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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15화 (15/192)

〈 15화 〉 순회하는 척하는 무언가 #2

* * *

“ 바르칸 백작령이라. ”

나는 짐을 주섬주섬 챙기며 생각에 빠졌다.

바르칸 백작령에는 항구가 있어 해양 무역에 발달했으며, 영지 내에서 소비하는 신선한 해산물들이 널리 알려진 지역이기도 했다.

거기다 백작령 외에도 서너 군데를 더 돌아야 했으니 제법 준비할 거리가 많았다.

다만, 너무 많은 짐을 챙길 필요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데다, 각 영지의 손님으로 대우받을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기반시설이 전부 갖추어진 곳에서 지내게 되므로 짐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했다.

“ 이 정도면 됐겠지. ”

나는 커다란 가방에 차곡차곡 짐을 정리한 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으로 훔쳤다.

짐이라고 해야 같은 옷가지가 대부분이고, 그 외에는 작고 잡다한 도구나 투척용 단도 몇 개가 전부였다.

약간 시간을 들여 내 짐을 챙겼으니, 다음은 시종으로서 헬레나의 짐을 쌀 차례였다.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 보통이겠지만, 이 경우 헬레나는 기다리는 것이 일이었다.

다른 하인을 시켜도 되겠지만, 내가 전속 시종인 이상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 헬레나 님. 들어가겠습니다. ”

똑똑.

헬레나의 방문을 가볍게 몇 번 두드린 뒤 문고리를 잡고 열자, 거대한 무언가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덮쳤다.

내 가슴팍에 눌려 음탕하게 찌그러지면서도 묵직함과 부드러움을 전해주는 그것은, 다름 아닌 헬레나의 가슴이었다.

“ 지온, 어서 와!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

헬레나는 나와 눈을 마주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키가 많이 커버린 덕에 성인인 헬레나와 눈높이가 맞을 정도가 된 것은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저 거대한 융기에 파묻혀 숨 쉬기가 곤란했으리라.

“ 예. 예상외로 오래 걸린 것에 대해선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떨어져 주세요. 다른 사람들이 봅니다. ”

“ 보면 어때서? 나와 지온 사이가 얼마나 특별한지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걸. ”

“ 아이고……. ”

나는 급히 방문을 닫고, 헬레나의 양 어깨를 부드럽게 잡은 뒤 억지로 떼어놓았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기꺼이 견뎌낼 만한 힘이었으나, 순순히 물러나는 것을 보니 억지로 붙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마도 그녀의 짐을 챙겨야 하는 나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은 여전했다.

“ 아무튼, 헬레나 님의 짐을 정리할게요. ”

나는 손에 쥐고 온 드레스 보관용 케이스와 평범한 가방을 따로 분류한 뒤, 우선 드레스 몇 벌부터 꺼내 조심스레 케이스 안에 넣었다.

보관부터 세탁법까지 전부 숙지하고 있었기에, 환경만 마련되면 얼마든지 새것처럼 만들 수 있었다.

드레스를 입지 않는 영애라고는 하나 드레스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공작의 영애이기 때문에 여느 것보다 더욱 화려한 드레스가 마련되어 있었다. 가히 공주의 것과 비견될 만큼.

“ 드레스는 필요 없는데. ”

헬레나는 드레스를 챙기는 나를 바로 옆에서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주 어렸던 시절을 빼면 드레스를 입은 적이 없다고 할 수 있을 만큼 경장과 연이 가까웠던 탓이다.

하지만 드레스가 필요할 때에 없으면 곤란했으니, 챙겨둔다고 해서 손해 날 것은 없었다.

오히려 챙기지 않았다 손해나는 경우가 더 많을 것 같았기에 이렇게 챙기기로 마음먹었다.

“ 혹여나 사교 모임… 노블 클럽을 갑자기 열거나, 공교롭게 그런 시기에 갈지도 모르잖아요. ”

“ 그래도 정복 정도면 충분하지 않아? ”

“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드레스도 마련하지 않는 선머슴이라는 소리는 듣기 싫어서요. ”

객관적으로 보아도 헬레나의 미모는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나다.

그러니 드레스가 없다는 이유로 그 매력이 깎일 만한 상황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나 또한 알트람의 사고방식에 깊이, 또 진심으로 심취한 모양이다.

“ 선머슴이라고…? 지온, 내가 그렇게 매력 없어? ”

선머슴은 농담 삼아 꺼낸 말이었을 뿐이었으나, 헬레나의 얼굴엔 잔뜩 실망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나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아니라, 그녀 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인한 좌절감이 엿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에, 나는 절로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보기에 따라 기만질이냐고 쌍욕이 박힐 법한 상황이 답답했던 탓이었다.

“ 헬레나. 제가 늘 말하죠? 당신은 매력이 너무 넘쳐서 곤란하다고요. 당신이 거절한 혼인 건수만 봐도 그 점은 명백하잖아요. ”

“ 혼인 요청은 정략적 계산도 있으니 신뢰하기 어렵잖아. 아무튼, 내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건 정말이지…? ”

헬레나는 여전히 불안한 기색을 띠며 물었다.

다른 사람의 평가를 덤덤히 받아들일 만큼 성장한 것은 좋은데, 그 반동으로 내 평가에는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평소에 잘 구별하고 흘러 넘기는 농담조차 이렇게 반응하니 말 다한 셈이다.

“ 정말이죠. ”

이게 그 성격은 묘하게 음침하고, 자기가 예쁜 줄 모르고 내게 매달리는 사람이라는 환상의 유니콘인가?

