기 위해 덤벼들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참 고마운 일이었다.

“ 그렇다면, 이것으로 결투 조건은 성립되었다. 나머지 둘은 보통의 결투와 같이 일대 일로 치르도록 하지. 나설 사람은 네 쪽에서 알아서 뽑도록. 나도 그럴 테니. ”

“ 그러면 다음으로 승리할 경우 상대에게 요구할 조건을 말해봐라. ”

“ 조건, 조건이라……. ”

공작은 시비가 걸린 이상 결코 곱게 넘어갈 생각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결투를 생각하면서 그 대가로 받아낼 조건 또한 생각을 마쳐둔 것이 분명했다.

턱을 쓰다듬으며 여유를 부리는 모습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방 안에 적막하기 짝이 없는 침묵이 감돌기를 잠시.

공작은 드디어 턱을 쓰다듬던 손을 내리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채 입을 열었다.

“ 큭큭! 내가 이길 경우 헬레나 크라우저, 너를 우리 가문의 노예로 삼겠다. 물론 노예를 사역하기 위한 마법도 곁들일 것이다. 크라우저의 핏줄이라면 우리 킬리네어 공작가의 씨를 베도록 하는 것도 좋겠고, 소드마스터로서의 능력을 십분 이용하는 것도 좋겠지. ”

너무도 비열하기 짝이 없는 미소도 거슬렸지만, 헬레나를 도구로만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조건이 더욱 거슬렸다.

사실상 집에서 기르는 애완동물보다 바닥으로 취급할 가능성도 보였다.

하지만, 헬레나는 겁먹은 기색 하나 없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오히려 잘 됐다는 듯 피식 웃으며 입술을 뗐다.

“ 좋다. 아직 아버지도 정정하시니, 만약 내가 진다 하더라도 크라우저의 대가 끊길 일은 없겠군. 그러면 내 쪽에서 조건을 내밀 차례던가…? ”

“ 그래, 그래. 얘기해 보도록. 대체 무슨 조건을 걸 셈이지? ”

“ 우선, 처음 이야기한 대로 아그네스 킬리네어의 목이다. 그리고 네놈은 공작위와 모든 재산을 반납하고 숨통이 끊길 때 까지 수도원에 연금되어야 하며, 다음 킬리네어의 공작의 임명은 내가 한다. 물론 아무 상관도 없는 타인은 그 범위에서 제하지. 네놈 집안의 식구 중에서 정하겠다. 아. 수도원에 갇힌다는 건, 정치 활동을 일체 금한다는 말이라는 정도는 알겠지? ”

알버스 킬리네어의 조건도 상당히 추잡했으나, 헬레나의 것도 그것보다 더하지 덜하지는 않아 보였다.

현 공작을 폐위하고 그 다음 임명권을 틀어쥐겠다는 말은 사실상 킬리네어를 쥐고 흔들겠다는 소리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내 눈에 비치는 공작의 눈빛에 불이 붙지는 않았겠지.

“ 빌어먹을 년… 조건을 세 개나 내거는 것이냐? ”

“ 아그네스의 처벌은 당연한 것이니만큼, 사실상 두 개지. 그리고 그 두 개조차 나를 네놈의 노예로 다루는 것보다 가볍지 않나? 어쩌겠나? 수용하겠나? ”

지금의 헬라나라면 알버스 킬리네어의 유폐가 아니라 목을 잘라야 시원하겠으나, 그랬다간 모처럼 협상에 응한 상대가 도망갈 가능성이 높다 판단했다.

그래서 알버스의 목을 베는 대신 다른 방향으로 분풀이를 해달라 부탁했었다.

그 결과, 헬레나는 목을 베는 대신 그 놈을 폐위하는 것으로 타협하기로 한 것 같았다.

“ 수용이라……. 좋다! 받아들이지! ”

공작은 이빨을 뿌드득 갈며 사납게 으르렁댔다.

여태껏 한 인간으로서 쌓은 기세가 제법 위협적이었다.

허나, 헬레나는 그에 위협을 느끼기는커녕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결투를 받아들인 순간 반 이상 먹고 들어간 셈이니, 기뻐하는 것도 당연해보였다.

