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순회하는 척하는 무언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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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복선이란 없다.나는 그 말을 누구보다 믿는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다 필연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돌팔이의 약물 오용으로 어이없게 죽었을 때부터 그랬던 것 같다.
그러니 우리가 탄 배가 우연히 질이 나쁜 인간들의 소굴이라는 것도, 사실 사람의 매매를 일삼는 곳이라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듣자하니 종종 인질거래도 하는 것 같았으나, 그런 대상은 소수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대상으로 협박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가진 힘이 제법 큰 것 같았다. 지금 갇혀있는 나무상자가 수북한 창고도 어쩐지 수상쩍었다.
“ 조용해 졌어. 눈떠도 돼. ”
“ 후우…! 남자 놈들이 몸을 더듬대는 건 도저히 적응 안 되네. 헬레나는? ”
“ 응. 당장 눈에 띄는 것이 검이었으니까 바로 압수하긴 했는데… 그 이상 건드리지는 않았어. ”
더욱 질이 낮은 놈들이었다면 당장에 헬레나를 덮쳤을 것도 같은데, 묘했다.
혹여 조직적으로 범죄를 일삼다보니 규율이 생겼고, 헬레나를 입맛대로 범하려는 것은 그 규율에 어긋나기에 손을 대지 않은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범하다 인질이 깨어나 난리가 나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혹여나 놈들이 마음을 잘못 먹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니… 차마 고개를 들 낯이 없었다.
내 생각대로 하려 한 탓에 굴욕을 맛보아야 했을 지도 모르니까.
다만, 정작 그런 상황이 닥치면, 헬레나가 밀항이고 뭐고 없이 다 죽여버렸겠지.
“ 정말… 미안해. ”
“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저들이 마음먹고 덮치려 했다면 내가 참지 못했을 테고, 이 정도는 그럭저럭 견뎌낼 만 했으니까. ”
오히려, 헬레나는 피식 웃으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우리의 몸을 묶어 두었던 밧줄은 진즉 힘으로 끊어둔 상태였다.
마나를 갈고 닦는 사람에게 있어 밧줄을 끊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 그래도 미안하다면… 지온이 그만큼 만져주면 되잖아. 그치? ”
나는 헬레나의 농담 아닌 농담에 차마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귀족 남녀끼리의 약속은 사실상 혼인 맹세에 가까웠고, 그렇게 약속한 이상 거리낄 것이 없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저 헬레나가 이렇게 스스럼없이 그런 농담을 던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 그러면… 막 쥐어짜내도 괜찮지? ”
생각지 못한 공격에 흔들린 것도 잠시. 나는 헬레나와 마찬가지로 제법 수위가 높은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 …응. ”
헬레나는 얼굴을 붉힌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인질로 잡혀 창고 같은 곳에 갇힌 주제에 너무 여유로운 것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저 얼굴을 오래도록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질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계속 한가하게 여유만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그것을 깨닫고, 급히 몸을 매만지며 빠진 것이 없나 살폈다.
우리를 옮기며 몸수색 정도는 당연히 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색 결과, 예상했던 대로 연미복 안쪽에 숨겨두었던 밋밋한 더크 몇 개가 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투척용으로 쓰려던 더크가 없어. 혹시나 기대하긴 했는데, 역시나. ”
“ 그래도 별 문제는 없지 않을까? 알트람에서 배우는 건 격투 중심이잖아. ”
“ 물론 그렇긴 하지만, 더크가 있으면 훨씬 편하잖아? 그래도……. ”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피식 웃은 뒤, 소리 나지 않도록 일어나 바지를 벗기 시작했다.
안으로 집어넣었던 셔츠 자락을 빼고, 허리띠마저 풀어헤쳐 벗을 준비를 마쳤다.
그에 헬레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릴 법 했으나,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당장 벗으라고 재촉하는 기색을 보였다.
내가 고백한 이전과 이후의 태도가 달라도 너무 달라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바지를 벗어 호쾌하게 내린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위쪽 종아리 뒤편에 묶어두었던 더크를 꺼내기 위해서였다.
굳이 바지를 벗어버린 이유는 바짓단을 위로 걷다 찢어버릴 것 같아서다.
