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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6화 (16/192)

〈 16화 〉 순회하는 척하는 무언가 #3

* * *

─지온, 지온. 일어나 봐. 바다야. 바다가 보여.

어, 어어?

대체 언제 잠이 들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 마차 안에서 헬레나와 이야기를 하다 조용해지는 순간이 왔고, 그 순간 멍하니 있었던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내 기억은 딱 거기까지였다.

“ 윽…! 죄송합니다, 헬레나 님. 종자가 주인을 두고 한가로이 잠이나 자고 말았습니다. ”

긴장이 너무 풀린 탓인지, 아니면 너무 들뜬 탓인지는 모른다.

확실한 것은 헬레나를 두고 한가로이 잠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점에 대해 먼저 사죄를 했다.

그리고, 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긴장 할 필요성을 느꼈다.

“ 응? 피곤하면 잘 수도 있지. 오히려 나는 이득 본 것 같아서 좋은걸. ”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얹으며 헬레나의 얼굴을 보았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것을 보니 정말로 기분이 좋아보였다.

나를 배려해서 건네는 말이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 그리고, 지온은 내가 매일 어리광 부려도 늘 부드럽게 받아 주잖아. 그러니 그 반대여도 괜찮아. ”

“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곤란하죠. ”

“ 정말 딱딱하다니까. 그러면 내게 응석부리라고 명령하면 들을 거야? ”

“ …그것도 안 되겠지요. 제 인상이 나빠지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헬레나 님까지 엮여버릴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

헬레나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못마땅한 듯 혀를 차 보지만, 그럼에도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었다.

부끄러워서 꺼림칙한 부분도 있지만 헬레나를 느슨하게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공작의 영애이자 후계자이며, 최연소 소드마스터.

그런 높은 벽이 있기에 헬레나를 만만히 보는 이들이 적었으나, 만약 지금처럼 틈이 많은 모습을 보인다면 그 벽을 넘으려 하는 이들이 더 많이 나타날 것 같았다.

그렇잖아도 아름다운 헬레나를 갖고 싶어 하는 욕망에 거센 불을 붙이는 셈이니까.

물론, 누구와 결혼을 할 것인지는 오로지 헬레나의 선택이다.

내가 그것을 막을 권리도 없고, 막고 싶지도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그녀를 진심으로 달래줄 수 있다면 그것대로 좋을지 모른다.좀 더 자유롭게 생활 할 수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 1년 전의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 …그래, 뭐. 지온이 딱딱한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까, 이쯤에서 넘어갈게. 모처럼 항구도시에 오기도 했고. ”

“ 아… 그러고 보니 바다라고 말씀하셨죠. 어디 한 번 볼까요.”

나는 바다라는 말에 이끌려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창 너머에는 압도적이라 해도 좋을 푸른색의 세계가 힘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현대와는 비교조차 불가능할 만큼 깨끗하고 아름다운 바다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그리고 대항해시대를 눈으로 보는 듯 항구에 대기하고 있는 배들에 이르기까지.

나는 새삼스레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끼며, 바다 위를 나는 갈매기들을 보며 넋을 놓았다.

“ 이곳이… 바르칸 백작령이군요. ”

항구도시 바르칸 백작의 영토는 색다른 활기에 넘쳐 있었다.

항구를 오가며 구릿빛 근육을 과시하는 어부들을 시작으로거리에서 물고기를 팔며 호객행위에 몰두하는 아낙네들과,거래를 위해 오고가는 제법 부유한 차림새의 상인들까지.

내가 그 모든 것에 놀라 눈을 반짝이자, 헬레나는 나를 애 같다며 슬쩍 놀려댔다.

“ 한창 어릴 때에는 아이 같지 않더니, 정작 조금 크고 나서 애같이 되네. ”

“ 너무 들뜬 것 같이 보였나요? ”

“ 그런 것 같다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좋다고 생각해. 심드렁한 것보다 훨씬 낫잖아? ”

헬레나는 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여행길에 오르길 잘 했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데, 듣는 사람이 낯이 뜨거워질 지경이었다.

“ 그것 참 다행이네요. ”

그나마 낯이 뜨거워지는 정도에서 더 나아가지 않아 다행이라 느끼며, 나는 서서히 속도를 줄이는 마차를 보며 표정을 다듬었다.

고개를 살짝 내밀어 보니, 예상했던 대로 커다란 저택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저것이 알베르트 바르칸 백작의 저택이라 예상하기를 잠시.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머리를 도로 마차 안으로 집어넣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어깨에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시종으로서 각을 잡으려는 의도였다.

그러자 헬레나 또한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호흡을 차분히 가다듬었다.

대외적인 얼굴을 보일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알아챈 것이 분명했다.

