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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23화 (23/192)

〈 23화 〉 순회하는 척하는 무언가 #10

* * *

“ 허, 허어어……. ”

바르칸 백작령에서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던 해적의 대장, 칸은 입을 다물 줄 몰랐다. 눈앞에 벌어진 잔혹한 참상 때문이었다.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머리통에 금화가 박혀 있었고, 그와 동시에 튀어나온 한 여자, 헬레나에 의해 목이 베이고 말았다.

목이 떨어질 정도는 아니었으나 숨통을 끊고도 남을 깊이로 베였기에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부하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덤벼들었다.

그래도 덤벼든 놈은 양반이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배를 향해 달려가는 놈들이 절반이었다.

그리고, 그놈들을 포함한 나머지 무리들도 하나같이 머리통에 금화가 박힌 채 죽어나갔다. 비명과 피가 사방으로 튀는 지옥을 만들면서.

이건 악몽이다. 악몽이 분명하다.

인신매매를 일삼으며 때로 살인조차 서슴지 않던 칸이었으나, 비릿한 혈향이 피어오르는 시체밭을 보자 구역질을 금할 수 없었다.

“ 꼴을 보니 저항할 생각은 없어 보이네. 잘 됐어. ”

칸이 고개 숙인 채 위장의 내용물을 게워내는 동안, 해적 중 한명의 단도를 빼앗아 쥔 헬레나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토록 많은 인간들을 베어냈음에도 부츠에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칸을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두려움에 벌벌 떨며 고개를 드는 순간… 나락이 무엇인지를 절로 깨닫게 되었다.

◎◎◎

진즉 잠들었어야 할 늦은 밤.

백작은 눈앞에 놓인 서류와 책상 앞에 무릎 꿇은 두 남자를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류는 인신매매를 일삼은 놈들이 세관 등에 뇌물을 착복했다는 증명이었으며, 이 남자들은 그 주범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뜬금없이 이런 골칫덩어리를 안겨줬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 이게 전부…? ”

늦은 밤까지 돌아오지 않기에 은밀한 시간을 보내나 싶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해적을 잡느라 이런 시간이 되었다.

최대한 간섭을 피해준 것은 고마운 일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악수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백작이 우리를 적극적으로 찾아내려 했다면 일이 더 수월하게 풀렸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다만, 이 생각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쳐먹기로 마음먹었다.

빠른 해결을 위해 스스로 구덩이에 빠지기로 정한 것은 다름아닌 나였으니까, 누구를 탓할 문제가 아니었다.

“ 그래요. 덕분에 몹시 곤란한 일을 겪었어요. 더해, 본래 백작께서 하셔야 했던 일을 제가 하고 말았네요. ”

헬레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풀죽은 표정을 지었다.

아주 의도적으로, 백작을 압박하기 위한 그녀 나름대로의 연출이었다.

“ 그 점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

“ 지온과 낚시를 하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하필 그 배가 낚싯배를 위장한 해적선이더군요. 큰 배도 아니거니와 보통 낚싯배와 같은 규모이기에 티가 나지 않은 듯 했지만, 그 점을 잘 노렸다고 볼 수 있겠네요. ”

“ 그럴 수가……. ”

부주의하게 잠들어버린 것을 가지고 상대를 몰아붙일 수 있을 지도 모르나, 근본을 따져보면 영지 치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백작의 잘못이 가장 컸다.

만약 그가 제대로 단속을 했다면 애초에 이런 일이 없었을 테니까.

백작도 그 점을 잘 아는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그저 책임을 피해보려는 변명같이 들릴 뿐일 테니까.

“ 아무튼, 당장 내일이라도 이 서류와 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비리를 저지른 사람들을 적절히 처벌하세요. 그리고 이들이 팔아넘긴 사람들의 소재도 파악해서 구해내시고요. 아시겠습니까? ”

“ 그야 물론이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

“ 아 참. 그리고 또 한 가지, 백작이 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

헬레나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나는 말없이 백작에게 다가가 텅 빈 책상 위에 가죽으로 된 보따리 하나를 올려놓았다.

섬에서 발견한 해적의 활동자금이었다.

“ 이건…? ”

“ 열어보시죠. ”

나는 몇 걸음 뒤로 물러나 보자기에 손대는 백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는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라도 가죽 보따리의 매듭에 손을 대어 힘껏 풀어헤쳤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안에 든 금화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보의 물이 터져 나오듯 매서운 기세였다.

