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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28화 (28/192)

〈 28화 〉 왕궁의 연회 #4

* * *

아그네스가 정확한 이유를 댄 것은 아니다.

그 점에서 볼 때 변명의 여지가 있을 지도 모르나, 그렇다 해서 내가 본 것이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나를 가지고 놀 생각임이 분명했다.

물론 증거가 없기에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나, 헬레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뿌드득 소리가 섬뜩하게 귀를 울렸다. 듣는 사람의 가슴이 얼어붙을 정도였다.

“ 후우──. 알았어. ”

헬레나가 무엇을 생각하고 알았다는 표현을 썼는지는 모른다.

다만 날카로운 눈매에 빛이 죽은 눈동자를 보며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절대 얌전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

저녁 식사 후 활동이 뜸해지기 시작하는 시간이 되었다.

여전히 잔업에 시달리는 이들도 몇몇 있었으나, 대부분은 하루의 마무리를 겸한 휴식을 취할 준비에 한창이었다.

인간은 일을 함에 있어 숨 돌릴 틈이 있어야 더욱 능률이 오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헬레나는 휴식 대신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택했다.

지온은 방으로 돌려보내고, 오로지 그녀 혼자서 왕궁을 거닐고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는 길은 외워두어, 도중에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 저기, 잠시만요. ”

“ 네. 부르셨습니까. ”

헬레나는 여전히 대낮처럼 밝은 복도에서 한 남자를 불러 세웠다.

남자 또한 헬레나가 귀족임을 알고 예의를 다하려 했으나 저도 모르게 몸이 굳어지고 말았다.

싸늘하기 그지없는 헬레나의 표정 때문이었다.

“ 헤, 헬레나 크라우저 님… 이시지요? ”

남자는 몹시 긴장하여 저도 모르게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이야기로 듣던 생김새와 꼭 맞아 떨어지는 여자를 앞에 두었음에도, 도저히 이야기와 맞아 떨어지지 않는 인상 때문이었다.

그가 들은 헬레나는 아랫사람에게도 상냥하다는 인상이라고 하는데, 그런 부드러움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기도 했다.

“ 그래요. 의심하는 건가요? ”

“ 죄송합니다…! 저는 결코 그런 의도로 입을 연 것이 아니라……. ”

남자는 죽을죄를 지은 것 마냥 고개를 떨어뜨린 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 바닥에 무릎을 꿇기까지 했다.

평소의 헬레나라면 남자를 달래 좋은 말로 이끌었을 것이나, 지금의 헬레나에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아그네스 킬리네어. 오로지 그 여자를 더 효과적으로 압박하기 위해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 탓에 인내심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던 탓이다.

그렇기에, 헬레나는 그를 위로하는 대신 용무를 마치면 꺼져도 좋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 상관없어요. 아무튼, 아그네스 킬리네어가 어디 있는지 안내 좀 해 줘요. ”

“ 예, 예에! 물론입니다! 따라오시지요! ”

살 구멍을 찾은 덕일까.

남자는 벌떡 일어나 희망에 불타는 눈빛을 보였다.

무례가 용서될 것이라는, 즉 살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걸이도 빨라졌다.

다행히 남자는 어느 귀족이 어느 방에 있는지 알았다.

하물며 킬리네어 공작 영애라면 그 위치를 모를 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 바로 구석방이었나……. ”

헬레나는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던 방을 보고 허탈한 숨을 토해냈다.

다른 층과 다르게 한산하고 방도 별로 없기에 특별한 곳이리라 짐작은 했으나, 이렇게 가까우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탓이다.

달리 말하면, 지금 헬레나의 사고력은 거의 마비된 수준이라는 뜻도 되었다.

“ 여, 여깁니다! ”

“ 수고했어요. 물러나 봐요. ”

헬레나가 축객령을 내리니, 두려움에 벌벌 떨던 남자는 몹시 기뻐하며 자취를 감추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여느 어새신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능숙한 도주였다.

그래. 여기라 이거지.

헬레나는 설렘에 부푼 가슴을 안고, 아주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렸다.

날카로움을 감추고, 평소와 같은 부드러움을 내세웠다.

혹여나 안에 있을 여자가 겁에 질려 농성에 들어갈 상황을 막기 위해서였다.

“ 누구냐? ”

“ 실례합니다. 킬리네어 공작 영애의 방이시지요?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 이리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

헬레나는 내가 크라우저 공작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급한 용무가 있는 하녀처럼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그네스의 호기심과 짜증을 자극해 제 발로 나오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 하아. 이 시간에 급한 일이라니……. 들어오너라. 아직 문은 닫아두지 않았다. ”

기쁜 오산이다.

