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왕궁의 연회 #2
* * *
“ 허어……. ”
나는 황당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스 크라우저가 의외로 번거로운 절차를 싫어한다는 인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직위 계승식 자체를 시원하게 넘겨버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놀랍지? 나도 놀라웠어. 본래 아버지가 결단이 빠른 분이기는 했지만, 너무 갑작스러웠거든. ”
“ 결단이 빠른 수준이 아니라 날로 먹는 수준인데……. ”
헬레나는 오늘을 기점으로 명실상부한 크라우저 공작이 되었다.
물론 기쁘기는 했으나, 그보다는 묘하게 몰래카메라의 놀림감이 된 것 같은 기묘한 느낌이 압도적이었다. 그럴 듯한 예식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 어쨌든, 공작이 된 것을 새삼 취소할 수도 없을 테니… 다음 일이나 생각해 보자. ”
헬레나가 공작이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다음에 해야 할 일을 정리해야 했다. 소테르 국왕의 생일파티를 어떻게 넘기느냐는 문제였다.
“ 국왕의 생일? 적당히 선물이나 안겨주고 때우면 그만이지 않아? ”
누가 그 부모에 그 딸 아니랄까봐, 헬레나 또한 파티를 대충 때울 생각만을 하고 있었다.
크라우저의 인간은 공작이 되면 일을 간소화하고 싶은 병에 걸리는 것이 아닐까.
거기다 사석에서 전하라 높여 부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썩 높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 이스도 국왕을 상당히 존중하는 편이었는데, 그 영향을 덜 받은 눈치였다.
“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처음으로 궁궐에 가는 거잖아. 첫 등장부터 대충대충 했다간 인상이 안 좋아질 것 같은데? ”
“ 인상이라. 나는 지온만 잘 봐주면 그걸로 좋은데……. ”
헬레나는 내 허벅지에 머리를 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상반신만을 누인 자세라 그런지 제법 불편해 보였다.
그녀 자신은 어떨지 몰라도, 내 눈으로 볼 때는 그랬다.
허벅지를 간질이는 검은 머리칼의 감촉이 기분 좋았다.
몸 전체에서 은은히 피어오르는 향이 좋았다. 꽃을 한 아름 품고 잠든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었다.
“ …에휴.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지. 국왕이 좋아할 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
“ 글쎄. 매직 아이템이 무난하지 않을까. ”
“ 그렇긴 해. 보석이 박힌 장신구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고를 수 있는 가짓수가 너무 많아서 문제야. ”
국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일이니만큼 제법 고가의 물건을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무리하지 않을 만큼 각자의 재력에 맞게 준비하면 되었으나, 공작의 재력을 고려해 보면 그 가짓수가 너무 많아진다.그것이 고민이었던 것이다.
“ 헬레나 님. 계십니까? ”
한창 고민에 빠져있던 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의 바깥에 있던 앤디가 노크하는 소리였다.
아마 헬레나의 방에 찾아갔다가 없음을 확인하고 내 쪽으로 온 것 같았다.
“ 아, 네에! 들어오세요! ”
그에, 헬레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앤디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움직임이 너무 빨랐던 탓에 순간 묘기라도 부리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 역시 이곳에 계셨군요. ”
“ 잠시 상의할 일이 있어 왔어요. 그런데, 무슨 일로 오신 거에요…? ”
크라우저의 집사 앤디는 공작에게 일거리를 물고 가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가 공작과 붙어 업무를 보조하기는 하나, 집사 앤디가 담당하는 부분도 적잖게 많았다.
그리고 그 앤디가 찾아왔다는 것은 이스의 뜻이 분명했다.
헬레나는 그 뜻이 궁금하여 질문을 던졌으나, 앤디는 답 대신 손에 쥐고 있던 물건 하나를 보란 듯이 내밀었다.
화려한 보석이 박혀 있는, 실용성보다는 장식에 어울리는 한 자루의 검이었다.
“ 이스 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깜빡 하고 말하는 것을 잊었으나, 이 검을 전하께 전해 드리라는 전언도 함께요. ”
“ 미리 준비하셨던 거에요? ”
“ 그렇지요. 그리고 헬레나 님 자신이 준비한 것으로 하라는 말씀도 있으셨습니다. 헬레나 님이라면 이런 검을 선물로 준비할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군요. ”
이스는 헬레나의 마음을 전부 읽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것을 여지없이 증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앤디가 이렇게 딱 맞춰 국왕의 선물을 전해주러 오지는 않았으리라.
“ 고마워요. 제 마음을 제대로 읽으셨네요. 아버지께 감사하다는 말씀 전해주세요. ”
“ 물론입니다. 그럼, 저는 이만……. ”
앤디는 검을 전한 뒤 자리를 떴다. 아마도 다음 일을 처리하러 간 것이 분명했다.
