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20화 (20/192)

〈 20화 〉 순회하는 척하는 무언가 #7

* * *

“ 흐음……. ”

붉게 타오르는 해가 저물기 시작할 무렵. 알베르트는 해가 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헬레나에게 영지 안내를 했던 로이드의 보고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가만히 눈을 감아보면, 침울해하던 아들의 얼굴이 아주 또렷이 떠올랐다.

젊기에 가지는 무모한 혈기를 견디기 힘들어하는 듯 보였으나, 이성이 앞서는 태도를 보며 때 아닌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다.

새삼스럽지만, 백작 자신의 뒤를 이을 그릇임을 보았기에.

“ 이미 상대가 있었다… 라. ”

상대가 있다는 것은 놀라웠다.

혼인 신청이 오는 족족 거절하는 것만 보아도 남자와 연이 먼 여자라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거기다 그 상대가 그 알트람의 인간이기에 더 안타까웠다. 비집고 들어 갈 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세기의 걸친 충성을 보이는 일가다. 그렇기에 그 신뢰는 흔들림이 없었고, 다른 파벌과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귀족으로서의 힘이 미약해도 흠이 되질 않았다.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서로 간을 보기 바쁜 귀족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백작 또한 그렇게 간을 보는 한 사람이었으니, 더욱 절실히 피부로 와닿는 일이기도 했다.

“ 어쩔 수 없지. ”

알베르트는 자신의 요구를 떨떠름한 얼굴로 받아들인 아이, 지온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쩐지 쉬이 승낙하는 기색이 아니더니, 뒤에서 그런 관계를 쌓고 있었을 줄이야.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이상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고 알베르트는 판단했다.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이고, 그것을 잡으려다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스 크라우저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될 헬레나와의 관계를 원만히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만 했다.

◎◎◎

“ 도시 구경을 하면 떠나자고? ”

“ 응. 더 이상 길게 머무르는 건 찝찝해서 그래. 어제 로이드가 간을 본 것도 있었고. ”

간이라.

나는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헬레나에게 청혼하기 위해 간을 보았으나, 내가 먼저 선수를 친 덕에 수포로 돌아갔던 일을.

“ 하긴… 거의 고백과도 같은 말을 그렇게 잘라냈으니, 여기서 더 머무는 것도 어색할 테지. ”

“ 나도 그렇게 생각해서 이런 결론을 내린 거야. ”

그러니, 헬레나는 지금 당장 거리로 나가자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내가 던졌던 말을 전부 해보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았지만, 최소한 거리 구경은 해보고 싶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마침 나 또한 차분히 거리 구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차였고.

“ 오? 확실히 신선한 게 많네요. ”

“ 그렇지? 나도 이렇게 살아있는 건 이곳에서 처음 봤었어. ”

곧장 거리를 나와 시장가로 나와 보니, 아주 신선한 물고기들이 수조 안에서 헤엄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굵고 튼튼한 판을 짜 맞춰 만든 상자 같은 것에 물을 채운 것이었는데, 선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인 듯싶었다.

그에, 나는 이곳 사람들이 제법 머리가 돌아간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너무 얕본 탓도 있겠지만, 이 시대에 나무로 만든 수조를 활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놀라웠기 때문이다.

잘하면 마차를 활용해 활어조를 만들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도 했다.

다양한 매직 아이템이 팔리고 있는 세계이니만큼 경우에 따라 현대와 비슷한 장치를 마련할 수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 허? 냉동 창고가 있어요? ”

“ 응. 창고 곳곳에 냉기를 배출하는 매직 아이템을 배치해서 사용한데. 유지비는 도시와 바르칸에서 부담한다고 하는데, 놀랍지? ”

냉동 창고가 떡하니 있다는 말을 듣자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칫 냉동차마저 개발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개인이 냉동을 유지하는 매직 아이템을 사용하기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었다.

야외 훈련을 할 때도 매직 아이템을 사용해 따뜻함을 유지했으니, 그 반대가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 참. 지온은 낚시가 해 보고 싶다고 했지? 어제 여러모로 알아봤으니 가볼래? ”

도시 곳곳을 돌아다녔을 무렵, 헬레나는 항구 쪽으로 발을 옮기며 내게 물었다.