문을 열어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좋은 상황이 아닐 수 없다며, 헬레나는 내심 히죽 웃었다.

하지만 그 즐거움도 잠시 뿐으로, 곧 서릿발 같은 분노에 사로잡힌 채 천천히 문을 열어젖혔다.

“ 응? 용모나 옷차림을 보아하니 평범한 하녀가 아닌 듯하구나. 무슨 일이 있기는 한가 보군. ”

헬레나나 아그네스나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고로 각자 누구인지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으나, 헬레나는 그녀가 아그네스라고 확신했다.

아그네스가 머무르고 있다 알려진 방에 아그네스가 있는 것 또한 당연했으니까.

“ 네. 아주 급한 일이 있어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세요. ”

“ 음. 허락하마. 그나저나, 분명 처음 보는 얼굴임에도 왜 낯설지가 않은 것인지……. ”

아그네스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헬레나의 손은 문의 걸쇠를 걸어 잠그고 있었다.

마침 천장에 달린 조명 아이템이 화려한 빛을 발하고 있어 시야가 깨끗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설령 어둡다 해도 여자의 기척과 숨소리로 위치를 정확히 잡아낼 자신은 있었으나, 잘 보이는 것만큼 좋은 일은 없었으니까.

“ 뭐, 좋다. 아무튼 용건을……. ”

용건? 좋다. 내 용건을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주마.

헬레나는 여느 때보다 날카롭게 눈을 치뜨며 단숨에 문과 침대 사이의 거리를 좁혔다.

문이 닫혀있음에도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착각이 느껴질 정도로 빨랐다.

고작 한 걸음 움직인 것처럼 보였음에도, 어느새헬레나의 몸은 아그네스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그에 아그네스가 놀라 침대 위로 자빠지는 것은 당연했으나, 진짜로 놀랄 만한 일은 지금부터였다.

“ 우, 우웁?! ”

“ 소란 피우지 말라고 입을 막았다. 너 같이 행동거지가 값싼 년은 꼭 난리를 피운다고 들었으니까. ”

헬레나는 아그네스의 입을 막은 채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아그네스를 완벽히 덮치는 자세였다.

방은 방음처리가 되어 있으나 밑에 깔아둔 여자가 날뛰면 정신이 흐트러질 것 같아 입을 막았다.

게다가 마스터의 힘으로 완벽히 억누르고 있어 보통 여자인 아그네스가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값싸다. 아그네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분노라는 감정을 드러냈다.

감히 이 왕궁에서 공작 영애인 자신을 핍박하는 오만한 종자를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헬레나의 손이 입을 가려 전체적인 표정을 읽을 수는 없어도, 눈빛이나 찌그러진 미간이 몹시 화나 있음을 증명했다.

“ 우선 내 소개부터 하마. 나는 헬레나 크라우저. 전대 공작인 이스 크라우저로부터 정식으로 작위를 물려받은 공작이다. ”

“ 으, 으으읍?! ”

아그네스의 분노는 헬레나의 이름을 듣자마자 경악으로 물들었다.

공작의 딸이라는 지체 높은 신분이기는 했으나, 그래봐야 딸이다.

진짜 공작인 헬레나에 비해 급수가 한참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거기다 분위기도, 위엄도, 외모도 전혀 다른 수준이다.

아그네스 또한 스스로의 외모에 큰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 그 자존심에 걸맞은 몸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헬레나에 비할 바는 아니었기에, 저도 모르게 위축됨을 느끼고 있었다.

헬레나는 그 점을 알고, 그 위치상의 우위를 최대한 살라기 위해 굳이 위엄 있는 말투를 사용했다.

조금이라도 더 아그네스를 찍어 누르기 위해서.

“ 내가 갑자기 찾아 온 이유가 궁금하겠지. 아닌가? ”

“ 우, 우우우……. ”

아그네스는 입이 막혀 답을 할 수 없었기에 고개를 까딱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헬레나의 입술에서 서릿발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저 여자를 협박하기 위해서.

“ 오늘 해가 뜬 시각. 장미 정원에서 한 어린 시종을 만나 여러 이야기를 한 것 같더군. 맞나? ”

시종? 설마 곱상하게 생긴 건방진 애송이를 말하는 것인가?

묘하게 건방진 것이 뒷배가 있어 보이는 기색이기는 했지만, 설마 크라우저 공작 휘하일 줄이야.