“ 기간은 한 달 뒤다. 공증은 전하께 부탁드리도록 하지. 공작의 공증을 할 만한 권위자는 전하밖에 없으시니까. ”

공작은 난폭하게 테이블을 쾅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마 한 달이라는 기간은 소드 익스퍼트급의 실력자나 나머지 두 판을 이겨내기 위한 사람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시간일 것 같았다.

그것은 즉 상대가 충분한 힘을 확보하는 것을 빤히 손 놓고 구경해야만 한다는 말과 같았으나, 헬레나는 그마저 수용했다.

처음에는 왜 순순히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였는지 몰랐으나, 훗날 헬레나의 입에서 그 이유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한 힘을 모아 의기양양한 공작의 면상을 철저히 깔아뭉개고 싶었다는, 그럴 수도 있을 법한 이유였기에.

◎◎◎

“ 허, 허허… 세상에. 결투, 결투라! ”

국왕 엘빈 소테르는 때 아닌 공증 요청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하물며 그 당사자가 두 공작이니 더 말하는 것이 민망할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득이 될 것이 하나도 없으니 말리고 싶었으나, 워낙 살기등등한 기에 눌려 얌전히 공증을 서기로 합의했다.

중앙의 힘이 없는 것은 아니었음에도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공포는 별개였던 탓이다.

“ 크라우저 공작. 어째서 갑자기 킬리네어 공작과 결투를 하게 된 겁니까? ”

당사자와 공증인이 모여 계약을 마친 이후, 왕은 헬레나만을 따로 불러 독대를 청했다.

전후사정을 듣긴 했으나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 전하, 그것은……. ”

그에 헬레나는 나름대로 정직하게 답했다.

상대가 몰랐다고는 하나 약혼자를 더럽혔고, 그로 인한 복수를 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기쁘게 받아들이기 어렵겠지.

며칠이라는 시간을 두고 열을 식힌 헬레나는 그것을 깨닫고, 본래 예정에도 없던 입 발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마침 크라우저 공작가가 국왕파이기에 더욱 설득력 있게 전해지리라는 기대를 품으며.

“ 더해, 귀족파의 수장인 킬리네어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함도 있습니다. ”

“ 킬리네어의 힘을요…? ”

나이로 보나 위치로 보나 기꺼이 하대를 할 수 있는 남자가 엘빈 소테르다.

하지만 그는 헬레나를, 크라우저를 존중했기에 사석에서도 늘 말을 높여 주었다.

“ 네. 아시다시피 귀족파는 귀족의 영향력을 더욱 높이기 위함이 그 목적이며, 그 때문에 전하를 포함한 국왕파의 힘도 야금야금 갉아먹는 일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

“ 그야 나도 알지요. 특히 킬리네어 공작 휘하의 귀족들이 욕심 많다는 것도 잘 알지요. 실로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

“ 예. 국가의 주인이신 전하께 올릴 말씀은 아니겠지만… 우리 국왕파의 힘이 조금 더 강한 정도가 딱 알맞은 균형이라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쪽에서 먼저 선을 넘었고, 지금도 계속하여 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 이쪽에서도 극약 처방을 해야겠지요. ”

극약 처방이라.

국왕은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 그래서 그토록 무모한 조건을 내거신 겁니까? ”

“ 먼저 무모한 조건을 걸어댄 것은 저쪽이지요. 아무튼, 그 덕분에 저도 강압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결투에서 이긴다면, 킬리네어 공작가는 더욱 약화될 것이 자명한 사실이지요. ”

“ 그렇군요. 후계를 지명할 권리를 공작께서 가지실 경우, 그것을 가지고 흔들 방법은 아주 많으니까요. ”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임명권을 손에 쥔다는 것은 아주 큰 위협이 된다.

하물며 그것을 쥔 상대가 악랄하면 악랄할수록 상대의 힘을 반으로 토막 낼 수도 있었다.

국왕은 그 점을 알기에 절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으나, 한편으로는 무척 만족스럽기도 했다.

물론 불안요소가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는 어디까지나 공증인일 뿐이기에 그들을 막을 권리도 없다.

만에 하나 수틀리는 일이 생긴다면, 동급의 다른 공작을 찾아갈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하지만, 결국 믿을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상대가 충신으로도 알려진 크라우저의 수장이자, 또한 소드마스터였기 때문이다.

마스터는 마스터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척 위협적이나, 확실한 편이 된다면 그보다 더 든든할 수가 없었기에… 되도록 맞춰주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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