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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25화 (25/192)

〈 25화 〉 왕궁의 연회 #1

* * *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랬다.

공작령을 떠나 같은 파벌 귀족들의 영지를 도는 여정은 그만큼 힘이 들었다.

최대한 구석구석까지 돌아보고 싶다는 헬레나의 의향에 따르느라 이동 시간은 배가 되었고, 때로는 산에서 때 아닌 나물을 캐는 일도 했었다.

판타지 세계라 그런지 여러 가지가 뒤죽박죽으로 섞인 것 같았다.

그래도 즐거웠다.

힘들었지만 즐거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여행길이라는 게 본래 이런 것일까 싶기도 했다.

“ 헬레나 님. 오랜 시간, 정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

마차를 대는 저택의 주차장에 도착하기 무섭게 한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크라우저의 집사 앤디였다.

“ 후후. 고마워요. 오히려 앤디가 고생이죠. 저는 고생이랄 건 없었고, 바깥을 이렇게 오래 돌아다니는 건 처음이라 재미있었어요. ”

“ 그러시다니 천만 다행입니다. ”

“ 너무 호들갑 떠시는 거 아니에요? 아 참. 그보다, 별 일 없었죠? ”

“ 예에. 특별히 일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헬레나님이야말로……. ”

이제는 내 집같이 느껴지는 크라우저 저택에 도착하자 절로 마음이 놓였다.

그것은 헬레나도 마찬가지인지 약간 어깨에 힘을 뺀 채 앤디와 근황을 주고받았다.

나는 헬레나의 등 뒤에 선 채 가볍게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다.

한창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니만큼 끼어들기가 미안했던 탓이다. 앤디도 그것을 아는지 눈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귀족의 눈에는 다소 눈엣가시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와 앤디의 입장에서는 이러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무엇보다, 그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이 헬레나이기도 했으니 한 눈을 팔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했다.

“ 이것 참… 정말 죄송합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큰 무례를 끼쳤습니다. 아직 여독도 풀지 않으신 헬레나 님을 데리고……. ”

“ 그러지 말아요. 저도 오랜만에 편하게 이야기 한 것 같아 즐거웠으니까요. ”

헬레나는 죄스러운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앤디를 위로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억지로 맞춰주는 것도 아니었기에 몹시 좋은 분위기였으나, 마치 대역죄를 저지르고 후회하는 인간처럼 고개 숙인 탓이다.

“ 참. 도착하시면 곧장 집무실로 오시라는 공작님의 명이 있으셨습니다. 아무래도 무척 중요한 이야기를 하실 모양이신지라……. ”

“ 중요한? 알았어요. 지금 갈게요. ”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인 뒤, 공작이 기다리는 집무실로 걸었다.

분주한 발걸음을 보며 이래저래 서두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뒤를 따르는 나도 덩달아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까지 가야만 했다.

“ 저는 짐 정리를 하러 가겠습니다. 혼자서… 괜찮으시겠죠? ”

“ 응. 괜찮아. ”

집무실 앞에 다다른 순간, 나는 헬레나와 잠시 떨어질 것을 고했다.

서로 섞인 이후 집착의 강도가 무척 줄어든 덕에, 지금처럼 따로 떨어져 있을 일이 생겨도 괜찮았다.

전과 같이 무저갱 같은 눈동자도 띠지 않았다. 아마 반드시 헬레나에게 돌아오겠다는 말 또한 상당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리라.

어찌 되었던 내 입장에선 천만 다행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하며, 느긋하게 헬레나의 방을 향해 걸었다.

공작이 무슨 말을 꺼낼지 신경 쓰였으나, 나중에 헬레나를 통해 들으면 될 일이었다.

“ 깨끗하네. ”

나는 청결하기 그지없는 방을 보며 감탄을 터뜨린 뒤, 손에 쥔 가방을 내려놓았다.

안에 있던 옷가지를 꺼내 가지런히 옷장에 넣기 위함이었다.

드레스를 따로 준비하기는 했었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쓸 일이 없었다.

사교 모임을 개최하는 귀족도 없었고, 드레스가 필요할 만큼 커다란 행사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 입장에서는 번거로운 일을 피할 수 있었기에, 참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 끝났다……. ”

나는 헬레나의 방을 마지막으로 점검한 뒤, 곧장 내 방으로 건너가 짐을 풀었다.