저택과 정원 상태를 관리하는 입장이니만큼, 하인들이 일을 제대로 하나 확인하러 간 것이겠지.
아무튼, 이스가 선물을 준비한 이상 큰 걱정거리를 던 셈이다.이제 파티에 참석해 조용히 묻어가는 일만이 남았다.
하지만 정말 조용히 지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사실상 조용히 묻어간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헬레나는 기사단의 훈련이나 같은 파벌의 귀족을 제하곤 얼굴을 드러낸 적도 없으며, 사교 모임에 참석한 적 또한 없다.
그런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화재거리가 된다.
거기다 헬레나의 외모마저 소문이 날 대로 난 상태였으니,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 이걸로 제때 출발하기만 하면 되니까, 지금부터는 자유시간이지? ”
다만, 그 장본인은 그런 생각을 아예 못하겠다는 듯 환히 웃을 뿐이었다.
◎◎◎
수도 소테르는 견고한 외벽에 둘러싸인 곳으로, 국왕이 머무르는 내성 또한 그 튼튼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우스갯소리로 농성 환경만 갖춰지면 죽을 때 까지 공성전이 가능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나는 척 보기에도 견고함이 느껴지는 회색 성벽을 보며 그 우스갯소리가 마냥 헛소리만은 아니라 생각했다.
기사단이 상주하고, 소수의 마법사들이 늘 상주하는 곳이기에 그 단단함이 더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다소 과장을 더하면 지독하게 단단할 정도였다.
나는 왕궁의 안일을 돌보는 실질적인 우두머리, 시종장에게 이스가 마련한 보검을 넘겼다.
아직 파티까지 이틀 정도가 남았으나 이처럼 미리 선물을 전달해도 상관없었다.
연회장에서 직접 선물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왕이 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며 선물을 받을 법도 했으나, 그랬다가는 길고 지루한 시간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더해 그 사이에서 날을 세우며 기싸움을 할 귀족들을 생각해 보면 피곤하기 짝이 없기도 했다.
고로, 선물은 한꺼번에 받아 보관한 뒤 나중에 확인하다는 규칙이 세워졌다.
그 편이 파티를 즐기기에도 좋았고, 국왕도 편히 선물을 확인할 수 있어 일석이조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알트람에서 마련한 보석 목걸이는 내가 전해 두었다.
이스 크라우저를 우선하는 체스는 꾀병을 핑계로 불참했기 때문이다.
“ 방이 참… 넓네. ”
우리는 왕궁에 존재하는 수많은 방 중 하나에 발을 들였다.
호텔 복도처럼 손님방이 주르르 늘어선 곳보다 한층 위의, 누가 보아도 특별 대접을 받도록 조치한 방이었다.
방의 수가 한 손에 꼽을 만큼 적은 구역이기도 했다.
“ 그러게. 정말 사치스럽기는 하다……. ”
넓은 방에 화려한 장식들, 욕실까지 딸린 방은 가히 최고 수준이었다.
화려한 아름다움만으로도 하루 자는데 몇 백 정도는 우습게 깨질 만한, 사실상 예술품과 다름없는 곳이었다.
“ 이런 곳에서 잠이 제대로 올까? ”
“ 잘 모르겠지만… 요란해서 잠들기 힘들어 보이는 건 분명해 보여. ”
헬레나는 나와 비슷한 느낌을 입에 담으며 고개를 저었다.
손님방은 전부 방음마법이 가동되고 있어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기에, 그녀는 어깨에 힘을 뺀 채 편히 말하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 새삼 미리 도착하길 잘 한 것 같아. 당일에 맞춰 왔다면 쓸데없이 시선이 쏠렸을 지도 몰라. ”
헬레나는 짐 정리에 몰두하는 내 등을 향해 말을 걸었다.마침 때 하나 묻지 않아 반짝이는 검정 제복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헬레나가 중앙기사단의 일원은 아니었으나, 그들을 가르친 덕에 명예 기사로 등록되어 받은 옷이었다.
그녀는 드레스 대신 이 옷을 입기로 했으나, 나는 혹여나 싶은 마음에 드레스 또한 준비해 두었다.
저번처럼 쓸 일이 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준비해서 나쁠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 참. 연회장에는 무기를 지참할 수 없다고 했던가? ”
“ 응. 살벌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기 위함이 이유라고는 하는데, 사실 헛짓거리를 막는 것이 주 목적일거야. ”
나로서는 후자를 명분으로 내세워도 지당하다 생각하나, 국왕이 그렇다고 하니 그렇게 납득하고 넘어가는 것이 편했다.
