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순회하는 척하는 무언가 #5
* * *
“ 하아──. ”
늦은 밤. 헬레나는 하늘하늘한 잠옷만을 걸친 채, 창턱에 기대 짙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창문을 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바닷바람은 머리칼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꼭 닫아두게 되었다.
그 탓에 답답함은 배가 되었으나, 하필 부탁한 것이 지온이었기에 꾹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귀찮아.
헬레나는 사납게 치뜬 눈매에 어울리지 않게 심드렁한 기색을 드러냈다.
모처럼 지온과 둘이서 돌아 볼 기회가 엉망이 된 탓이었다.
“ 하아아──. ”
다시 한 번 한숨이 헬레나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불만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순수한 호의에 의한 것이든, 계산에 의한 것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결과만이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온과의 시간을 방해받게 되었다는, 헬레나에게 있어 몹시 신경 거슬리는 결과가.
◎◎◎
백작의 집에서 지내는 것은 불편한 점도 있지만, 편한 점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압도적으로 편한 점을 꼽는다면, 단연 식사 준비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 있었다.
가장 구석자리를 받기는 했으나 문젯거리조차 되지 않아 편하다는 생각뿐이었다.
헬레나는 내가 구석에 쭈그려 밥을 먹는 것이 영 못마땅한 듯 했으나, 억지로 분을 곱씹으며 견뎌내는 듯 했다.
내가 만들어 주는 것, 그리고 나와 마주보고 식사하는 것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스트레스가 쌓일 법도 했다. 보는 눈도 있고.
“ 아, 지온 알트람. 잠시 이야기 단 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겠는가? ”
식후의 차를 마시던 중, 뜬금없이 백작이 독대 요청을 해 왔다.
고작해야 자작인 나로서는 거절할 도리가 없어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인해 헬레나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다른 사람은 눈치 채지 못했으나, 내 눈에는 그녀의 가면에 실시간으로 금이 가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자는 시간 이외엔 최대한 나와 붙어 있으려 하는 것이 헬레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갈라질 것은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그 충격은 배가 된 듯싶었다.
테이블 아래에서 꿈틀대는 손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제 주인은 헬레나 님이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허락이 먼저 필요합니다.
이런 식으로 헬레나에게 짐을 떠넘기는 방법도 고려했으나 찝찝했다.
자작이라도 크라우저의 심복이라는 위치가 있어 함부로 대하지는 않으나, 그것을 믿고 거만을 떤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느긋하게 차를 들이키며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답했다.
“ 음. 식사도 끝났으니… 자네는 잠시 여기 남아주게나. ”
식후의 차까지 전부 마신 이후, 나와 백작을 제외한 모든 이들은 자리를 털고 밖으로 향했다.
헬레나 또한 자연스레 내 뒤를 스치게 되었으나, 까드득 하고 이빨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섬뜩했다.
그렇기에 나는 팔을 슬쩍 흔들어, 백작의 눈이 닿지 못하는 아래쪽에서 헬레나의 손을 꼭 잡았다.
피식 웃어주는 것도 덤으로.
“ 금방 갈 테니 너무 화내지 말아요. 네? ”
“ …응. ”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급히 손을 떼었지만, 헬레나는 그것으로 제법 만족했는지 한층 편안한 얼굴로 식당을 나섰다.
들키면 여러모로 골치 아플지 모른다는 불안을 감수하고 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리라.
“ 자… 그러면 둘만 남았으니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고자 하네. ”
“ 예. 말씀하시죠. ”
테이블의 끝과 끝이라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구도였음에도, 백작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운을 떼었다.
나와의 거리감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무의식적인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쪽에서 무례를 범할 수는 없었기에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
“ 내 아들이 헬레나 님에게 잘 보일 수 있도록 틈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는데. ”
아들을 붙이는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야말로 상상도 못한 정체가 따로 없었다.
“ 틈을 만들라 하시면, 어떤 뜻인지? ”
“ 흠. 너무 에둘러 말했나? 그러면 직접적으로 말하지. 둘만 있도록 해 달라는 뜻일세. ”
둘만 있도록 해달라.