헬레나보다 짐이 적었기에 정리하는 것은 금방이었으며, 덕분에 잠깐의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침대에 누워 늘어지고 싶었으나,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쉰다고 해도 침대 맡의 등받이와 비슷한 것에 기대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 최대한 오래 끌어줘라. ”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조금이라도 길게 이어지길 바라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너무 빠진 것이 아닌가 싶지만 거의 한 달 넘게 밖을 돌아다녔다. 피곤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달콤한 꿀 같은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복도를 울리는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고, 걷는 소리가 멎음과 동시에 내 방문을 벌컥 열어젖힌 존재 때문이었다.

“ 지온! 여기 있었구나?! ”

나를 기습하러 온 존재, 헬레나는 방문을 걸어잠그기 무섭게 침대에 앉아있던 내 곁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곧잘 내 옆에 자리 잡는 것이 영락없는 강아지 같아 귀엽게 보였다.

다만, 얼굴에 제법 심각한 빛이 녹아들어 있었기에… 나는 느슨하게 풀어두었던 정신을 조이며 물었다.

“ 무슨 일이야? ”

“ 아버지께서… 공작 작위를 넘겨주셨어. 오늘부터 공작이래. ”

“ …어, 진짜로?”

예상 외로 충격적이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직접 들으니 충격이 아예 없을 수는 없었다.

자기 영지나 파벌의 영지를 돌아보게 하는 것은 크라우저의 교육 방침이었고, 이 순회를 마치고 온 사람에게 공작위를 넘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돌아오자마자 곧장 작위를 넘겨버릴 줄이야. 결단이 빨라도 너무 빨랐다.

“ 그럼 공작… 아니, 이스 님은? ”

“ 그게……. ”

◎◎◎

“ …막 도착한 직후에 불러서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런 일은 빠를수록 좋지. 앉거라. ”

“ 네, 아버지. ”

공작의 집무실. 헬레나는 이스의 권유에 응해 맞은편 의자에 자리했다.

책상 위에 놓인 물건도 그렇고, 이스의 표정도 그렇고… 제법 무거운 일을 입에 담으려는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에, 헬레나는 내심 마른 침을 삼키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지온이 곁에 없을 때에도 극단적인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었지만, 불안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묵직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아, 헬레나의 긴장감은 서서히 고조되고 있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감돌기를 잠시. 이스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듯 덤덤히 운을 떼었다.

“ 헬레나. 우리 시조님이신 블루문 님은 알고 있겠지? ”

“ 예. 알고 있습니다. 열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크게 활약하시어 건국에 큰 공훈을 세우시고, 그로 인해 크라우저 공작가의 초석을 세우신 분이시지요. ”

블루문 크라우저.

크라우저 공작가의 시초라 불리는 그는 열 살부터 전쟁터에서 활약하며, 훗날 소테르 왕국을 건국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개국공신이 된 남자였다.

그렇기에 크라우저의 인간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 그래. 블루문 님께서 공작가를 일으키신 이래, 그분은 가문에 총명함을 보존하고자 작위 계승에 한 가지 원칙을 세우셨다. 그것이 바로 능력주의지. ”

배우자는 집안보다 능력이나 사람됨을 보고 뽑으며, 공작가를 이을 후계자는 오로지 능력으로만 선발한다.

여자, 서자, 많은 형제들 중 막내라는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원칙을 고수하고 있었기에 지금껏 흔들림 없이 버텨왔다.

보통이라면 귀족 집안끼리 결합하기 위한 도구로서 활용되는 영애들이 공작위에 오른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헬레나 또한 그 중 한 사람이었다.

“ 네. 잘 알고 있습니다. ”

“ 그렇겠지. 그러면 공작위의 계승에 나이를 따지지 않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느냐? ”

“ 그것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

애초에 블루문 공작이 활약한 시기가 열 살 무렵부터다.

고로나이가 어리다 하여 공작위를 이어받을 자격이 없다는 소리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적어도 크라우저 공작가 내에서는 그랬다.

헬레나도 그 점을 알기에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으나, 이스가 내미는 물건을 보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위조를 막기 위해 특수하게 만들어진 공작가의 도장을 슥 내밀며, 이제부터 네 것이라는 이스의 말 때문이었다.

“ 아버지. 설마……. ”

“ 너도 여행을 떠날 때 짐작하지 않았느냐? 네가 정식으로 공작이 될 지도 모른다고. ”

물론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공작위를 이어받을 사람은 예외 없이 공작령을 돌거나, 같은 파벌에 속한 사람들의 영지들 순회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시야를 넓히기 위해서.

