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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27화 (27/192)

〈 27화 〉 왕궁의 연회 #3

* * *

화려한 자수가 들어간 남색 드레스에 장신구. 꼿꼿이 세운 턱 끝에서 느껴지는 오만함까지.

어느 귀족 영애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었으나, 그 오만함과 당당함이 다른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저 여자를 보며 어떤 대답을 할지 망설였다.

사실 이곳 시종이 아니라 자작의 아들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 한들 뭐 어쩌라고? 라는 식의 답이 돌아올 것 같기도 했다. 자작 따위를 신경 쓸 인간도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 귀족이 아닌 사람보다 조금 나은 취급을 받을 뿐이리라.

그런 상황에서 굳이 자작의 아들임을 밝혀서 득이 될 것이 없어 보였다.

손해만 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절을 해야 할 수준이겠지.

“ 주인님께 허락을 받아 잠시 휴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영애의 눈에 밟히셨다면 송구할 따름입니다. ”

거기다 시종이라는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나는 헬레나의 시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의 착각을 정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태까지 시종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사실상 시종의 역할을 계속해야 할 테니까.

“ 주인님이라……. 네놈의 주인이라면 마땅히 이 나라의 주인이신 전하를 말씀하시는 것일 텐데, 전하께 직접 허락이라도 받았다는 것이냐? ”

“ 당연히 그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저는 저를 직접 부리시고, 명령하시는 분을 주인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전하는 하늘같은 분이시니, 굳이 미물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실 수는 없겠지요. ”

“ 흠. 명령을 내리는 자가 주인이라. 제법 일리가 있는 말을 하는구나. 하긴, 전하가 너 같은 시종 따위와 일일이 말을 섞지는 않으시겠지. 손을 뻗는다고 해서 하늘에 닿을 수도 없는 법일 테니까. ”

여자의 오만한 성향을 예상하여 적당히 허리를 낮춰 대응하니 쉬이 납득하는 기색을 보인다.

지금의 대화로 통해 단순히 태도 자체가 오만한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 자체가 더없이 귀족적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야말로 사람들이 멋대로 상상할 법한 귀족의 전형적인 예였다. 오만하고 부유한 그런 귀족 말이다.

“ 너, 제법 어려 보이는 주제에 자기 분수를 잘 알고 있구나. 하긴, 그래서 이 왕궁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군. ”

여자는 홀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당히 높은 위치의 귀족처럼 보이기에 별 말은 않겠다만, 어딘가 모자라 보였다.

그것이 아니라면 속내를 숨길 필요가 없을 환경에서 살아온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 감사합니다. 영애의 심기를 어지럽힌 점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그럼, 이만……. ”

“ 기다리거라. ”

이런 여자와는 굳이 길게 대화하고 싶지도 않다.

제법 예쁘장한 생김새이긴 하다만 헬레나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외모부터 성격까지 죄다.

그러나, 그 여자는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나를 불러 세웠다.

“ …무슨 일이십니까? ”

여자의 표정을 자세히 살피니 심기가 불편한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기분이 다소 좋아 보일 정도였다.

방금 전까지 뚱한 기색을 띠던 여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 음. 다른 게 아니라… 제법 곱상한 생김새가 마음에 드는구나. 참 마음에 들어. ”

“ 그것은 감사한 말씀입니다만……. ”

이 여자는 허락도 없이 손가락으로 내 턱을 쓸었다. 마치 창틀에 먼지가 있나 확인하는 것 같은 동작이었다.

그 탓에 저도 모르게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무슨 의도로 이런 짓을 하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물건처럼 품평하듯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빛부터 시작하여 턱과 몸 곳곳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는 움직임까지.

대부분이 문란한 생활을 보낸다는, 귀족 영애들의 소문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영애들은 정략적 수단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만 한다.

귀족 남자들은 깨끗한 여자를 좋아하기 떄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그렇다는 것이고… 사실은 많이 다르다.

단순한 하인, 시종부터 시작하여 마음에 드는 남자를 은밀하게 불러 정사를 치르는 귀족 영애들도 부지기수였던 탓이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다.

