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순회하는 척하는 무언가 #6
* * *
“ 당, 당연히 받아들이지…! ”
헬레나는 내 제안, 아니 고백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순수하게 애정으로만 한 고백이 아닌지라 미안하기는 했으나, 그렇다 해서 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좀 더 신경을 쓰면 된다고 결론 내렸다. 말은 뱉어버린 이상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고.
“ 고마워요. 그리고 고백 직후 이런 말을 하는 건 미안하지만……. ”
“ 응? 아. 로이드 말이지. 적당히 맞춰주다 고백하면 화내지 말고 거절하라고? 당연히 그렇게 할게. ”
그녀는 내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답을 내놓았다.
순간적으로 맥락을 읽어 내린 후 내놓은, 무척 정확한 답이었다.
“ 아 참. 이제부터 둘만 있을 때에는 존댓말도 하지 말고 편하게 불러줘. 마음 같아서는 어딜 가든 편하게 말하라고 싶지만, 지온이 불편해 할 테니까 이 정도로 참아주는 거야. 알았지? ”
서로 말을 높이며 사는 부부관계도 흔히 존재하는 세계지만, 헬레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했다.
물론 그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어찌 보면 매인 몸이 된 것 같기도 했으나, 또 어찌 보면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명분을 얻은 셈이기도 했다.
더구나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멘탈 치료라는 측면에서도 제법 효과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 네. 아니… 응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부터 그렇게 할게. ”
“ 그래. 앞으로도 그렇게 해 줘. 서로 가까워진 것 같아서 정말 좋으니까. 원래 가깝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
헬레나는 두 뺨에 손을 얹으며 배시시 웃었다.
정말 아이가 따로 없었지만, 그래서 귀여워 보였다.
“ 그럼, 다시 로이드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
“ 응? 뭔데? ”
“ 나랑 떨어져 있어도 괜찮겠어? ”
이 질문의 대답 여하에 따라 앞으로의 행동방침이 정해진다.
어찌 보면 스스로 역린을 건드리는 꼴이지만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 괜찮지… 는 않지만, 그래도 조금 정도라면. ”
그리고, 그 결과는 몹시 성공적이었다.
◎◎◎
“ 여기가 바르칸 항구의 세관입니다. 항구로 들어오는 배는 우선 여기에 신고를 하고, 내부 수색을 거쳐……. ”
지루하지만 나름대로 유익하다.
헬레나는 하품이 나올 법한 나른함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이 영지의 구조를 파악하고자 자세를 더욱 바로잡았다.
대외적인 자리인 이상 틈을 보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저택에 머무를 때 까지만 해도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여유가 없던 헬레나였다.
하지만 지온 알트람의 때 아닌 고백으로 인해 무척 들뜬 상태였고, 그로 인해 불안하던 심리 상태가 제법 안정된 덕이었다.
“ 아, 그렇군요.역시 백작님이 손을 써서 그런가, 제법 철저해 보이네요. ”
그녀는 로이드의 중재로 세관 관계자와 만나 인사를 나누고, 항구에서 검역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살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배에 올라 수색하는 모습까지 살피고 싶었으나, 그랬다간 큰 폐가 될 것 같았기에 얌전히 접기로 마음먹었다.
무엇보다, 배에 오르는 것은 지온과 단 둘이서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수출을 관리하는 곳이나 항구 근처의 시장가 등등, 이곳에서 볼 수 있을 독특한 풍경을 눈에 새겨 두었다.
“ 슬슬 점심시간이 된 것 같으니… 슬슬 식사를 하러 가시지 않겠습니까? ”
“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요? 워낙 활기 넘치는 마을인지라, 저도 모르게 넋을 빼앗기고 만 것 같네요. 그야말로 시간마저 깜빡 할 정도로. ”
“ 하하! 그렇게 칭찬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자, 이쪽으로. ”
로이드는 호탕하게 웃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제법 돈 깨나 쓴다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이른바 부유층을 대상으로 한 레스토랑이었다.
그렇기에 내부는 깨끗하고 화려했으며, 옷가지를 비롯한 개인의 위생 상태도 상당히 철저했다..