옷 주머니는 위아래를 불문하고 수색한 듯하지만, 겉보기에 밋밋해 보이는 다리까지 주물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 이거 받아. ”
나는 낚싯줄로 묶어 숨겨두었던 더크를 뽑아 헬레나에게 건넸고, 나 또한 나머지 더크 하나를 뽑아 쥔 뒤 도로 바지를 입었다.
벗고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아 참. 아까 잡히기 전에 묶어뒀었지…….”
헬레나는 단도를 받고 나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뜸 바지를 내린 것이 무척 충격적이었는지 기억마저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황할 이유가 없으리라.
“ 아무튼 이정도면 됐어. 당장 위험해 보이는 사람이 없다는 건 확인 했으니까, 우선 이 배부터 먹고 보자. ”
더크를 든 헬레나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들거렸다.
그녀가 일반적으로 쓰는 검은 이것보다 훨씬 길었으나, 마스터에게 있어 길이의 차이는 썩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날이 달려 있다면, 그것이 설령 작달만한 것이라 해도 충분한 위협이 되었다.
“ 네. 제가 보조할 테니 시원하게 뚫어주세요. ”
“ 응. ”
보통 이런 상황에 처하면 남자 쪽에서 앞장서는 것이 보통이지만, 우리는 그 보통과 거리가 멀었다.
여자인 헬레나가 나보다 훨씬 강한데다 전투기술 지도까지 해 주는 형편이니까.
그러니, 헬레나는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해 나무로 된 문의 한 구석을 찔렀다.
얼핏 보기엔 문을 강제로 열어젖히려고 저러는가 싶기도 했지만, 그 행동에는 그 이상의 의도가 있었다.
더크에 오러 블레이드를 늘여, 건너편에 등지고 있을 남자 한 명의 목을 꿰뚫기 위함이었다.
“ 끄, 끄르르…! ”
헬레나의 감은 상대의 기척과 거리를 정확히 했고, 그 결과가 바로 끓는 피를 토해내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것은 문고리를 잘라내 밖으로 나온 후였지만, 절명한 얼굴만 보아도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 만 했다.
사람이 죽는 것을, 또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니 구역질이 나올 만도 했으나 심장이 조금 두근거릴 뿐이었다.
겁에 질리거나 두려움에 떠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죽이지 않고 억누르는 것보다 상대를 죽여 입을 확실히 막고, 조용히 움직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저들이 모른다고는 하나 귀족의 납치라는, 명백한 중범죄를 저지른 놈을 상대하는 것이니까.
나는 창고에서 나와 선실 구조를 확인해 보았다.
여느 배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일자형 복도에, 좌우로 방이 늘어선 구조였다.
그저 창고만이 앞을 가로막듯 만들어져 있을 뿐이었다.
“ 방은 여섯이고… 가장 구석, 그러니까 출구 쪽에 있는 왼쪽 방에 셋. 중간 오른쪽에 다섯 명 정도야. ”
헬레나는 발소리를 죽인 채 조심스레 방문을 훑었다.
덕분에 내부에 기척이 몇 개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나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재주였다. 몹시 놀라웠다.
“ 기왕이면 동시에 제압하는 게 좋겠지만… 지온에게 위험한 일은 시키고 싶지 않은데. 어쩌지……. ”
그녀는 이 와중에도 자신보다 나를 걱정하며 풀이 죽어 있었다.
실력자가 없는 이상 방 하나 제압하는 데엔 눈 깜짝할 사이면 되겠지만, 그로 인해 커다란 소란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두 방을 동시에 제압하자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하지만 내가 다칠 것을 염려해 행동을 망설이고 있었으니, 이쯤에서 등을 떠밀 필요성을 느꼈다.
“ 걱정 마. 헬레나가 생각한 대로 할게. 나도 놀고만 있진 않았고……. ”
나는 가장 앞줄의 왼쪽 방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바보같이 발소리를 내진 않았으나 무척 큰 보폭이었기에, 다소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을 의식하고 있을 겨를은 없었기에… 나는 문고리를 잡아 당장이라도 열어젖힐 듯 손에 힘을 주었다.
“ …그래. 어쩔 수 없지. ”
내가 이렇게까지 행동하고 나서야,헬레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사람을 죽일 때와 같이 더크에 오러를 씌운 것도 모자라 차갑게 식어버린 얼굴을 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한 발 먼저 방문을 열어젖혔다.
