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7화 (17/192)

〈 17화 〉 순회하는 척하는 무언가 #4

* * *

“ 오랜만입니다, 헬레나 님. ”

“ 네. 알베르트 님도 여전히 정정해 보여 기쁩니다. 바르칸 백작령이 굳건히 버티고 있다는 뜻이니까요. ”

“ 하하. 처음부터 이 늙은이를 띄워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려.”

척 보기에도 날렵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 알베르트 바르칸은 응접실에서 헬레나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새하얀 빛으로 둘러싸인 저택은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성이었고, 그곳의 주인이 머무는 응접실 또한 아름다웠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귀족답다, 고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헬레나는 백작의 손을 잡아 흔들며 반가운 티를 냈다.

수도에서의 회의나 같은 파벌의 모임으로 인해 몇 번 정도 얼굴을 마주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었다.

“ 그래, 그쪽의 알트람의 아들도 참 많이 자랐군. 몰라 볼 지경이야. ”

“ 감사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저도 조금은 크게 된 것이겠지요. ”

나는 갑작스레 날아온 관심의 화살을 능숙하게 쳐내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관심은 내가 아닌 헬레나에게 있었으므로, 적당히 말만 맞추어 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헬레나를 두고 다른 사람에게 정신을 팔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 공작님께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헬레나 님이 영지를 둘러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셨지요. ”

“ 그랬지요. 아버지가 힘든 부탁을 드린 것 같아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 힘들기는요. 크라우저 공작가는 대대로 후계자 분들에게 견문을 넓히도록 여행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저도 그 전통은 잘 알고 있는데다, 무엇보다 공작님께서 너무 정중히 부탁하신 덕에 제가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

그는 공작에게 머리를 숙이게 한 것 같아 몹시 죄송하다는 말을 전했다.

공작 정도의 인간이라면 생각 없이 명령 한 줄을 전달하는 것으로도 충분했겠지만, 크라우저 공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명령에 의한 복종은 단지 그 사람을 따르게 할 뿐이지만, 진정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선 권위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알트람이 크라우저를 대대로 따르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일 테고.

“ 정말…! 그렇게 겸손해 하시면 제가 다 부끄럽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던 폐를 끼치게 된 주제에, 오히려 주인에게 고개를 숙이게 해 버렸으니……. ”

“ 폐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왕국 유일의 소드마스터인 헬레나 님이 오시는 것만으로도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이 됩니다. 실제로 저희 영지의 병사나 기사들이 얼마나 의욕에 불타던지……. ”

백작은 헬레나의 방문이 가져 올 이득에 대해 열을 올렸다. 영지를 지키는 이들의 사기가 오르게 되면 자연스레 그 태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그 영향은 두말할 것 없이 좋은 영향이었으니, 경계에 틈이 더욱 없어지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

자연스레 군기가 한층 더 강하게 잡힐 것이라는 기대도 할 수 있었다.

거기다 운이 좋으면 헬레나와 검을 섞는다는 절호의 기회를 얻을 지도 모른다, 라는 계산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 아. 이거 실례가 많았습니다. 막 도착해 피로가 쌓인 손님을 두고 이야기가 너무 길었군요. ”

“ 아니에요. 저도 무척 즐거웠으니 사과하시지 마세요. ”

“ 너그럽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우선 방으로 안내해 드리죠. ”

백작이 손뼉을 가볍게 두드리자, 집무실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현대에 있을 법한 자동문이 아니라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 한 명이 열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제법 딱딱한 인상의 여자였다.

“ 자, 손님들을 방으로 안내해 드리게. ”

“ 알겠습니다. 자, 손님 분들께서는 이제 저를 따라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나와 헬레나는 백작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넨 뒤, 하녀의 등을 따라 긴 복도를 거닐었다.

공작 저택보다 화려한 측면이 있어 돈을 잘 번다는 인상을 받게 하는 저택이었다.

재력을 과시하여 상대의 기를 죽이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그러기 위해 이런 형태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이곳 백작령은 상거래가 활발하니 자연스레 교섭해야 할 일도 많을 테고, 그럴 때 분위기의 주도권을 잡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 이곳이 헬레나 크라우저 님이 머무실 방이고, 바로 옆방이 지온 알트람 님께서 머무실 방입니다. 정리는 마쳐 두었으니 부디 편히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필요할 때 불러주십시오. ”

하녀가 정중히 인사를 마치고 떠나가자, 나는 곧장 헬레나의 방으로 들어가 방을 살폈다.

