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순회하는 척하는 무언가 #9
* * *
“ 뭐든, 뭐든 대답하겠습니다! 그러니 목숨만은…! ”
“ 그래, 조용히 답만 준다면. ”
나는 겁에 벌벌 떠는 사내와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살려주기는 할 생각이었다.
“ 여기가 어디야? 한동안 배로 쭉 이동한 것 같던데. ”
“ 백… 으윽! 백작령과… 조금 떨어져 있는 섬입니다. 겉보기엔 무인도라서 잠시 쉼터처럼 여기는 곳이지만, 사실 저희가 정박지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
배의 움직임이 멎을 때 까지 다소 시간이 걸리나 싶었더니, 무인도로 이동한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이들이 자리를 잡은 시점에서 진짜 무인도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뒤쪽에서 서서히 다가오는 인기척 하나를 느끼며 다음 질문을 던졌다. 분명 헬레나일 테니 경계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 밖에는 몇 명이나 있어? ”
“ 스, 스무 명 정도입니다. 저희는 감시를 겸할 겸 배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
“ 소드 익스퍼트 수준이나, 혹은 고서클 마법사는? ”
“ 그,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있었다면 백작령까지 집어삼켜 큰 장사를 하고 있을 겁니다. ”
남자는 손사래를 치면서까지 당혹감을 드러냈다.
그에 나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일리가 있다는 뜻을 드러냈다.
남자가 말한 대로 그 정도의 실력자가 있다면 좀 더 대범하게 장사를 할 법 했다.
단,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하지는 않았겠지.
“ 그러면, 너희는 독립 조직이야? 아니면 동맹 조직이나, 아니면 누군가의 하위 조직이야? ”
다음 질문은 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사전에 합의한 대로 다섯을 한꺼번에 처리하고 온 헬레나였다.
슬쩍 고개를 돌려 상태를 확인해 보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착 가라앉은 눈빛도 여전했다.
“ 그… 런건 없습니다. ”
“ 이 백작령에서 너희와 비슷한 일을 하는 놈들은? ”
“ 없습니다. 저희가… 유일합니다. 적어도 저희가 아는 한은 그렇습니다. ”
다행히 일이 제법 쉽게 흘러가고 있었다.
물론 숨어서 활동하는 다른 조직이 아예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적어도 이런 부류의 놈들이 더 없다는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나머지 놈들은 어떻게 배치되어 있지? ”
“ 그냥 여기저기 흩어져 있지만, 그래도 일정 거리 안에 모여 있습니다. ”
“ 교대 시간은? 인질은 다른 곳으로 왜 안옮긴 거야? ”
“ 으윽! 우선 교대 시간은 따로 없습니다. 안에 있는 사람끼리 돌아가면서 하기로 해서……. 인질은 어차피 옮겨야 하니까 배에 놔두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로잡은 사람이 좀 많으면 따로 꺼내서 관리하기도 하지만……. ”
“ 두 사람이라 그럴 필요도 없었다는 거로군. 그래. 잘 알았어.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내 검은? ”
“ 두 분이 가지고 계시던 날붙이는… 대장이 가져갔습니다. ”
헬레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노예나 인질로 쓸 인간이 많을 경우 탈주를 막기 위해 무인도에 따로 옮겨 가두는 듯 했지만, 사람이 적다보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이유는 이해할 만 했다.
보통 사람이 건장한 남자여덟을 상대로, 하물며 각자 그룹을 이루고 있는 상대를 뚫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방을 나서는 헬레나의 등 뒤를 따르며,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 여기서 가만히 있어. 살고 싶으면. ”
“ 예, 예에…! 가만히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남자는 연신 살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외쳤다.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으니 감사함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리라 생각했다.
“ 그 남자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있을까? ”
“ 없겠지. 목숨이 달린 급박한 상황에서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만큼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고,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무기력하게 당하기 전에 수를 썼을 거야. 설령 연기라 해도 발목 두 짝을 버리는 건 너무 낭비가 크잖아. ”
나는 헬레나와 함께 계단을 오르며 확신을 갖고 답했다.
사람이란 급박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본심이 나오기 마련이고, 특히 목숨이 걸린 상황이라면 생각을 꾸밀 여유가 없어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내가 말했듯 실력을 숨기고 있거나 긴급한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는 남자라면 저런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것 같다.
발목 두 짝을 희생하면서까지 중요하게 여기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헬레나가 그 남자를 보고도 심드렁하게 반응했으니, 특별한 것이 없는 보통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게 되었다.
이런 일이 처음인지라 너무 의심이 많아진 것 같았다.
