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왕궁의 연회 #5
* * *
미쳤다. 이 여자는 확실하게 미쳤다.
아그네스는 공포에 질려 벌벌 떨면서도 그리 생각했다.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공작에게 영지전을 신청하다는 발상 자체가 미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결론이다.
물론, 그녀도 귀족의 명예가 상처 입은 이상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치러야 한다는 것은 안다. 그것은 아그네스에게 있어서도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헬레나의 발언은 확실한 선을 넘고 있었다.
“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인데… 좋아. 시끄럽겠지만 내 할 말은 다 했으니, 이젠 네 말을 들어보마. ”
내 용건은 끝이다. 그러니 저 여자의 말도 들어보자.
헬레나는 조금 열이 식은 머리로 판단을 내린 뒤, 아그네스의 입을 가린 손을 치웠다.
그러자 헬레나가 예상했던 대로 아그네스가 목소리를 높여왔다. 귀를 찌르는 듯한 소음이었다.
“ 너, 너는 미쳤어! 미친 거야!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영지전까지 갈 생각을 해?! ”
“ 안 그러면 어쩔 것이냐? 설마 마스터인 나와 일기토라도 하자는 것은 아니겠지?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텐데. ”
“ 그, 그건…! ”
기사가 모욕을 당했을 경우, 혹은 억울한 누명을 썼을 경우 결투를 통해 호소하는 방안도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기는 쪽이 무조건 옳다는 식은 아니었다.
당사자보다 급이 높은 사람이 참석하는 자리에서 각자의 조건을 합의한 뒤 치르는 것이다.
급이 높은 사람이 참여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조건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보증인이 어느 한 편에 매수되는 경우도 걱정할 법 했으나, 들키는 순간 이유를 불문하고 사형이다.
이 나라의 국왕조차 그 예외가 되지 못할 만큼 엄격한 규칙이다.
고로, 공증을 하는 자가 그만한 위험을 무릅쓰고 비리를 저지르는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하지만, 상대가 소드마스터라면 그 결투를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
대륙에서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수가 적은 부류를 정면 대결로 상대하는 것은 알아서 패배하겠다는 말과 진배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리전을 치르자는 제안은 헬레나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스스로 저지른 일에 나서지 않는 것도 모양새가 나쁘며,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을 반기지 않을 테니까.
헬레나 자신은 그런 이유를 알았기에 영지전이라는 몹시 날카로운 카드를 들고 나왔다.
영지의 군사나 기사들의 목숨을 거는 한이 있더라도 주제넘은 짓을 저지른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뺨을 때린 것도 그러했으나, 무엇보다 지온에게 손을 대려 한 점이 헬레나의 역린을 크게 건드렸기 때문이다.
여전히 마음이 병든 헬레나에게 있어 지온 알트람이란 그런 존재였다.
“ 그래. 너도 그 정도 머리는 있겠지. 그러니 영지전이다. 지온을 모욕한 것은 나를 모욕한 것 이상으로 죄가 무겁고, 그렇기에 공작가라 하더라도 내 분노를 피해갈 수는 없을 거다. ”
“ 으, 으으으…! ”
아그네스는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도 온 힘을 다해 꾹 다물려 애썼다.
저 광인은 전쟁으로 이 일을 매듭지을 생각이었으며, 그 조건으로 아그네스 자신과 알버스 킬리네어의 목을 취하려 할 것이다.
물론 그녀 또한 그 이상의 조건을 내걸어야 할 것이나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허나, 영지전을 치르는 것도 부담스럽다.
선봉에 헬레나가 서면 결투를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이 만들어 질 테니까.
그러나, 킬리네어 쪽에서 끝까지 거부하는 것도 문제다.
그랬다가는 더욱 짙은 광기에 물든 헬레나가 직접 군을 이끌고 무단으로 쳐들어올 수도 있었다. 암습당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것은 심력과 영지의 힘 모두를 깎아먹는 위협요소다.
그렇기에 아그네스는 생각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잖아도 겁에 질려 이성이 반쯤 마비된 상태에서, 이런 중대한 일을 제멋대로 처리할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 그래. 네년으로는 결론을 낼 수 없는 일일 테지. 그러니 네 애비에게 전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좀 더 그럴듯한 협상안이 나올 지도 모르지. ”
헬레나는 아그네스의 심리를 훤히 꿰뚫어 본 듯 피식 웃으며 침대 위를 내려왔다.
꼭두각시마냥 자신이 말한 이야기를 전달만 해 준다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
“ 전쟁 선포를 하고 왔다고요…? ”
“ 응. 당연하잖아. 몰랐다고는 해도 나와 나란히 할 남자를 모욕한 거야. 그건 즉 나를 모욕한 것과 다를 바 없어. 아무리 공작이라도 다른 공작을 모욕했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지. 안 그래? ”
아침 식사 이후, 나는 헬레나의 방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아그네스를 통해 킬리네어에 영지전을 선포했다는 소식이었다.