그 말은 즉, 늘 곁을 졸졸 따라다니는 내가 방해라는 뜻이겠지.
“ 저는 크라우저 가를 섬기는 몸이지, 백작가에 몸 담은 사람이 아닙니다만…? ”
“ 혹시 신경에 거슬렸나? 그렇다면 미안하게 됐군. 하지만 자네와 헬레나 님이 꼭 붙어 있으면 로이드가 나설 자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부탁을 좀 함세. ”
백작은 부탁, 이라는 말을 유달리 힘주어 말했다.
그래, 내가 처한 상황이 특수하지만 않았다면 그저 그러려니 하며 쉽게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어쩐지 딸자식 키우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하는 헬레나를 보내는 것이 씁쓸하기도 하지만… 직접적으로 거리낄 것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헬레나는 병들어 있는 상태다.
케인을 처형한 직후 최고조에 달했던 무겁고 끈적한, 집착이라는 병은 조금씩 산뜻해지고 있지만… 여전이 위험수위에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나를 스치며 이를 갈던 헬레나만 보아도 그 점은 명백했다.
물론 로이드를, 더 나아가 백작가를 받아 들이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헬레나의 몫이다.
크라우저의 반려감은 그 스스로가 마음에 드는 사람을 낚아 오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곧 침묵을 깨고 답을 내놓았다.
“ 알겠습니다. 백작님의 의사를 따르겠습니다. ”
“ 그것 참 고맙군. 그럼, 내 이야기는 이상일세. 이만 가 보게나. 아, 그리고 이 일은 비밀로 해 주게나. ”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난 뒤, 백작의 축객령에 따라 자리를 떴다.
그리고는 곧장 헬레나가 머무르고 있을 방문을 두드렸다.
곧장 가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기도 했고, 곧 로이드가 올 것을 대비해 미리 말을 맞춰두기 위함이기도 했다.
“ 지온, 백작이 무슨 말을 한 거야? ”
헬레나는 나를 방에 들이기 무섭게 백작과의 대화 내용을 캐묻기 시작했다.
급박하면서도 어딘가 날 선 태도에 지레 겁을 먹을 법도 했으나, 나는 오히려 잘 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백작의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비밀로 해 달라는 요구? 어림도 없는 소리다.
그 요구를 들어주다 어떤 변수가 생길 줄 알고.
로이드를 위해 자리를 떠야 하는 상황도 골치 아플 지경인데, 그것을 숨기고 변명거리를 지어내려면 더 심한 두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럴 바에야 헬레나와 미리 입을 맞추는 것이 훨씬 현명했다.
“ 내게서 지온을 떼놓으려고… 대놓고 수작을 부렸다는 거지? ”
헬레나가 극도로 화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언성을 높이는 것보다 조곤조곤 말하는 그녀의 성향 덕이 시끄러워지는 것은 피했으나, 점점 물이 오르기 시작하는 살기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물론, 나는 강철멘탈 덕분에 조금 전이나 지금이나 평온하기 그지없다.
“ 괜찮아요. 백작의 아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떨어져 있을게요. 헬레나는 감이 좋은 편이니 눈치 챌 수 있을 거고요. 로이드가 검 등을 갈고 닦은 사람이 아니라는 게 참 다행이네요. 따라붙기 더 힘들어질 뻔했어요. ”
우선, 나는 헬레나와 떨어질 생각이 없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덕분에 노기가 다소 가라앉았으나 그녀 특유의 빛이 죽어버린 눈동자는 여전했다.
“ 그래도… 짜증 나. ”
가면을 쓰지 않은 헬레나는 자기감정에 한없이 솔직하다.
그렇기에 내가 제동을 걸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백작과 그 아들의 목을 쳐버릴 것이 분명했다.
지금도 끓어오르는 짜증을 겨우겨우 견디는 눈치였지만, 언제 터질지 알 수 없을 노릇이다.
내가 좀 더 머리가 좋았다면 여기서 좋은 방책을 떠올렸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러지는 못했다.
멘탈이 튼튼하다는 것은 생각에 여유를 불어넣기에 무척 유용했으나, 지능 자체를 올려주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나는 각오를 다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소 오그라드는 말도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는 안정된 멘탈 덕분이었다.