“ 이, 이건 또 뭔가! ”

“ 해적들이 사람들을 팔아넘기거나, 혹은 다른 부정한 일을 통해 얻은 자금입니다. 사람들을 팔아 얻은 자금이니만큼, 그들을 구해낸 뒤 보상금으로써 건네주시길 바랍니다. ”

헬레나는 놀라 까무러치는 백작을 향해 덤덤히 입을 열었다.

덧붙여, 이 돈을 활동 자금으로 이용하려는 생각은 접으라고 못을 박아두기까지 했다.

팔려나간 사람을 찾는 것은 오로지 백작령의 힘으로 해낼 것이며, 이 돈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위로금으로 지급하라고.

“ 훗날… 만에 하나 이 자금이 피해자들에게 온전히 돌아가지 않았을 경우, 오늘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까지 더한 무거운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아시겠지요? ”

오늘 있었던 일은 조용히 묻어가겠다.

해적을 발견한 것도 온전히 백작 자신의 공으로 돌려도 좋다.

하지만 자신이 부탁한 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그 뒷일은 감당하기 어려우리라고, 헬레나는 서늘하게 식은 눈빛을 띠며 경고했다.

“ …알겠습니다. 헬레나 님의 말씀, 명심해 두겠습니다. ”

그에, 백작은 떨떠름한 투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잘못의 소지가 그에게 있다 해도, 협박을 당하는 것과 진배없는 상황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인간으로서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헬레나는 아직 말에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오늘 있었던 일을 문서로 명문화하고, 백작 자신의 서명과 가문을 상징하는 도장을 찍어 그것을 확실히 하라고 했다.

“ 이런 것은 형태로 남아 있어야 확실하죠. 믿음 이전의 문제라는 것은 백작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

“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불안을 원천적으로 막자는 것이겠지요. ”

같은 파벌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타인. 더구나 귀족이다.

그러니 이런 명문화된 문서를 통해 쐐기를 박고자 하는 선택이 옳다고 생각했다.

백작도 그에 동의하는 지, 별 이견을 표하지 않고 순순히 문서를 작성해 서명을 하고 도장을 찍었다.

헬레나는 스탠드처럼 생긴 매직 아이템의 주홍빛 등불에 문서를 비추고, 적힌 글자들을 꼼꼼히 훑었다.

자신이 요구한 사항이 잘 기록되어 있는지, 또 그를 어길시 백작이 져야 할 책임이 제대로 기록되어 있는지를 살피는 눈치였다.

“ 네. 전부 꼼꼼히 기록되어 있네요. 이것으로 제 용건은 끝났습니다. ”

“ 예……. 오늘은 정말 커다란 폐를 끼쳤습니다. 다시 한 번 송구하다는 말씀 드리며, 이 일을 조용히 넘겨주시는 헬레나 님의 관대함에 감사드립니다. ”

백작은 문서를 곱게 말아 손에 쥔 헬레나를 보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만약 그녀가 소드마스터가 아니라 보통 영애였다면 커다란 사단으로 발전할 수 있는 사건이었다.

공작영애가 납치된다는 사건 말이다.

이번 일을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헬레나가 마스터라는 점, 단지 그것 하나 때문이었다.

나 또한 어느 정도 힘이 있는 편이라 생각은 하지만, 이 일을 쉬이 해결할 수 있으리라 자신할 수는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좋은 결과를 이끌어낸 것은 순전히 헬레나의 힘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 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부디 팔려간 사람들을 전부 찾아 돌봐주었으면 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죠. 내일 아침 식사를 거르기 전에 떠날 생각이니… 사실상 마지막 인사가 되겠네요. ”

“ 아니… 식사도, 환송도 없이 떠나실 생각입니까? ”

헬레나의 폭탄선언에 백작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헬레나가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보다 더 놀라는 눈치였다.

환송도 없이 쥐죽은 듯 떠난다는 말에 어지간히 놀란 듯싶었다. 해석에 따라서는 하루 빨리 이곳에서 발을 떼고 싶다는 소리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리라.