“ 실례합니다. 헬레나 크라우저 님이 맞으십니까? ”

자세를 가다듬고 기다기를 잠시. 마차의 문이 조용히 열림과 동시에 판금갑옷을 입은 기사 한 명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귀족들이 개인 재산을 들여 고용하거나 육성하는 기사인 것 같았다.

“ 그래요. 제가 헬레나 크라우저입니다. ”

헬레나는 기다렸다는 듯 품속에서 보패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보패에 새겨진 문양은 비석마냥 땅에 꽂힌 칼이었고, 그것은 곧 크라우저를 상징하는 증거였다.

귀족의 마차에는 각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귀족의 마차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신분 증명이 되었고, 만약 이것을 사칭하는 인간이 있다면 발견 즉시 처형했다.

그 귀족의 계급이 높고 낮음과 관계없이.

그러나, 이 기사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마차를 막고 신분을 확인하러 왔다.

경우에 따라서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일 수 있겠지만, 또 다르게 본다면 자기 일에 지극히 철저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마 귀족의 마차를 사칭하지 않았다 해도,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이 꼭 귀족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또 납득하고 있었다.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보패를 보여준 헬레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 듯 보였다.

“ 실례했습니다. ”

남자는 보패의 재질과 문양을 확인하고 나서야 실례했다는 듯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본래 진품인지 아닌지를 감정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눈이 좋아야 했는데, 아무래도 이 남자가 그런 부류가 아닐까 생각했다.

“ 헬레나 크라우저 님. 저희 바르칸 백작령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백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테니, 이후부터는 안내를 받아 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

“ 네. 고마워요. ”

“ 그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

기사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뒤 조심스레 마차 문을 닫았다. 내 신분을 굳이 확인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헬레나의 신분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리라.

“ 제법 철저하네요. ”

“ 응. 아무래도 유력 상인들을 자주 불러 모임을 가진다고 하니,그만큼 신분 확인에 철저해진 거겠지.사람들이 자주 드나들면 어쩔 수 없이 구멍이 생기기 마련이잖아. ”

나는 헬레나의 가벼운 평을 그럴듯하다 여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상거래가 활발한 바르칸 영지는 다른 곳에 비해 모임을 여는 빈도가 남다르다 들었다.

그 모두가 사치스러운 파티가 아니라고는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자주 드나든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서 백작을 암살하거나 다른 수작을 부리려는 무리의 등장도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었다.

“ 예. 그렇긴 하죠. ”

“ 그래도 때에 따라 그것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 철저한 건 좋지만 말이야. ”

헬레나는 구체적으로 누구라고 콕 집어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짐작 가는 사람이 있는 듯한 발언이었다.

나로서는 별 관심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같은 파벌의 귀족이 행동거지를 잘못하면 다소 찝찝하기는 할 것 같았다.

“ 아가씨. 다 왔습니다. ”

헬레나와 마주하며 가볍게 잡담을 나누던 중,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까지 마차를 끌고 온, 그리고 앞으로도 끌고 가 주실 마부 브라운이었다.

“ 네. 알려 줘서 고마워요. ”

나는 브라운의 말을 듣자마자 마차의 문을 열어, 헬레나보다 한 발 먼저 땅을 밟고 섰다. 내 쪽에서 손을 뻗어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는 것을 돕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마차를 타도 키가 작으니 에스코트고 뭐고 불가능했지만, 지금은 가볍게 해낼 수 있었다.

“ 내리시죠, 헬레나 님. ”

“ 네. 부탁할게요. ”

헬레나는 사적인 장소에는 편히 말을 놓지만, 지금처럼 많은 사람의 이목이 머무는 곳에 이르면 확연히 태도가 달라졌다.

하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기본이고, 여유를 갖고 사람을 대했다.

물론 평소에도 여유를 갖고 대하는 것은 맞았으나, 크라우저 저택 내에 있을 때와는 질적으로 큰 차이가 났다.

독살 이후 내게 집착하는 모습을 여실히 드러냈기에, 크라우저 저택 내에서는 조금이나마 어깨에 힘을 빼고 다니게 된 것이다. 나름대로 긍정적인 변화였다.

“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바르칸 백작님의 집사 레디라고 합니다. ”

헬레나가 내 손을 잡으며 마차에서 조심스레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연미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옷 입은 모습을 보니 집사라 예상은 했지만, 크라우저 저택의 집사인 앤디보다 훨씬 젊어보였다.

“ 네. 처음 뵙겠습니다. 헬레나 크라우저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레디. ”

“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헬레나 님. 높디높은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신 검의 천재를 이렇게 육안으로 뵙게 되었으니까요. ”

“ 어머, 과찬이세요. 그저 운이 조금 좋았을 뿐인걸요. ”

내가 마차 구석에 놓아두었던 가방과 케이스를 꺼내는 동안, 헬레나는 집사 레디와 제법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꾸미고 있었다.