낚시를 하고 싶다는 말을 꺼내긴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따로 배를 움직이려면 그만한 돈이 필요했다.

보통 밤이나 새벽에 낚싯배를 움직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 지금 나가는 배는 없지 않겠습니까? 무역선 같은 것을 탈 수는 없잖아요. ”

“ 응? 오후에 낚시하는 배도 있는데? ”

“ 어…? ”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사실은 한낱 망상이었을 뿐이었음이 드러났다.

덕분에 부끄러워 죽을 상황에 처했으나, 강철멘탈 덕분에 미약한 수준의 수치심을 느끼는 것에서 그쳤다.

그래. 나는 병신이었다.

크흠!

아무튼, 돌아가는 사정이 그렇다면 거리낄 것은 없으리라.

“ 그러면, 부탁 좀 드려도 괜찮을까요? ”

◎◎◎

“ 아… 좋네요. ”

의자에 앉아 고요한 바다 위에서 한가롭게 낚싯대를 드리우고, 멍하니 수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무지성으로 뇌를 비우기에는 이만한 것이 없다고 새삼 느꼈다.

나는 헬레나의 교섭으로 인해 한 낚싯배에 올라탈 수 있었고, 구석 자리를 배정받아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신분 제시가 꺼려진다는 이유로 알트람 휘하의 상회 관계자로 위장한 것도 좋은 선택이었다.

덕분에 제법 값이 나갈 법한 옷을 입고 있었음에도 그러려니 하는 기색이었다.

“ 지온은 이런 게 좋은 거야? ”

나와 나란히 앉아 낚싯줄을 드리우던 헬레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낚시의 맛을 모르면 그저 지루하게 느껴질 뿐이니, 의문스러운 티를 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 좋지요.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냥 멍하니 있다가… 졸리면 자면 그만이고. ”

“ 그런 거라면 방 안에서 빈둥거려도 괜찮잖아? ”

“ 배경이 다르잖아요, 배경이. ”

방에는 푸른 지평선도 없고, 갈매기 우는 소리도 없다.

더구나 선실 지붕의 그늘에 숨어 쉬는 것은 방에 머무는 것과 느낌이 색달랐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 으음. 나는 잘 모르겠지만… 지온이 좋아하면 그걸로 됐어. ”

헬레나는 둘만 있는 시간이라면 뭐든 좋다고 말했다.

그녀 또한 여유 있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금방 적응했으며, 때로는 줄에 낚여버린 고기를 보며 눈을 반짝이기도 했다.

물론, 고기는 먹을 것이 아니기에 금방 풀어주었지만… 배의 난간에서부터 바다를 향해 떨어지는 폼이 무척 아파보였다.

“ 다들 정말 열심히 사네. ”

맥락 없이 나온 말이라 뜬금없을 법도 하지만, 나는 헬레나가 어째서 이런 말을 꺼냈는지 알 법도 했다.

어부들의 고함 소리가 희미하게 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 열심히라……. 그러게요. 정말 열심히 사네요. ”

“ 나도 저 사람들만큼 열심히 산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

“ 당연하죠. 헬레나도 충분히 열심히 사는 사람인걸요. ”

비록 저 어부들처럼 늘 몸이 고되지는 않더라도, 헬레나 또한 열심히 사는 사람이라고 장담할 수 있다.

늘 대외적인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재능의 덕이 크지만 마스터가 되어서도 검을 놓지 않고 사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존경할 데가 많았다.

그저, 병든 정신이 그 장점들을 죄다 깎아먹는 것 같아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덕분에 자신감이 조금……. ”

헬레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입을 열다,

갑작스레 입을 꾹 다물며 심각해 보이는 기색을 드러냈다. 무언가 거슬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한 듯싶었다.

“ 갑자기 왜 그러세요? ”

“ 응. 거슬리는 말들이 들렸어. ”

소드마스터의 감은 무척이나 뛰어나다.