마구잡이로 짐을 풀어놓을 수도 없었거니와, 가구 등의 상태를 파악해 무엇을 어디에 놓을지 생각하는 것은 당연했다.

다행히 옷장은 깔끔하고 텅텅 비어 있었다. 크라우저 저택과 비슷한 요령으로 정리하면 될 것 같았다.

“ 역시 남의 집이라 그런지 영 마음이 편치는 않네. ”

헬레나는 곧장 침대에 드러누워 한숨을 토해냈다.

조금 전까지 우아하기 짝이 없던 모습만을 보이던 영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축 늘어져 있었다.

그만큼 어깨에 힘이 많이 들어갔다는 뜻이리라.

“ 그럴 수밖에요. 집 나가면 고생이라고 하잖아요? 그래도 이 정도는 절대 고생이라고 할 수 없죠. ”

“ 그야, 나도 고생이라고는 생각 안 해. 그저 불편해서 피곤하게 느낄 뿐인걸. ”

“ 하긴, 여느 때보다 시선을 더욱 의식해야 하니 피곤하실 만도 하겠죠. ”

나는 드레스에 이어 기타 옷가지를 차곡차곡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파벌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지금 당장 이득이 되는 쪽으로 배신하려 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헬레나의 행동에 따라 등을 돌리는 결심을 굳히게 될 수도 있으니, 칠칠맞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리라.

“ 응. 바르칸 백작이 아버지를 잘 따른다 해도, 그건 아버지를 잘 따르는 것일 뿐이잖아. ”

“ 그렇지요. 그 뒤를 알 수 없으니 불안감을 느끼시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

“ 내 말이. ”

헬레나가 한숨 쉬며 침대 위를 구르는 동안, 나는 정리를 마친 뒤 곧장 내 방으로 향하려 했다.

지금처럼 모든 옷가지를 풀어 정리할 생각은 없으나, 가방 정도는 옷장 안에 넣을 생각이었다.그 편이 훨씬 편하니까.

“ 지온. 무릎베개 해 줘. ”

그러나. 그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헬레나의 명령에 따라 침대 위에 엉덩이를 붙이는 꼴이 되었다.

기다렸다는 듯 내 허벅지에 머리를 올리는 헬레나 덕분에 벗어나는 것은 더욱 요원한 일이 되었다.

내 짐을 정리하려 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그럼에도 이러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지친 모양이었다.

“ 나 참. 정말 애가 따로 없네요. ”

“ 그래. 나 애다 뭐. 그러니 이렇게 떼써도 당연한 거 알지? ”

원래 애라는 소리를 들으면 다소 발끈할 법도 했으나, 헬레나는 씩 웃으며 어리광 부리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 아이가 너무 떼를 쓰면 혼나야 한다는 것도 아시죠? ”

“ 어, 어…? ”

다만, 헬레나는 역공에 역공을 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나를 올려다본 채 돌처럼 굳어버렸다.

순간 호흡마저 멎은 듯 미동조차 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러기를 잠시. 헬레나는 얼굴을 붉힌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 지온이라면… 혼내도 좋아. ”

혼내도 좋다. 참 상상력 자극하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평범하게 벌을 세우는 것부터 시작하여 바지를 까서 엉덩이가 새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때려볼 법도 했고, 그 이상으로 광기 넘치는 짓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아니, 가능하다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나는 벌을 기대하는 헬레나의 이마를 가볍게 쿡 찌를 뿐이었다.

그녀에게 큰 수치를 주었다 발각되기라도 하는 날엔 크라우저의 위상이 땅에 떨어질 것이 불 보듯 뻔했던 탓이다.

“ 윽…! ”

“ 좋긴 개뿔? 이 정도로 만족하세요. ”

헬레나는 얼굴을 가린 손을 치우고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투로 반응한 것이 어지간히 불만인 듯싶었다.

그래서 잠든 아이를 다루듯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주자,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웃으며 눈을 감았다.

◎◎◎

“ 세상에. 너무 화려하게 차린 것 아닌가요? ”

싱싱한 해산물로 만들어진 사치의 향연이 그곳에 있었다.

저녁 식사가 준비되었다기에 가 보았더니, 어지간한 대갓집 잔칫상 저리가라 할 정도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야말로 연회를 벌이지 않는 이상 나올 수 없는 규모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수많은 가짓수를 고작 귀족 몇몇을 위해 준비했다? 오히려 거북하기 짝이 없게 느껴졌다.

그것은 헬레나도 마찬가지라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질문을 던졌지만, 백작은 공작 영애의 도착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준비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더해, 부디 먹어달라고 정중히 부탁하는 통에 거절하는 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애초에 거절할 이유도 없었으나, 어쩐지 오늘 식사는 몹시 불편할 듯싶었다.