“ 엉…? 누구야? ”
방문을 열자 남자 셋이 바닥에 앉아 포커 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때 아닌 손님이 들어온 탓에 내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갑자기 문이 열렸으니 저러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나는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을 하며, 더크 끝부분에 오러를 씌워 가볍게 휙 던졌다.
가문의 마나 연공법으로 단련했다고는 하나 헬레나보다 마나의 양이 명백히 적었기에, 그를 아끼고자 했던 고육지책이었다.
다만, 내가 생각한 이 기술이 의외로 효율적이었다.
투척은 상대를 뚫어버리기 위한 기술인지라 오러를 날의 끝 쪽에만 모으는 것과 제법 궁합이 잘 맞았기 때문이다.
결과, 대각선을 그리며 허공을 날던 더크의 날이 가장 왼쪽에 있던 남자의 목젖을 깊게 파고들었다.
“ 끄, 끄르르…! ”
목이 꿰뚫린 인간은 비명을 내지를 수 없다. 아까 전에도 확인한 사실이다.
그러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숨통이 끊어지는 것은 당연했으나, 아직 나머지 둘은 건재했다.
“ 너 이 새끼…! ”
사람 하나가 죽어버린 위급상황이다.
고로 구릿빛 피부의 남자들이 적의를 드러내며 몸을 일으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 꿍꿍이가 있지 않을까 의심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일어나는 것보다 내가 그들을 향해 거리를 좁히는 것이 훨씬 빨랐다.
더크를 던지자마자 곧장 앞으로 내달린 덕에 단숨에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 조용히 해라. ”
나는 마나를 활성화시켜 육체를 강화한 뒤, 날 대신 손가락 끝에 마나를 맺히게 했다.
오른손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이었다.
이런 짓이 가능했던 이유는 육체를 검 대신 사용하는 격투술을 주로 익힌 덕이기도 했지만, 알트람의 기술 자체가 맨몸으로 때우는 것을 가장 중히 여긴 덕이기도 했다.
물론 진짜 고수들을 상대하기엔 어딘가 모자라는 측면이 없잖아 있었다.
허나, 보통 사람보다 다소 거칠 뿐인 남자들을 잡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 꺼, 꺼어어…! ”
뿌드득!
오른편 남자의 목젖을 손가락으로 집어 뜯어버리자, 피가 솟구침과 동시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이유는, 아까도 말했듯 고함으로 인해 소란이 커질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두 놈을 기습으로 보내고, 남은 놈은 하나였으나… 정보를 캐내기 위해 입을 틀어막은 뒤 있는 힘껏 남자의 발목을 걷어찼다. 흔히들 사커킥이라 부르는 동작이었다.
“ 우, 우우웁──!!! ”
우득! 우드득!
강렬한 고통이 남자의 정수리에 꽂힌 듯 했다.
입을 가린 손 너머로 보이는 한껏 일그러진 얼굴이 증거였다.
만약 저 얼굴이 연기라면, 이 남자는 범죄가 아니라 당장 극단으로 보내 연기를 시켜야 할 정도였다.
발목을 걷어차며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고, 그에 따라 남자는 몸을 지탱하지 못해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양 발목에 힘을 넣을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잘 들어. ”
최대한 눈의 빛을 죽이고, 눈매를 가늘고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목소리 또한 최대한 깔아 당장 죽일 듯한 살기를 실었다. 처음해보는 일이라 무척 어색했지만, 다행히 효과가 있는 것 같았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남자가 눈물이 글썽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 이제부터 이 손을 뗄 건데, 만에 하나 소리라도 지르는 날엔… 저기 둘과 같이 목을 뜯어버리겠다. 알아들었으면 고개를 끄덕여. ”
“ 우웁! 우우웁! ”
남자는 고통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에도 공포가 깃들어 있어, 독기를 품고 소리를 지를 것 같지는 않아보였다.
주위에 피범벅이 된 시체도 원 플러스 원으로 있으니 두려울 만도 했다.
“ 하아, 하아…! ”
남자는 내가 손을 떼자마자 살겠다는 듯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했다.
고통에는 어느 정도 적응한 듯, 말을 걸면 답을 줄 여유 정도는 있어 보였다.
나는 그것을 내심 잘 되었다 생각하며, 쪼그려 앉아 남자와 시선을 맞춘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럼… 우선 너희들의 조직 구조부터 설명해 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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