어느 영애가 누구와 붙어먹었다, 라는 소문이 잘 나는 편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소문을 냈다 모욕죄로 크게 처벌을 받거나, 심할 경우 처형을 받기 때문에 쉬쉬하는 경향이 강했다.

고로, 겉으로는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는 영애들도 많았다.

물밑에서 이루어지는 추잡한 욕망의 배출.

그것들이 암묵적으로 묵인되는 세계. 이것 또한 영애들의 세상의 한 단면이었다.

그저, 그 흐름에 휘말려 쓸려 나가는 사람들만 불쌍할 뿐이다.

나는 크라우저 공작령에서 지내느라 깜빡 잊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 저… 이것은 대체? ”

“ 모르느냐? 너를 품평하고 있었지 않느냐. 하지만… 제법, 아니 상당히 실하구나. 무척 마음에 들었다. ”

이 여자는 이제 대놓고 내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달뜬 숨을 토해냈다.

뺨은 붉어져 있고, 눈빛 또한 희미한 애욕의 불길에 불타고 있다.

더해, 얼굴에 깃든 기대감까지 고려해 보면 이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법 했다.

지금, 이 여자는 나를 불러 욕구를 채우기 위한 장난감으로 쓰려 하고 있었다.

“ 좋구나. 너, 지금 내 방으로 함께 따라오너라. 시킬 일이 있으니까. ”

“ 죄송하지만, 저는 휴식 후에 바로 일터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용무가 있으시다면 다른 사람을…….”

“ 풋! 고작 시종장 따위가 나 아그네스 킬리네어보다 위라고 말하는 것이냐? 어지간히 세상 물정을 모르는 아이로구나. ”

높은 집안이라고 생각은 했으나, 그 킬리네어 공작가의 여식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얼굴조차 본 적 없었던 여자였기 때문이다.

설마 크라우저, 칼리우드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삼대 공작가의 한 축이었을 줄이야.

다만, 그렇다고 해서 필요 이상으로 눈치를 볼 필요는 없을 듯싶었다. 아니, 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이 여자의 기분을 거스르는 것보다 헬레나가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또, 흘러가는 사정을 보아하니 대낮부터 질펀하게 즐기실 생각이겠지만… 거절하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에둘러 표현하는 방법도 있었다. 어떻게든 혀를 굴려 이 여자를 꾀어, 시간을 벌어 온건하게 해결하게 해결하는 방법도 있으리라.

하지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지도 의문이거니와, 그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자칫 공작가 사이에 마찰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렇다 해서 지나치게 숙이고 들어갈 경우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될 수도 있다.

물론 나 따위가 공작가의 자존심을 들고 나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억지를 부리는 상대는 예외적으로 대해주는 것이 옳다 생각했다.

기본적인 예의는 갖추겠으나, 어차피 이런 부류의 인간은 없던 말도 지어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아그네스 같은 여자와 마찰이 생긴 이상 다소 거친 수단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고 결론내렸다.

크게 폐를 끼치게 되겠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제 주인께서 기다리시니, 밑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달려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영예께는 송구하오나, 저는 제 일터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

보통 이럴 때는 쫄아서라도 가겠다고 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아그네스 또한 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등을 돌렸다. 당연히 따라올 것이라 판단해 앞장서고 있었다.

그러니, 등을 돌리며 드러낸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도 당연했다.

“ 너… 지금 내 권유를 거절한 것이냐? 고작 시종 따위가? ”

“ …실례했습니다. ”

이번에는 내 쪽에서 등을 돌려 이 장미 정원을 벗어나려 했다.

더 이상 말을 끌어봐야 소용없을 것 같았다.

다소 무례하나 이 상황을 넘기려면 단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애초에, 대낮부터 남자를 끌어들여 한 판 즐겨보려는 쪽이 이상하지.

“ 거기 서거라! 죽고 싶은 게냐?! ”

아그네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죽고 싶느냐는 말까지 나온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성이 난 듯싶다.

무시할까. 말까.

나는 선택의 기로에서 잠시 망설이다, 결국 고개를 돌리기로 결정했다.

아그네스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뒤이어 무슨 말을 할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뒤돌아 본 아그네스의 표정은 예상대로라면 예상대로라고 할 수 있었다.