“ 하하. 저도 매일 이렇게 차리지는 않습니다. 오늘이 특별한 날이라 준비를 했을 뿐이지요. 그러니 편히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는 것이 저도 행복할 테고요. ”

“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잘 먹겠습니다. ”

“ 오오. 부디 그렇게 해 주시지요. ”

헬레나는 가장 상석에 앉은 백작의 바로 다음에 위치한 자리이자, 한 발 먼저 도착해 있던 백작의 아들과 마주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본래 주인이 식사를 하는 동안 곁을 지키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나 또한 가장 구석자리에 쥐죽은 듯 조용히 앉아 있었다. 아마 크라우저의 심복이라는 것이 영향을 준 듯싶었다.

“ 백작가의 요리사 분들은 정말 뛰어난 솜씨들을 가지고 계시는 군요. 하나같이 너무 맛이 뛰어나네요. ”

“ 하하! 칭찬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

얼핏 들으면 예의상 하는 말 같기도 하지만, 실제로 맛없는 것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무역을 통해, 또 영지 내의 어업을 통해 들여온 다양한 해산물들인지라 가짓수도 다양했다.

“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로이드 바르칸입니다. 식사를 미루면 실례가 될 것 같아 소개를 미루고 있었습니다. ”

“ 로이드 님이시군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제가 폐를 끼친 것 같네요. 사과드립니다. ”

“ 아, 아닙니다! 결코 헬레나 님의 잘못이 아니니까요! ”

금발의 귀공자같은 남자, 로이드는 몹시 당황하여 손사래를 쳤다.

헬레나가 머리를 굽히고 나오니 당황할 법 했으나, 단지 그것 뿐만은 아닌 것 같았다.

헬레나를 향하는 눈빛에 열이 담긴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식사의 막바지에 이르자 제법 활발한 대화가 오고갔다.

조용히 로이드의 옆을 지키던 백작부인의 수다스러운 말부터 시작하여 그것에 맞장구를 치듯 끼어드는 다른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 아 참. 헬레나 님, 영지 관찰은 내일부터 하실 생각이십니까? ”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무렵, 백작은 기다렸다는 듯 헬레나의 일정을 물었다.

방을 빌려주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던질 수 있는 물음이라 생각했는지, 헬레나도 별다른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네. 그럴 것 같아요. 마차 안에서 얼핏 보았지만 정말 활기가 넘치고 있더군요. 그래서 무척 기대가 되요. ”

“ 활기 넘치는 영지민이야말로 제 자랑거리지요. 아무튼, 그러시다면 제 아들에게 안내역을 맡겨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

“ 예…? 백작님의 아드님에게요? ”

헬레나는 백작의 제안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귀족의 아들을 안내역으로 쓴다는 발상 자체에 놀랍기도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썩 놀랄 일은 아니었다.

공작영애를 안내하는 일이니만큼 백작의 아들이 나선다 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거기다, 저 남자도싫어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헬레나와 같은 여자와 함께 할 수 있으니 좋아하는 기색을 은근히 내비치는 것도 당연했다.

“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겠지요. 지온과 둘이서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

그러나, 헬레나는 대외적인 가면을 유지하며 정중히 거절을 표했다.

정말로 죄송스럽기 짝이 없어 거절하는 것이 속이 편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 아뇨. 잠시나마 헬레나 님과 같은 분을 모실 수 있다면 저에게도 큰 영광이 될 것 같습니다. 부디 기회를 주시지요. ”

“ 아, 그게……. ”

그에, 로이드는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사를 비쳐왔다. 눈을 반짝이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덕분에 헬레나는 몹시 당황하여 말꼬리를 흐리다, 문득 내 쪽을 힐긋거렸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뜻이었다.

어쩔 수 있나? 그냥 받아들여야지.

설령 상대가 흑심을 품고 있다 하더라도, 면전에서 대놓고 거절했다간 체면에 상처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지극히 당연한 명분을 들고 나왔기에 빠져나갈 구멍도 없어 보였다.

그렇기에 나는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백작 나름대로의 협력일 테고, 무엇보다 로이드의 안내가 끝나면 안내 없이 돌아다닐 구실도 만들 수 있을 터.

헬레나가 내 생각을 전부 읽을 수는 없을 테지만, 그녀 또한 눈치로 상황을 파악했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서는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는 것을 이해한 듯 보였다.

“ 아…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이 이상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요.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

그 결과 헬레나는 기쁘다는 듯 웃으며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였으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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