그러니 마음먹기에 따라 작게 속삭이는 소리도 주워 담을 수 있었다.

물론 거리가 제법 가까워야 하는 것은 당연했으나,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초인적인 청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에, 나도 낚싯대를 조용히 땅에 내려놓았다.

모처럼 한가롭게 보내나 했더니 다 글러먹은 것 같았다.

“ 구체적으로는 어때요? ”

“ 상회의 높은 사람이라 소개해서 그런지, 우리를 인질로 잡아 돈을 뜯어낼 생각인 가봐. ”

“ 단순한 어부들이 아니라 도적… 아니, 수적이라는 거네요. ”

하긴, 어느 시대라도 밀수는 성행하고 있다. 상업이 성행하는 인간 사회라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아무리 단속한다 해도 밀수 자체를 뿌리 뽑을 수는 없었다.

물론 이번 경우는 밀수와는 거리가 먼 납치 및 협박이지만, 이런 협박을 하려는 놈들이 밀수라고 안 할까?

아무튼, 우리가 어지간히 만만해 보이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얼핏 약해 보이는 헬레나가 차고 있는 검조차 장식으로 여길 뿐이겠지.

“ 전부… 죽일까? ”

헬레나는 허리춤에 매달아 둔 검을 매만지며 눈을 부릅떴다.

나름대로 급박한 상황이기도 하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는 의도를 안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리라.

그 생각은 지극히 지당했다.

가만히 앉아 당하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 바보 같은 행동을 굳이 저지르자고 말을 건넸다.

“ 아뇨. 우선 저들이 원하는 대로 잡혀주죠. ”

굳이 알면서도 잡혀주자는 말에 황당해 할 법도 했으나, 헬레나는 여전히 냉정하기 짝이 없는 눈빛을 띠었다.

표정이 무너지지 않은 것도 그렇고, 나를 믿기에 침착함을 유지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 결론을 도출한 이유가 궁금하기는 했던지 자연스레 목소리를 내었다.

“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뭐야? ”

“저희를 잡아 몸값을 받아내려 하는 이상 큰 위협을 가하진 않을 겁니다. 당장 순순히 따르기만 해도 안전하기는 하다는 거겠죠. 물론 헬레나가 검을 휘두르면 간단하게 해결 될 일이지만, 알고 싶은 게 생겨서요. ”

“ 알고 싶은 거…? ”

“ 이놈들이 단독으로 벌이는 짓인지, 따로 손을 잡은 누군가가 있던지, 또 다른 불법 행위를 하는지요. ”

나는 내가 말한 것들을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그리고 만약 백작령 내에서 숨어 활동하는 이들을 잡는다면 빚 하나를 지게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백작을 대신해 범죄자를 잡은 것이니까.

물론 죄다 족쳐서 행방을 물어볼 법도 했으나, 상대에게 속아주면 자연스레 안내를 받는 셈이니 그 편이 훨씬 편할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지만… 옆에 있는 사람이 소드마스터인지라 크게 걱정할 일은 없을 듯 싶기도 했다.

상품을 확보한 직후 바로 팔아 넘기지는 않을 테고, 몰래 활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만큼 거래에도 시간이 걸릴 것 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품을 그들만이 아는 장소에 별도로 보관할 가능성이 높았다.

하루종일 배를 띄운 채 상대를 부르러 갈 수도 없을 테고,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눈에 확 들어올 테니 진작에 발각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라고 생각했다.

“ 지온은 이럴 때만 호기심이 많구나? ”

헬레나는 한숨을 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말썽꾸러기 아이를 보고 대하는 듯한 모습이다.

“ 어쩔 수 없지. 지온이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 결과가 나쁠 것 같지도 않고. ”

“ 고마워요. 그럼, 일단자는 척이라도 해서 방심하도록 만들죠.”

위험할 것 같지만 전혀 위험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내 옆에 앉아있는 여자는 일반인이 아니라 대륙에서도 손에 꼽는 마스터였기 때문이다.

상대는 그것을 모르고 있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헬레나를 납치하려 한다는 것은 곧 죽여 달라는 말과 진배없었으니까.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