“ 헬레나. 앞으로 이런 일은 몇 번이고 일어날 거에요. 그건 헬레나도 잘 알고 있죠? ”
“ 그럴 지도 모르지만…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하는 거야? ”
“ 헬레나가 오늘 같은 요구나, 혼인 요청을 무척 싫어하니까요. 그래서, 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솔직하게 답해 주실래요? ”
“ 응. 말해 봐. 지온의 질문이라면 뭐든 답할게. ”
헬레나는 여전히 죽은 눈을 한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기심 덕분에 살기가 완전히 진압된 것은 다행이지만, 그녀의 멘탈을 제자리로 되돌리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나는 이 방법이 그 해답이 되기를 바라며, 태연자약하게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 헬레나는… 저를 좋아하시죠? ”
“ 응. 좋아해. 아마 지온의 부모님보다, 내가 지온을 더 좋아할 거야. 그런데 그건 왜…? 이미 알고 있는 일이잖아? ”
헬레나의 의문은 지극히 타당했다. 대놓고 호의를 드러낸 세월이 몇 년인데, 모르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한 사람에게 향하는 비정삭적인 집착이 정신병처럼 보이겠지만, 그 바탕에는 깊은 애정이 깔려 있었다. 그 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물론 너무도 무겁고, 또 비틀린 측면도 있는 애정이다.
하지만 나는 그 애정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현 상황을, 더 나아가 이와 비슷한 상황들을 극복할 극약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의무감만으로 움직이느냐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다.
생각해 봐라. 말은 잘 듣는 편이고, 평소에도 상냥한데다 탄력 있는 스타일에 아름다운 얼굴까지.
흔히 말하는 도내 최고 랭크의 미소녀가 와도 한 합에 떡실신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여자다.
다소 병든 것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그 흠조차 기꺼이 감수할 만한 사람이다.
그런 여자가 몇 년에 걸쳐 애정을 드러내는데, 넘어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서로 간의 관계에 변화를 주어야 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 네. 그래서 말인데… 저랑 정식으로 사귀어 주시죠. ”
“ …어? ”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분명 한 순간 멈춰 있었다고 확신했다.
공기의 흐름마저 멎고,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것마저 느끼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세상에서 떨어져 나간 것만 같았다. 영혼이 가출했다고 하는 느낌과 비슷하기도 했다.
그리고, 피가 흐르기 시작한 순간 헬레나의 뺨에서 펑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듯 빨개진 볼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차기 공작이 될 여자를 향해 "자작가의 아이를 낳아라!" 라고 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이건 너무 선을 넘었다.
“ 어… 어어? 어? 어어어? ”
얼마나 당황했던지 어, 라는 소리밖에 내지 못하고 있다.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언어능력마저 상실한 듯싶었다.
“ 어? 왜? 지금? 아니, 그게 아니라……. ”
“ 진정하시고, 천천히 말씀하세요. 숨이라도 고르시고요. ”
헬레나는 숨을 고르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반응해, 크게 숨 쉬고 들이쉬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덕분에 죽어있던 눈에도 빛이 돌아왔고, 무미건조하던 표정에도 활기가 넘쳐흘렀다.
“ 가, 갑자기 왜? 여태껏 내가 말했을 때는 전부 건성으로 흘러 넘겼으면서…? ”
그리고, 다소 더듬거리기는 했으나 언어능력도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 이런 식으로 가면 언젠가 헬레나를 빼앗길 것 같아서요. 일 년 전 까지는 헬레나를 아껴주는 좋은 남자를 맞으면 그것으로 좋다 생각했는데……. ”
“ 지금은 아니다, 그거야?! ”
헬레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여태껏 내가 보아왔던 헬레나의 미소 중 가장 화려하고, 가장 커다랬다.
나는 새삼스레 쑥스럽다는 감정과 함께, 조금 전부터 조금 강하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박동을 의식하며 쐐기를 박고자 그 물음에 답했다.
“ 네. 아니에요. 그러니, 어떻게 하실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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