내가 국왕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올 수도 없을 노릇이니까.
“ 아.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왕궁 구경이라도 할래? 지금이라면 눈에 띄는 것도 최소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우리처럼 미리 도착한 귀족도 없진 않았으나, 그 수가 무척 미미한 수준이다.
고로 지금이 아니면 편히 왕성 구경을 할 시간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모처럼 관광명소에 들른 듯한 기분으로 권했지만, 헬레나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을 표했다.
“ 나는 그만둘래. 왕성 구조를 꼭 알고 싶지는 않아서. ”
“ 그래? 그러면 나도 그만두지 뭐. ”
헬레나가 나서고 싶지 않은데, 홀로 나서서 돌아다니는 것도 뭣하다.
그래서 주저 없이 미련을 끊고 침대 근처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전보다 집착이 줄었다고는 하나, 불안을 감수할 정도의 일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헬레나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 내 손을 잡았다.
다소 우울한 표정을 보니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 지온이 보고 싶으면 보고와도 돼. 나야 방 안에서 가만히 쉬고 있으면 그만인걸. ”
“ 그래도… 헬레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며? ”
“ 나야 그렇지만… 왕성 구조를 미리 알아두는 게 나쁜 일은 아니잖아? 거기다 연에 한 번 정도밖에 들르지 않는 곳이니, 차분히 보고 싶다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해. ”
그 헬레나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정도라니, 참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내심 감동하여 저도 모르게 헬레나의 손을 꽉 잡았다.
정녕 오줌마저 통제하려던 여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사려 깊은 태도에 가슴이 웅장해질 정도였다.
그래. 이렇게까지 말해주는 이상 가만히 자리를 지키는 것도 도리가 아니겠지.
나는 헬레나와 눈을 맞추며 빨리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곧장 자리를 떴다.
시종으로서 홀로 놀러가는 것은 도리가 아닌 것처럼 보였으나, 왕성 구조를 파악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을 합리화했다.
만에 하나 일이 생길 경우, 지리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서 커다란 차이가 나기 때문이었다.
“ 오. 알트람의 아들이군. 하긴 헬레나 님이 오시니만큼 너도 오는 게 당연하겠지. ”
왕성 구조를 최대한 머리에 집어넣으며 걷던 중 무척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을 만 하면 크라우저 영지로 와 훈련을 받고 가는 중앙기사단의 부단장 랜들이었다.
“ 아, 랜들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동안 강녕하셨는지요? ”
“ 나야 뭐 늘 건강하지. 검이 좀처럼 늘지 않는 것은 영 아니꼽다만……. ”
나는 왕족 및 귀족들의 안전을 위해 순찰중인 남자와 만나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사단 훈련까지는 몇 달 정도 남은 상태에서 만나게 되었으나 반가움이 덜한 것은 아니었다.
내 독을 조금이라도 빨리 치료할 수 있도록 애써준 인물이기도 했으니까.
“ 그러게 말입니다. 세상에는 어려운 것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
“ 하하! 자네는 여전히 조숙하군. 이제 열다섯이면서 늙은 노인같이 말하는 점은 조금도 변하질 않았어.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지. 검술이나 정치, 사교, 생업활동 등등… 하나같이 쉬운 게 없어. ”
그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벽이 높아진다며 한탄을 늘어놓았다.
정작 그 자신도 한창 젊은 주제에 맥 빠지는 소리를 잘도 늘어놓는다는 것이 어이없었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볼 때 마다 나이 타령은 굳이 늙은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 …음. 즐거웠네. 헬레나 님은 내 나중에 시간을 내어 따로 찾아뵙도록 하지. 그럼, 먼저 실례하마. ”
“ 네. 살펴 가시죠. ”
나는 랜들을 배웅한 직후 걸음걸이를 조금 빨리하며 복도를 걸었다.
랜들과 이야기를 하며 시간이 지체되었으니 그만큼 서두르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구조를 대충 살피지는 않았다. 애초에 왕궁 파악이 목적이니까.
“ 여긴… 장미 정원인가. ”
뒤뜰에 장미정원이라. 시기상으로 장미가 피어도 이상하지 않을 때이기는 하다.
그럼에도 이렇게 흐드러지게 핀 모습을 보니 새삼 놀라웠다.
크라우저 저택 부지에도 제법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눈을 사로잡는 화려함과, 코가 막힐 정도로 농밀하고 달콤한 꽃향기.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화려한 정원이었다.
“ 음? 정원사도 아닌 시종이 이런 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
그렇게 정원 구경에 한창이던 중, 나는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채 팔짱을 낀 여자와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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