아그네스는 그제야 그 시종, 지온과 헬레나가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 그래. 잊을 수 없나 보군. 당연하겠지. 오늘 있었던 일을 잊었다고 한다면, 네년의 머리통이 텅텅 비었음을 증명하는 꼴 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뭐, 그건 그것대로 실로 경사스러운 일이겠다만. ”

헬레나는 일부러 아그네스의 신경을 살살 긁어가며 도발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덕분에 아그네스는 현 상황에서 침착함을 되찾고, 다시 한 번 분노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공작이라도 자신을 이렇게 깔아뭉개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헬레나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그 다짐도 깨지고 말았다.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압박감과 고통이 안면을 타고 뇌를 범하기 시작한 탓이다. 너무도 아프고 괴로웠다.

“ 잘 들어. 네가 건드린 시종, 지온 알트람은 내 약혼자다. 몰랐다고는 하나 내 남자를 건드린 죄는 네년의 목숨으로도 모자라. 하물며 그 이유가 네년이 발정 난 몸뚱이를 식히려 하는 것이라면 더욱 그렇지. ”

헬레나의 목소리에 점점 음산함이 더해진다.

한밤중의 공동묘지보다 더욱 오싹하고, 겨울바람보다 더욱 차갑고 싸늘했다.

거기에 아픔까지 더해져, 아그네스의 이성은 점점 두려움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설마 그 애송이가 약혼자였다니!

아그네스가 아무리 제멋대로 사는 족속이라고 해도, 같은 반열에 선 공작의 남자를 건드릴 만큼 미치지는 않았다.

전형적으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의 눈치를 보는 여자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런 판단은 할 수 있는 여자였다.

그저, 지온을 몰랐다는 점에서 운이 없었을 뿐이다.

허나, 헬레나에게 있어 지금 상황은 더 이상 몰랐다고 넘어갈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지온 알트람을 제멋대로 범하려 한 것은, 자신에게 손을 대는 것보다 더욱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일례로, 헬레나는 해적들의 자신의 몸을 가볍게 주무를 때조차 인내심 발휘했다.

적의 아가리로 스스로 기어들어가 일을 빠르게 끝내겠다는 지온의 뜻을 받아들인 것도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또, 무엇보다 선을 넘지 않았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 하지만… 너는 내 약혼자를 건드리려고 했다. 아니, 이미 건드렸지. 정당하지 못한 이유로 뺨을 때렸으니까. 그러니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 ”

헬레나는 오른손으로 아그네스의 입을 틀어막은 채, 천천히 그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그와 동시에 입을 틀어막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 결과 아그네스의 근육과 뼈가 서서히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마 여기서 더 힘을 준다면 얼굴 근육이 뒤틀려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헬레나는 그 선을 아주 정확히 지키며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 애초에 네가 아랫사람을 조금이라도 배려하고 살았다면 이런 일은 아예 없었을 거다. 우리는 연회장에서 처음 안면을 익혔을 거고, 불만이 있다 해도 조용히 묻어갔겠지. ”

다만.

헬레나는 잠시 말을 끊고 숨을 고른 뒤, 나긋나긋하면서도 단호한 투로 입을 열었다.

말을 꺼내며 격앙된 감정 탓에, 자칫 아그네스의 안면을 함몰시켜 버릴지 모른다 생각한 결과였다.

“ 네년이 먼저 시비를 건 이상 나는 너를 용서 못한다. 감히 너 따위가 손을 댈 정도로 격이 낮은 남자가 아니거늘……. 무지로서 용서할 만한 상황이 아니지. 그러니, 나는 네 목을 잘라야 성에 찰 것 같구나. ”

“ 우, 우우웁! 우웁! 우우우웁!! ”

목을 자른다. 그 말에 담긴 오싹함과 헬레나가 풍기는 살기에, 아그네스는 완전히 겁에 질려버렸다.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한껏 버둥거리기 시작한 것이 그 증거였다.

“ 하지만… 지금 여기서 너를 죽이지는 않으마. ”

헬레나는 나른한 숨을 토해내며 아그네스의 귓가에서 입술을 뗐다.

그리곤 처음과 같이 오만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며, 무저갱 같은 눈동자를 띤 채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수없이 피를 묻힌 살인자들이나 할 법한 오싹한 미소였다.

“ 딸을 오만하게 만든 것은 아비의 잘못. 허니 네 아비도 너와 같은 죗값을 치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 그러니 네 아비가 도착하면 은밀히 전하거라. ”

크라우저 공작이, 알버스 킬리네어 공작에게 영지전을 신청한다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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