귀족이 명예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알지만, 상당히 극단적인 수단이 아닐 수 없었다.
“ 하아……. ”
결투로 해결하지 않으려 한 이유는 알 만 했다.
헬레나의 생각으로는 저쪽에서 결투를 받을 이유가 없다 생각한 것이다.
설령 겁쟁이 소리를 듣는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오히려 헬레나가 마스터라는 것을 이용해 상대를 압박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가히 불합리한 폭력과도 같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경우, 헬레나의 폭주는 점점 거세져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일으킬 가능성도 높았다.
그 경우 블루네일 왕국의 내전을 빼면 지극히 평화로운 세태에 새로운 불씨를 낳을 가능성이 몹시 컸다.
예를 들면, 평화롭게 잘 살고 있던 제국 측에서 갑자기 다른 마음을 먹는다거나.
“ 나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았어. 헬레나가 무탈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니까 ”
“ 내가 넘어갈 수 없어. 하물며 걸레 같은 년이 네게 손을 대는 건 절대로. ”
헬레나는 도저히 물러설 기색이 아니었다.
독살 이후에도 그러했지만, 내게 피해가 오면 필요 이상으로 과민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이번 경우도 그 원흉을 처리할 때 까지 물러나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녀가 직접 목을 베었던 케인 크라우저처럼.
“ 저를 걱정해 준 건 기쁘지만… 대처법이 심하긴 했어요. 그건 인정하시죠? ”
“ 아니. 안 심해. ”
“ 헬레나. ”
“ 안 심하다고! 오히려 모자라! 당장 사지의 힘줄을 끊어버리고, 칼침을 꽂아 바닥에 구르게 해도 모자랄 지경이란 말이야! ”
적당히 구슬려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말을 들을 기색도 아니었다.
평소 내 말이라면 끔뻑 죽는 헬레나라도 이번만큼은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듯싶었다.
거기다, 생각해 보니 헬레나를 설득한다고 한들 별 의미도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아그네스는 당할 대로 당했고, 겁에 질렸던 이성은 완전히 돌아와 분노에 차 있을 것이 분명했다.
헬레나가 마스터라는 것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화가 났으리라.
그리고, 아그네스를 그렇게 기른 킬리네어 공작도 그 여자와 비슷할 정도로 오만한 성향인 것으로 안다.
분명 아그네스에게 소식을 들은 뒤, 모종의 수단을 취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 해도 헬레나의 무력을 염려해 나서지 않을 정도의 이성은 있을 테니, 일 자체가 무마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아 보였다.
목숨보다 자존심을 우선하는 성향이라면 이야기는 또 다르겠지만…….
어쨌든 내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일이 커져버린 것은 맞다.
고로 헬레나가 상대의 협상에 응할 수 있을 정도로 화를 식혀주는 정도가 최선이리라.
◎◎◎
그리고, 연회 당일이 되었다.
그동안 내가 한 일이라고는 헬레나를 어르고 달래는 일 뿐이었다.
원래부터 내가 할 일이었으니 크게 불만은 없었으나, 끝이 없는 보수작업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참 묘했다.
안정되었다 싶으면 기분이 땅에 처박힐 만한 일이 생긴다.
그야말로 인생주기가 롤러코스터의 곡선 같았다.
“ 모두들 잘 와주었소! 짐의 탄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멀리서부터 달려 온 귀하들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하며……. ”
현 소테르 왕국의 국왕, 엘빈 소테르의 우렁찬 인사말과 함께 연회가 시작되었다.
오늘과 내일에 걸쳐 진행되는 연회는 쉼 없이 진행되며, 낮밤을 가리지 않는다.
물론 밤 동안 지친 귀족이 쉬는 시간이 낮이므로, 사실상 암묵적인 휴식시간이 바로 낮이다.
“ 오오! 참으로 아름다운 분이 아닐 수 없군. ”
“ 저 영애가 바로 왕국의 제일검으로 이름 높은 헬레나 영애인가? 정말 흠잡을 데가 없긴 해. ”
“ 허허. 듣기로는 영애가 아니라 이미 정식으로 공작이 되었다고 하더군. 소문 못 들었나? ”
많은 귀족들이 헬레나를 힐끗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이스의 서신 내용과 소문을 통해 헬레나가 공작이 되었음이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그러니 헬레나를 단순한 영애가 아닌 공작으로 인식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새로이 공작이 된 그녀와 연을 맺고자 접근하는 이들도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 반갑습니다. 저는……. ”
여러 귀족들이 무수한 악수를 청하며 웃음을 던지는 가운데, 헬레나 또한 그들과 마주하며 능숙하게 대처했다.
잔뜩 화가 났던 어제였다면 대외적인 가면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나, 제법 거친 물리 치료를 시행한 결과였다.
덕분에 헬레나는 여유를 갖고 완벽한 예법을 구사해 상대를 대했다. 이것으로 책잡힐 일은 없을 정도였다.