“ 어떻게 할까요? 전부 죽일까요? ”
“ 납치 및 매매를 일삼던 놈이니 전부 소탕해도 괜찮겠지만… 대장 정도는 살려두자. ”
내 입에서 태연자약하게 죽이자는 말이 나오자 다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 살인을 즐기는 미친놈이 아니었던 탓이나, 저지르기로 한 이상 망설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미 손에 피를 묻혀버리기도 했고.
“ 어둡네. ”
그러고 보니, 어느 새 해가 가라앉고 달이 떠오르는 시각이 되어 있었다.
밤이라는 것이 너무 당연한지라 깜빡 잊고 있었지만, 해가 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이 지났음을 의미했다.
“ 그러게요. 벌써 밤이 되었을 줄이야. ”
“ 지온. 둘만 있을 때는 편하게 말하라니까, 또……. ”
“ 아, 미안. 그랬지. 존댓말이 너무 입에 붙어서 그만. ”
우리는 목소리를 낮춰 한가로이 대화를 나누며 아래로 내려갈 곳을 찾았다.
정박한 배에 쉬이 오르내리기 위해 간이 다리를 놓았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배를 가볍게 돌아본 끝에 배와 땅을 잇는 두꺼운 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마 다리 대신이리라.
“ 건너편에 사람은 안 보여. 곧장 내려가도 되겠네. ”
헬레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태연자약하게 판을 거닐며 부두로 내려갔다.
밤이니만큼 낮에 비해 눈에 띄기 어렵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걸 고려해도 대범하기 그지없었다.
아마 이래저래 상대측의 기량을 재 본 뒤 위험하지는 않다고 확신을 품은 덕일지도 모른다.
“ 정면으로 쳐도 되겠지만… 역시 암습이 편하겠어. 배 안에 무기가 없었다는 게 아쉽네. ”
헬레나는 맨주먹으로 덤벼들던 남자들을 입에 담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무기를 갖고 있다면 일이 더욱 수월했겠으나, 그렇지 못한 현실을 다소 원망하는 눈치였다.
나는 부두로 내려와 숲으로 향하는 길을 거닐며 주위를 살폈다.
헬레나가 있어 든든하기 짝이 없지만, 그렇다 해서 넋을 놓고 다닐 만큼 정신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 그렇지. 무기가 있다면 좋았겠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더크만으로 해결해야지. ”
“ 응. 무기를 찾으면 주워 쓰고, 만약 상대가 쥐고 있다면 당장에 뺏어 쓰는 걸로 하자. ”
그 외에도 간단한 행동 방침을 정한 뒤, 나와 헬레나는 거리를 두고 상대를 조이듯 접근하기 시작했다.
나무가 많은 곳이라 숨기에도 적합했고, 간혹 발을 움직이며 풀이 스쳤지만 크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요란하지만 않으면 될 것 같았다.
─하하하! 그 귀족 상단의 간부를 잡았으니, 돈도 제법 두둑하게 챙길 수 있겠어! 아주 월척이야!
타닥, 하고 모닥불 타는 소리. 그리고 모닥불에 둘러앉은 사내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나무 뒤에 숨어 바라보고 있으려니 참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즐거워했고, 한껏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저 상태라면 풀밭을 뛰어도 눈치 채지 못할 것 같았다. 맞은편에 떨어져 있던 헬레나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이 칼 좀 봐라! 고급품이야 고급품! ”
“ 킬킬! 단도도 그렇고, 제대로 쓰지도 못하면서 더럽게 비싼 걸 들고 다니는 게 참…! ”
그 와중, 한 남자가 헬레나의 검을 높이 들어 올리며 기뻐했다.
겉보기에는 밋밋했으나 내구도가 강한 고급 재료로 만든 검이었는데, 그것을 알아볼 정도면 어느 정도 보는 눈이 있는 듯싶었다.
그저, 말하는 투와 태도가 너무 가벼워서 그런 인상을 흐려지게 만들었지만… 그건 그거고.
“ 집… 인가? ”
하여튼, 삼삼오오 모여 있는 꼴을 보니 당장 기습하기엔 어려워 보였다.
술에 취해 뻗을 때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편하겠지만, 그 과정이 너무 지루해 틈을 벌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무리와 다소 떨어져 있는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정문 방향은 모닥불의 불빛도 있어 다가가기 어렵겠지만, 뒤쪽은 숲의 그늘과 밤의 어둠에 가려져 있어 다가가기 쉬웠다.
오두막은 단순한 창고로 사용하는지 그 흔한 창하나 보이질 않았다.
나무로 만든 창문 정도는 달 법 했으나, 그런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유감스러웠다.