“ 로이드 님, 어서 오십시오. 그쪽의 레이디께서는…? ”
이 영지를 다스리는 백작의 아들이자 방귀 깨나 뀐다는 손님이 발을 들인 것이다.
그러니 안내받은 방도 기밀성이 보장되는 조용한 곳이었으며, 유난히 섬세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조리장이 직접 인사하러 온 것도 그 일환이었다.
“ 헬레나 크라우저 님이시네. 자네도 잘 알지? ”
“ 허어…! 그 소문 무성한 마스터란 말씀이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이곳 조리장 아이만입니다. ”
“ 만나서 반가워요. 헬레나 크라우저입니다. ”
헬레나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자, 조리장 아이만은 영광스럽기 그지없다며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강하기로 소문난 여자가 바로 코앞에 있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다만, 그렇게 호들갑 떠는 것은 아주 잠깐 뿐이었다.
조리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침착하게 인사를 마친 뒤, 주문을 받고 자신이 있어야할 곳으로 돌아갔다.
“ 이곳의 카르파초나 타르타르는 일품입니다. 산뜻한 맛이 언제라도 먹기 좋지요. 물론 다른 요리들도 모두 훌륭합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 두 개가 가장 입에 맞더군요. ”
“ 아… 그러셨군요. 로이드 님은 의외로 산뜻한 것을 좋아하시나 봐요? ”
“ 예. 부끄럽습니다만 그런 종류가 몸에 잘 받는 것 같습니다. ”
“ 어머. 부끄러워하실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요? 사람의 입맛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요. ”
헬레나는 무척 능숙하게 로이드를 위로했다.
지온과 떨어져 있어도 어느 정도 여유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주종관계 뿐 아니라, 남녀관계로 나아갔기에 얻은 안정감이었다.
그가 언제든 자신의 품으로 돌아올 것이란, 그런 확신을 얻었기에 오는 안정감 말이다.
“ 주문하신 크로켓, 참치 카르파초와 청어로 만든 타르타르입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
직원 몇몇이 주문한 요리를 들고 온 이후, 식탁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뭐라도 한 마디 꺼내고 싶은 로이드였으나, 묵묵히 음식에 집중하는 헬레나를 방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가 편안하게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헬레나의 표정에서 만족했다는 감정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잘 먹었어요. 로이드 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같이 훌륭했습니다. ”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지온 알트람이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요리에 죄는 없다.
더구나 그가 호언장담한 대로 만족스럽기 그지없었으므로, 헬레나의 입에서 훌륭하다는 말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 후우! 정말 다행입니다. 혹여나 입에 맞지 않으시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
“ 그건 너무 지나친 걱정이세요. 이미 접시가 들어올 때부터 향긋한 냄새에 입맛을 다셨는걸요. ”
“ 이런? 제가 그걸 알았다면 진즉 편안해 질 수 있었을 텐데……. ”
로이드는 적당히 농담을 섞어가며 분위기를 잘 이끌어갔다.
상업이 번성하는 영지의 후계자이자, 장래에 수많은 상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배운 화술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 저… 헬레나 님. 무례할 수도 있겠지만, 한 가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
“ 물론이죠. 이렇게 훌륭한 대접을 받았으니, 질문에 답하는 것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요. ”
헬레나는 가볍게 손짓하며 로이드의 질문을 부추겼다.
그녀 또한 무슨 질문이 날아올 지 궁금하니 얼른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그에 로이드는 몇 번이고 숨을 들이쉬고 내뱉기를 반복했다.
막상 마음에 담아 두었던, 첫눈에 반해버린 상대에 대한 감정을 꺼내려니 목구멍이 턱 하고 막혀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끌리기를 잠시. 결국 그는 각오를 다진 뒤 손을 부르르 떨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 헬레나 님께서는… 혹시 마음에 담아두신 남자가 있으십니까? ”
올 것이 왔구나.
누가 보아도 그 의도가 뻔히 엿보이는 질문에, 헬레나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한숨을 억누르라 애를 써야 했다.