“ 네. 하지만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올 때에 화려한 환대를 받고 크게 신세를 졌으니, 하다못해 갈 때만큼은 부담을 드리지 않고 조용히 떠나겠다고 결정했어요. ”

“ 그러… 십니까. ”

헬레나는 차 버린 로이드와 같은 공간에서 머무르는 것이 꺼림칙하기에 떠나려 했다.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백작은 그것을 모르기에 혹여 다른 실례를 끼친 것이 아닐까 심히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고민하다고 한들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헬레나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도저히 알 수 없겠지.

물론 평소의 침착한 백작이라면 그 의도에도 생각이 미칠 법 했으나, 지금 그는 폭탄을 넘겨받은 직후다.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고로, 겨우 알겠다는 말 하나를 남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 지온… 미안해. 이런 일을 겪은 직후인데, 또 일을 시키게 해서. ”

“ 미안해 할 거 없어. 헬레나의 결정은 나도 옳다고 생각하거든. 백작령 자체는 활기차서 보기 좋았지만, 일이 일이다보니 마무리가 썩 좋지는 못했네. ”

나는 헬레나의 방에 발을 들인 직후, 곧장 옷장에서 옷을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빠르면 당장 동이 희미하게 틀 무렵에 떠날 수도 있으므로, 지금 정리를 마치는 것이 당연했다.

그에 헬레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참 고마웠다.

그녀는 자신도 정리를 돕겠다고 나섰지만, 그렇게 될 경우 내 일거리가 더 늘어날 것이 분명했으니까.

즉, 헬레나는 정리를 돕지 않고 가만히 지켜봐주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되었다.

“ 그보다, 늦은 시간이지만 땀이라도 씻을래? 찝찝하잖아. 물은 내가 퍼오면 되니까. ”

“ …아니, 괜찮아. 정리까지 시키는데 그런 일까지 시키고 싶지 않아. ”

공작가의 욕실에는 물을 만드는 매직 아이템이 있지만, 이 백작가에는 없다.그래서 저장고에서 물을 길어 와 욕조에 부어야 했다.

헬레나는 그 수고로움을 알기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으나, 사실 나를 위한 측면이 더욱 컸다.

막 흘린 땀 냄새는 그럭저럭 가능의 영역에 속했지만, 그것이 묵어버리면 개인적으로 “불가능” 판정에 속한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 내가 찝찝해서 그래. 새로운 영지로 가는데 땀투성이로 가는 것도 그렇고, 씻고 나서 상쾌한 마음으로 가는 게 좋잖아. ”

“ 그건… 그럴 지도 모르겠지만. ”

“ 거기다 물을 사용하고 나면 나도 씻을 생각이거든. 피 냄새도 짙고. ”

나는 헬레나만을 위해 목욕을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티를 냈다.

실제로 몸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것 같아 영 꺼림칙하기 그지없던 차였다.

하다못해 목욕이라도 마쳐야 개운해 질 것 같다는 것은 명백했다.

“ 아… 그러고 보니, 지온은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거지……. ”

헬레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내게 사람을 죽이게 한 것을 무척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보통 사람을 죽이면 구역질을 하고 며칠 동안 악몽에 시달린다고 하니, 그녀가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해 보였다.

언젠가 필요할 데가 있어 기술을 갈고닦기는 했으나, 그런 상황을 피하는 것이 가장 좋았으니까.

다만, 나는 헬레나가 걱정하는 것만큼 불안정한 상태는 아니었다.

오히려 지극히 덤덤하다고 해도 좋았다.

살인에 익숙하거나, 또는 그것을 즐기거나 하는 이유라서가 아니라, 내 멘탈이 그만큼 단단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헬레나가 어두운 집착을 할 때가 훨씬 두려웠다.

“ 괜찮아. 신경 쓰지 마. 헬레나도 많이 위험했잖아. ”

사실 더크 하나만 들고 죄다 썰어버리는 모습을 보니 위험하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역시 마스터는 마스터구나, 라고 남몰래 입을 벌리며 감탄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헬레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는지 고개를 들어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막 헬레나가 갈아입을 옷과 속옷을 꺼내려던 차, 차마 시선을 피할 수 없었기에 미묘한 구도가 되었다.

내가 눈을 맞추고 있는 여자의 옷과 속옷을 손으로 받치고 있다는, 기묘하기 짝이 없는 구도 말이다.

“ 그러면, 지온도 나랑 같이… 씻어. 그러면 욕조에 들어갈게. ”

그리고, 그 어색한 침묵의 끝은 입이 쩍 벌어질 만큼 놀라운 소리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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