아마 킬리네어 입장에서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내숭 떠는 것이 아닌가 싶겠지만, 헬레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었다.결코 상대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었다.
헬레나가 가면을 쓰는 이유는 오로지 자신의 소심함을 감추기 위해서일 뿐이었기에.
맛있네.
나는 헬레나와 거리를 둔 채 뒤를 조용히 따르며, 때때로 테이블에 차려진 화려한 만찬을 조금씩 집어 먹었다.
먹어야 힘이 나는데다 저녁을 요령 있게 때우는 것도 시종의 필수덕목이니까.
그렇게 내가 요리를 맛보며 쥐 죽은 듯이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한 남자가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헬레나에게 악수를 청하는 사람들도 물러나 적당히 한산해졌을 무렵이었다.
“ 흐음. 처음 뵙는 건가? 만나서 반갑군. 알버스 킬리네어일세. 공작이 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하던가? ”
단정하게 뒤로 넘긴 머리칼. 자신감을 넘어 오만하게 느껴지는 눈빛에, 척 보기에도 화려한 복장.
누가 보아도 고위 귀족임을 알 수 있을만한 모습을 한 채, 킬리네어 공작은 헬레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 그래. 만나서 반갑소. 헬레나 크라우저요. ”
말투는 둘째 치더라도 상대를 명백히 아래로 보는 듯한 목소리에 헬레나 또한 존중을 버리고 반 존대로 대했다.
자기보다 작위가 낮은 사람을 상대로도 공손히 대하던 것과 명백히 다른 반응이었다.
알버스도 그것을 알았는지 미간을 찌푸렸으나, 입술은 여전히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헬레나가 이렇게 나오리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닐 텐데, 참 뭐라 표현하기 힘든 모습이다.
“ 그래. 공작이 된 걸 축하하네. 크라우저가 나이를 가리지 않고 후계를 정하는 것은 알았다만, 이번에도 참 의외가 아닐 수 없군. ”
“ 그것이 우리 가풍인 것을 어찌하겠소? 내가 그대를 이해하지 못하듯, 그대도 나를 이해하기 어렵겠지. ”
두 사람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서로를 도발하며 떠보았다.
좀 더 완곡한 표현을 써서 신경을 긁을 법 했으나, 이미 서로가 커다란 원수지간이 되었음을 아는 사이다.
그로 인해 새삼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으리라 판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 그래. 내 딸아이가 아주 큰 신세를 졌다는데… 이것 참 곤란하군. 너무 젊은 나이에 작위를 물려받는 것도 참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어. 용기와 치기를 구분조차 못하고 있지 않은가? ”
거기다, 좀 더 직설적인 투의 모욕이 훅 들어왔다. 그에 헬레나는 빛이 지워진 눈과 함께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채 답했다.
“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자식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못한 모양이더군. 대낮부터 시종에게 추파를 던지는 것도 그렇고, 제 말을 듣지 않는다고 곧장 손찌검을 하지 않았는가? 그것도 협박과 함께 말일세.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만큼 문란하기 짝이 없더군. 아, 혹시 공작께서도 왕년에 계집애 치마폭 좀 후리고 다녀서, 그 버릇이 자식에게도 옳아버린 건가? ”
“ …건방진 년. 공작이 되었다고 아주 기고만장하구나. 이스 놈은 눈이 썩어버린 건가? 그렇지 않다면 이런 앞뒤 분간 못하는 계집에게 작위를 물려줄 리가 없을 텐데. ”
“ 킬리네어 공작, 당신보다는 아니겠지. 빨아도 빨아도 고약한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 걸레 냄새를 집안에 방치하다보니 판단력마저 상실한 것이 아닐까 싶은데… 아닌가? 걸레 냄새가 너무 심하면 머리가 어지러울 만도 하지. 내 이해하네. ”
공작으로서의 지낸 시간, 그로 인해 쌓인 연륜과 분위기는 명백히 헬레나보다 위다.
아무리 헬레나가 공작이라 하더라도 그것에서 크게 밀리는 이상 다소 기가 죽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헬레나에게는 저 남자가 죽었다 깨어나도 갖추지 못하는 힘이 있었다.
바로 소드마스터로서의 능력과 기세였다.
거기다 화가 가라앉았을지언정 완전히 해소된 것이 아닌지라, 분노가 그녀의 등을 떠밀고 있기도 했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킬리네어 쪽에서 먼저 독사와 같은 혓바닥을 집어넣었다.
그럼에도, 그의 미간 주름은 여전히 구겨진 채였다.
“ …천지분간도 못하는 년.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
그래도 미련을 못 버렸는지 마지막으로 미약한 도발을 던지는 듯 보였으나, 너무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 젊음의 특권이지. 아무튼, 공작의 집에 모셔둔 냄새나는 걸레가 귀에 여러 가지를 속삭였을 텐데… 슬슬 그 일에 대해 마무리를 지어야 하지 않겠나? ”
거 봐라. 또 딜교에서 손해만 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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