오늘 아침 지온이 백작의 뜻을 전해주지 않았다면 무례한 태도를 보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 저어…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꺼내시니 무척 당황스럽네요. ”
그녀는 제법 붉게 달아오른 로이드의 뺨을 힐끗 바라 보다, 곤란한 척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에 로이드는 헬레나가 쑥스러워 하는 줄 알고 더욱 박차를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소위 흔들다리 효과라 불리는 현상을 이용하려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 시대에 흔들다리 효과라는 용어는 없지만, 그 개념은 잡혀 있었다. 수많은 호사가들이나 음유시인, 또는 여자를 후리고 다니는 난봉꾼들이 자주 입에 담으며 적립된 개념이었다.
“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흔히 찾아오는 것은 아니니, 꼭 묻고 싶었습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
“ 그렇게 사과하지 말아주세요. 당황한 것은 맞지만, 그…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까요. ”
그래. 누군가에게 청혼을 한다는 건 썩 무례한 일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지극히 당연했다.
특히 귀족끼리의 혼약은 집안끼리의 결합이라는 측면이 몹시 강하고, 서로의 세력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무척 중요시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반려 선택에 크게 신분을 가리지 않는 크라우저의 인간이 있으니, 먹음직스럽다 여기는 것도 당연했다.
다만, 로이드는 그런 계산보다는 진심으로 헬레나에게 반했고, 그랬기에 지금 같은 질문을 던졌다.
배경을 전부 빼고 보아도, 헬레나 자체만으로 충분히 매력적이었으니까.
“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가 있습니까? ”
남자? 물론 있다.
헬레나는 오늘 자신에게 고백했던 지온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자신과 비슷할 만큼 짙은 남색의 머리칼을 가진, 어딘가 여리다는 인상을 주는 남자의 얼굴을.
그에, 로이드는 큰 충격을 받은 듯싶었다. 두 눈동자가 몹시 흔들리며, 뺨의 열기가 차갑게 식어버린 것이 그 증거였다.
“ 있으… 시군요. 혹시 곁을 따라다니는 알트람의 그 남자입니까? ”
“ 네. 짐작하신 대로요. ”
제법 곱상한 소년이 취향이었던가.
로이드는 지온의 생김새를 떠올리며 고개를 푹 숙였으나, 그것은 다소 잘못된 생각이었다.
헬레나의 취향은 곱상한 소년이 아니라 지온 알트람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온보다 뛰어난 미모를 가진 남자들을 접해도 미동조차 없었다.
하지만 로이드는 그것을 모른다. 그저 곁을 지킨 지온이 우연히 그녀의 취향에 맞았을 뿐이라 생각할 뿐이었다.
“ 그러… 셨군요. ”
커다란 실망감과 허무함이 로이드를 집어삼켰다.
혼인 신청이 오는 족족 거절하는 것으로 유명한 영애였기에, 조금이라도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을까 기대했던 그였다.
그들은 편지만을 보냈지만, 자신은 운이 좋아 헬레나와 직접 마주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결과는 더욱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런 자작가의 애송이보다 자신이 훨씬 낫지 않느냐고, 재고를 해 달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상대가 크라우저인 이상 신분으로 인한 명분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공작이면서도 신분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것이 크라우저였고, 뒤를 이어갈 공작조차 철저하게 실력으로 선발하는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더해, 감정에 취해 입을 잘못 놀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헬레나의 허리춤에 찬 검이 불을 뿜을 것 같아 두려웠다.
로이드가 입을 다물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자신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검을 휘두르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불안 말이다.
헬레나가 단순한 공작의 영애가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도 한 손에 꼽을 만큼 드문 소드마스터였기에.
“ 실망을 안겨드려 죄송하지만, 저는 지온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함께 지내던 사이니까요. ”
“ …예. 알고 있습니다. 알트람 자작가는 대대로 크라우저 공작가를 모시는 충신이라고요. ”
오늘따라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자작 따위가 왜 이렇게 부러운 것일까.
로이드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확실한 남자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으니 손쓸 겨를도 없어 보였고, 더 이상 이야기를 끌다간 스스로를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통해, 그 또한 좋던 나쁘든 귀족의 인간이라는 것을 헬레나는 새삼 깨닫게 되었다.
권위가 더 큰 권위에 짓눌리는 것처럼 보였던 탓이다.
단, 그렇다고 해서 찝찝하다거나 미안하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거친 방법을 쓰지 않고 정리할 수 있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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