공작 영애임에도 다소 소탈하며, 그럼에도 기품이 느껴지는 모습에서 충분히 호감을 느낀 것이리라.

귀족이면서 어깨에 힘을 빼는 모습은 충분히 파격적인 플러스 요소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 또한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다. 말조차 함부로 걸기 힘든 고귀함이야말로 귀족의 덕목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 정말 훌륭하신 분이시군요.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느라 폐를 끼쳤습니다. ”

“ 아니에요. 덕분에 저도 즐거웠고, 긴장도 풀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사실 무척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

“ 하하, 마지막까지 겸손하시다니! 너무 즐거운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만, 그랬다가는 백작님이 경을 치시겠지요. 자, 따라오시죠. 그쪽에 있는 마부는 제가 사람을 붙여 방으로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

레디는 이번에야말로 등을 돌려 백작이 있는 곳으로 앞장섰다. 그에 나는 헬레나의 등 뒤를 묵묵히 따르다,

문득 뇌리를 스치는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아 참. 백작님과는 독대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끼어들 자리가 아닌 것 같은데요. ”

“ 그럴 필요 없어. 아니, 그러지 마. ”

그에 헬레나는 단호하게 그럴 필요가 없다 일축했다.

나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것은 알지만, 정말 필요할 때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 하지만……. ”

그래서 말꼬리를 흐리며 조심스레 반론을 늘어놓으려 했으나, 오히려 헬레나의 심기를 자극하는 꼴이 되었다.

“ …지온. 고작 백작 따위를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아? ”

순간, 헬레나가 나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무저갱 같은 눈빛을 띠며, 조금 전까지 부드럽게 웃고 있던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냉랭하기 짝이 없는 표정이었다.

여전히 목소리를 낮춘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내버려두면 사단을 낼 기세였다.

대외적으로 내비치던 차분함은 온데간데 없이, 가히 그라데이션 집착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모습이었다.

아니, 왜 뜬금없이 발작버튼이 눌린 거지?

“ 크라우저 공작님의 파벌… 소위 국왕파의 한 축이지 않습니까? 신경 쓰는 것이 당연하지요. ”

“ 지온을 필요 이상으로 불편하게 하는 존재가… 정말 필요할까? ”

귀족 가문의 인간으로 사는 이상 어느 정도의 불편함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헬레나도 그 점을 잘 알기에 약간 불만스러울 기색을 보일 뿐이었는데, 이번에는 그 경우가 다른 것이 분명했다.

마스터의 서슬 퍼런 기세는 자연스레 주위를 압박했고, 어지간히 감이 둔한 사람도 금방 공포에 질릴 만큼 위협적이다.

그러니 몇 걸음 앞서 가던 레디가 이마에 땀을 흘리며 시선을 던지는 것도 당연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사람의 시선이 쏠릴 때에는그것을 의식해서 진정하라는 의견을 내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병든 헬레나에게는 지극히 악수가 될 행동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이럴 경우에는헬레나를 우선하여 달래주는 것이 가장 효과가 좋았다. 늘 그랬듯이.

“ 필요하죠. 저는 헬레나와 바닷가에서 데이트도 하고 싶거든요. 그러면 백작이 편의를 봐 주는 게 좋을 테니까요. ”

“ …어? 데이…트? ”

데이트라는 단어의 파괴력은 아주 굉장했다.

칼날같이 날카롭던 공기가 단숨에 부드럽게 가라앉았고, 무저갱 같은 눈에도 빛이 돌아와 있었다.

거기다 생기발랄함을 증명하려는 듯 뺨까지 붉어져 있었다.

레디는 그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는 듯 가슴을 쓸며 한숨을 내쉬더니, 곧 정신을 부여잡으며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헬레나의 기분이 풀렸다는 것만이 중요하다 생각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대놓고 사적 호기심을 드러내는 것도 무례했으니까.

덕분에, 나는 평소 헬레나와 둘 만 있을 때 사용하는 말투를 거리낌 없이 쓸 수 있었다.

“ 그래요. 조금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인적 드문 곳에서 낚시도 해보고 싶고, 해안가도 산책해 보고, 배도 타 보고 싶어요. 또 물고기를 사서 요리하고, 같이 오붓하게 먹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헬레나는 싫어요? ”

그에, 헬레나는 몽롱한 눈빛을 띤 채 나도 그러고 싶다는 말을 작게 내뱉었다.

내심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으나, 원만하게 수습할 수 있어 참 다행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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