“ 쯧… 하는 수 없지. ”
그에, 나는 더크에 오러를 불어넣은 뒤 오두막의 문을 찔러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러 블레이드를 통해 벽을 잘라내고 그 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마치 톱질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벽을 자르는 데 신경을 기울였다. 그렇잖아도 날이 작은 더크라 그런지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리고 있었다.
찔렀다 뺐다. 찔렀다 뺐다.
그야말로 정신이 멍해질 만큼 지루한 반복이었으나, 다행히 졸려 쓰러지기 전에 결과를 맺을 수 있었다.
작은 아이가 서서 들어갈 법한 네모난 구멍을 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 하아……. ”
나는 한숨을 쉬며 네모나게 자른 벽의 아랫부분을 툭 쳤다.집 안쪽으로 쓰러져 쿵 소리를 내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벽은 내 다리에 묵직하게 툭 걸렸고, 나는 그것을 집어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은 뒤 바닥을 기어 들어갔다.
도중에 뭔가 가로막고 있어 밀면서 전진하려 했으나, 그것이 상자임을 깨닫고 생각을 바꿨다.
상자를 밀어냄과 동시에 내 몸으로 받쳐 소리 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참 힘들었다.
그렇게 힘들게 들어온 내부는 참 삭막했다.
어두워서 안이 잘 보이지 않을 법 했으나, 어둠에 눈이 익었기에 대략적인 사물은 파악할 수 있었다.
“ 무슨 상자가 이렇게 많아? ”
나는 벽을 감싸는 상자의 향연에 숨이 턱 막혀왔다.
들어올 때도 상자의 탑을 받치며 들어왔는데, 설마 오두막 대부분이 상자로 가득 차 있을 줄이야.
“ 어휴. ”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상자들을 꼼꼼히 살폈다.
필요할 때 꺼내 쓰기 위해 미리 만들어 둔 것인지, 안을 뒤져봐도 내용물이 텅텅 빈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덕분에 그저 평범한 상자 창고라고 생각하려 했다.
그러나, 가장 구석자리 아래에 있던 상자를 하나를 집어 드는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여느 상자들도 어느 정도 묵직함이 있었으나, 이 상자는 그것들보다 훨씬 무거웠기 때문이다.
“ 뭐지? ”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여느 상자와 다름없이 안이 텅 빈 상자다.
그럼에도 무게는 다른 것의 배 이상이었기에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분명 무거운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나는 이 상자를 다른 상자 위에 올린 뒤, 그것을 꼼꼼히 만지며 그 이유를 찾아내려 애썼다.
외부를 더듬어보기도 하고, 상자 안쪽 바닥을 꾹꾹 눌러보기도 했다.
“ 어…? ”
그러던 중, 나는 상자 아랫바닥의 한 부분에 손가락이 쑥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지간하면 손을 댈 일이 없을 겉의 아랫바닥이라 그런지 찾아내는 것이 다소 늦어졌다.
아무튼, 뭔가 찾은 김에 꾹 눌러보자는 생각으로 손가락을 최대한 집어넣자, 상자 안쪽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숙였던 허리를 펴고 안을 살폈다. 그러자, 전과 달리 상자의 바닥이 들린 것을 볼 수 있었다.
“ 세상에. ”
바닥 아래쪽에 가죽을 박고, 또 그 바닥 아랫면에 두꺼운 가죽을 깔아 안정감을 살린 구조다.
이러니 바닥을 꾹 눌러 보아도 별 느낌이 없었지.
나는 들린바닥 아래에 깔린 가죽을 슥 들어 바닥에 버려버렸고,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듯한 수많은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 이게 다 돈이야? ”
그것들은 흔히들 골드라 부르는 것과 보석류였다.
그리고 이 상자는 그것을 몰래 숨기기 위한 일종의 금고였던 것이다.
더구나 그 양이 몹시 많아 지금 당장 호의호식하고 살 정도였다.
아, 물론 그것은 한 사람의 기준이고… 여럿이 이 돈을 쓴다면 쉬이 동이 날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죄다 빼돌리고 싶었지만, 한가로이 돈이나 탐할 때가 아니다.
설령 한가롭다 하더라도 챙길 생각은 없었으나,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은 명백했다. 투척하기에 아주 그만이었다.
물론 이 나무 상자를 잘라 간이용 암기를 만드는 방안도 생각해 봤으나, 이렇게 금이 생긴 이상 굳이 그 고생을 할 필요가 없었다.
덕분에, 나는 몹시 기쁜 마음으로 금화를 긁어모아 바닥에 버린 가죽위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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