하지만, 이렇게 빠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헬레나의 눈빛이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 그래도…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아직 아버님도 정정하신데……. ”

“ 물론 일에서 완전히 손 뗄 생각은 없다. 네가 나를 보좌하며 업무를 익힌 덕에 온전히 맡겨도 될 듯싶지만, 막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딸에게 그러는 것은 너무 가혹하겠지. 그러니 네가 공작위를 물려받아도, 당분간 일의 체계가 바뀌지는 않을 거다. ”

“ 그 말씀은 감사하지만… 역시 서두르시는 것 같은데, 따로 이유가 있으신가요? ”

크라우저 공작가가 작위를 물려받는 시기가 제각각이라는 것은 잘 알았다.

그러니 내일 아침 갑작스레 작위를 물려받는다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길 법했으나, 굳은 이스의 얼굴에서 미약하나마 조급함이 배어나고 있었다.

헬레나는 그것을 보았기에 질문을 던졌고, 이스 또한 숨길 생각은 없었는지 질문에 쉬이 답해 주었다.

“ 곧 국왕 전하의 생신 연회가 열릴 것이다. 그러면 각지에 흩어져 있던 귀족이 일제히 모이게 되지. ”

“ 아… 벌써 그런 시기가 다가왔나요? ”

이번 국왕 알버트 소테르의 생일은 7월, 미적지근한 더위가 계속될 시기다.

두꺼운 옷보다 얇은 옷을 입고, 밤공기가 적당히 시원해 사교 파티를 열기에 최적의 날씨이기도 했다.

덕분에 국왕의 생일 축하 파티는 며칠에 걸치며, 사실상 생일을 명분으로 사교 파티를 여는 것과 진배없었다.

“ 그래. 그래서 나는 너를 그 연회에 공작으로서 참여하게 할 생각이다. 사실상 첫 피로연이라고 볼 수 있겠지. ”

헬레나는 다른 귀족 영애와 다르게 사교 모임에 참여한 적이 거의 없다,

아니, 아예 없다고 해도 좋았다. 공작의 후계자로서, 그리고 검을 갈고 닦는다는 것을 핑계 삼아 가기 싫은 모임에 전부 불참한 결과였다.

국가를 대표하는 검의 천재라는 명함이 해낸 일이었다.

그러나, 공작이 되면 그렇게 핑계를 댈 수만도 없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귀족으로서의 책임이나 의무 때문이다.

지금처럼 대부분의 모임에 불참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 꼭 발을 들일 필요성이 짙은 행사에서 도망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를 들어, 이번 국왕의 생일 기념 연회와 같은 것들 말이다.

“ 즉, 더 이상 그런 부류의 모임에서 도망칠 수도 없다는 거네요. ”

“ 잘 아는구나. 개인적으로는 좀 더 이대로 있어도 괜찮을까 싶지만, 너무 늦은 나이에 사교계에 발을 들이는 것도 어색하지 않겠느냐? 보통 열여섯부터 모임의 꽃이 되는 영애들을 생각해 보면 상당히 늦되기는 하다만……. ”

스물 셋도 충분히 늦지만, 이 이상 늦어졌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이스는 그것을 걱정했기에 헬레나가 도망칠 길을 막고자 했다.

아비로서 다소 잔혹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고민하기도 했지만,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라면 지금부터라도 적응하게 하는 것이 헬레나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헬레나도 그 마음을 알았는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의 말도 충분히 이해했으나, 향후에 벌어질 일을 고려해보면 빨리 공작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 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오늘부터 공작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될까요? ”

“ 그래. 고맙구나. ”

본래 작위 계승식은 제법 화려하게 치러지기 마련이나, 이들은 그런 과정이 번거롭다는 듯 도장을 넘기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공작위를 계승하는 것 치고는 무척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 국왕 전하의 생신은 닷새 후니까… 이틀 전에 도착하면 될까요? ”

“ 음. 당일에 딱 맞춰 가는 것은 여유가 너무 없으니, 그 정도면 될 것 같구나. 왕궁에 방이 있을 테니 그곳에서 잠시 머무르면 될 거다. 그리고……. ”

지온 알트람에 관해서는 어떻게 할 거냐.

이스는 목구멍 끝까지 튀어나오려는 그 질문을 겨우겨우 억누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낮은 신음을 흘렸다.

잘못 건드렸다가 괜한 것을 알게 될 까봐 꺼려진 탓이다.

“ 아니, 아니다. 내 용건은 이상이니, 그만 물러나 쉬거라. 고생 많았다. ”

그러니, 말을 끊고 축객령을 내리는 것이 이스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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