굴욕과 수치심에 일그러진 얼굴과 달아오른 얼굴. 부들거리는 손까지.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여자의 모습이었다.

“ 죽이실 겁니까? ”

“ 못할 거라고 보느냐! 감히 내 권유를 거절한 것도 모자라, 이런 굴욕을 준 놈을! ”

“ 영애께서 굴욕이라 평하시는 것은 잘못입니다. 저는 제 일을 하러 갈 뿐이니까요.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며, 킬리네어 공작님 또한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은데… 아닙니까? ”

“ 그 천한 입으로 감히 아버지까지 들먹이려 하느냐! ”

아그네스는 씩씩대며 내 코앞까지 거리를 좁혀왔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대체 또 무슨 말을 할까.

“ 이 분수도 모르는 천한 것이! ”

짜악!

나는 저도 모르게 화끈거리는 뺨으로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할 법한 말을 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설마 손까지 뺨을 쳐버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나를 이렇게 무례하게 대하고도… 무사할 성 싶으냐? ”

이 여자는 뺨을 후려치자 다소 화가 가라앉은 듯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자신이 맞추는 것이 아닌 주위가 맞춰주는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한 여자다.

그래서 끓는점이 낮은 것도 이해는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화가 아예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 같아서는 품속의 더크를 꺼내 협박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큰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다.

고로, 최대한 싸늘한 눈빛을 띤 채 무덤덤하게 대꾸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 제 일에 최선을 다하려 하는 사람을 함부로 해치지는 않으시겠지요. 모두가 명예를 아시는 분들이니까요. 그럼 이만. ”

나는 모두라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한 뒤 장미 정원을 벗어났다.

내 말을 부정하면 임무에 최선을 다하는 인간을 헌신짝 취급하거나, 명예를 모르는 인간이라는 해석의 여지를 남기게 된다.

그렇기에 저 여자는 말을 잇지 못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 쯧. ”

나는 한숨을 쉬며 헬레나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선 저 자리를 무마했다 하더라도, 아그네스의 성향을 보면 꼬리를 잡고 물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런 부류는 피하는 것만이 최선인데…….

“ 폐를 끼칠 지도 모르겠어. ”

달아오른 뺨은 적당히 식은 것 같고, 티가 날 정도는 아니다.

헬레나의 방에 들기 전, 내 방 거울에서 얼굴 상태를 확인했으니 별 문제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오산이었다.

“ 지온. 그 뺨… 어디서 맞은 거야? ”

헬레나는 반갑게 나를 맞아들이기 무섭게 뺨에 대해 물어왔다.

분명 멀쩡해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왔는데 귀신처럼 알아챘다. 보통이라면 가슴이 철렁할 일이었다.

“ 어떻게 알았어? ”

나는 아주 약간 놀라 뛰는 심장 박동을 가라앉히며 물었다. 단숨에 변해버리는 표정도, 무저갱 같은 눈빛도 익숙하기 짝이 없었다.

익숙해지려 해도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 집착으로 인한 병일 터이나, 이상하게도 그러려니 싶은 마음이 앞섰다.

“ 보면 알아. 그래서, 누가 때린 거야? ”

“ 아그네스 킬리네어. ”

애처럼 고자질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이런 일로 헬레나의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해, 괜히 마찰을 피한답시고 얼버무리려다 아그네스를 감싸느냐는 오해를 살 가능성도 있었다.

오해를 푸는 것이야 어렵지는 않아도 번거로운 일이니만큼 그 시작을 제공하지 않는 편이 현명했다.

“ 아그네스…? 그 썩은내 나는 걸레가 내 지온에게 손을 댔다고? ”

헬레나의 입술에서 싸늘하기 그지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동시에 그녀가 손을 대고 있던 침대 모서리가 콰득 소리를 냈다. 어지간히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다행이라고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까.

당장이라도 사단을 낼 것 같은 분위기와 다르게, 상황 파악을 먼저 마치려는 냉정한 면모를 보였다.

“ 이유는 짐작이 가지만…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물어볼게. 그 년이 왜 손을 댄 거야?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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