나는 과거 처녀빗치나 판타지의 너드남의 개념을 떠올리며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름다운 사람은 자기가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 것이 당연했는데, 그 상식이 깨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 가만 생각해 보니… 이곳은 판타지 세계이지 않던가?

그러니 이런 판타지 같은 성격이 있다고 한들 이상할 것은 없었다.

앞으로의 판타지는 배경 뿐 아니라, 성격도 판타지 같은 사람이 있는 곳이라 재정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그래…? 그럼 다행이야. ”

헬레나는 진심으로 안도하는 듯 가슴을 쓸며 웃었다.

거대한 곡선을 타고 가슴팍을 쓸어내리는 모습이, 묘하게 남자를 유혹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럴 의도는 전혀 없었겠지만왠지 모르게 그렇게 느껴졌다. 아마도 내가 마귀에 씐 탓이겠지.

“ 아무튼, 이제 진짜로 정리할 거에요. ”

“ 응. 마음껏 해 줘. ”

해 줘 라는 말이 묘하게 야릇하게 들렸지만, 이것도 기분 탓이겠지.

나는 얼굴을 붉히는 헬레나를 뒤로한 채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바지나 셔츠 등등, 내가 자주 가져다주느라 눈에 익은 경장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 중에서 무언가를 꺼낸다는 것은 묘한 고민거리를 안겨줬다.

옷만 봐서는 평범하기 짝이 없지만, 이것을 헬레나가 걸치는 순간 요염함을 한층 더 돋구어주기 때문이었다.

물론, 내 기준에서.

“ 뭐로 하실래요?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주세요. ”

“ 나는 지온이 골라주는 거라면 뭐든 좋아. 아니, 내가 입어줬으면 하는 옷을 골라줬으면 좋겠어. ”

선택이 곤란하여 질문을 던졌더니 곤란함이 배가 되어 날아왔다.

덕분에 질문거리가 하나 더 늘고 말았다.

“ 아니… 본인이 입고 싶은 걸 고르셔야죠. 이번에는 긴 여행이잖아요. ”

“ 그러니 지온이 입어줬으면 하는 옷을 골라달라는 거야. 최대한 나를 보고 지루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 그건 헬레나를 볼 거리로 삼으라는 거잖아요. 조금 과장을 더하면 광대가 되도 좋다는 뜻이라고요. 즉, 공작 영애로서 해선 안 되는 말이에요. ”

“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할 것 같아? ”

헬레나는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연인처럼 내 팔을 꼭 껴안았다. 덕분에 융기 사이에 팔이 쏙 들어가는 형태가 되었으나, 곤란하다는 감정이 먼저 앞섰다.

부드러운 감촉 덕에 기분은 좋았지만 난처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일을 할 수 없을 테니, 나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 알겠어요. 고르면 되죠? ”

“ 응. 잘 부탁해. ”

고르겠다는 말을 꺼내고 나서야, 헬레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떨어졌다.

그 탓에 일이 지체되었으니 조금 더 빨리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내 취향에 맞춰 헬레나의 옷을 챙겼다.

속도를 중시하긴 했으나 한 벌 한 벌 차곡차곡 개어 넣었기에 각은 잘 살아 있었다.

그렇게 겉옷을 몇 벌을 챙긴 것은 좋았으나,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였다.

바로 안에 입을 속옷을 고른다는 중차대한 문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수치스러움에 몸이 굳어 말을 더듬거나 방을 빠져나갈 법 했으나, 나는 강철멘탈의 소유자다.

그러니 검은 속옷을 위주로 챙기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것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 오, 오……. ”

내가 무덤덤하게 속옷을 챙기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헬레나 쪽에서 얼굴을 붉힌 채 몸을 배배 꼬았다.

때때로 귀에 쏙쏙 박히는 말을 입에 담기도 했으나, 그 또한 무시했다.

내가 좋아하기도 했고, 성숙한 헬레나에게는 이런 쪽이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해, 검정 외에는 하늘색으로 몇 벌 챙겨 두었다.

검정이 없을 경우의 차선책이었지만, 둘 모두 선이 날렵하고 화려한 무늬가 들어가 있어 보기 좋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 이걸로 다 챙겼습니다. ”

여성 속옷까지 완벽히 정리한 뒤, 화장품 등을 포함한 나머지 짐들도 꾸려냈다.

이것으로 여행 준비는 끝난 셈이었다.

“ …고마워. 수고 많았어. ”

“ 별 것 아니에요. ”

나는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는 헬레나를 내버려 두고, 짐이 든 가방과 케이스를 구석에 잘 정리한 뒤 등을 돌렸다.

당장 할 일이 끝났으니 다음 할 일을 지시받거나, 또는 그녀의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기 위해서.

“ 아, 달리 지시할 일은 있으신가요? ”

“ 응? 없어. 굳이 말하자면 저녁 메뉴를 무엇으로 할지 생각하는 거지만… 아직은 너무 이르고. ”

헬레나는 피식 웃으며 나를 일중독이라 놀렸다.

일을 하면 또 다음 일을 해달라는 모습이 중독처럼 보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일을 썩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고, 굳이 따지자면 게으르게 늘어지고 싶은 쪽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일을 찾는 것은, 헬레나가 성장함에 따라 멍하니 서있거나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내 부탁으로 인해 헬레나에게 전투기술 지도를 받게 되었지만, 그것을 제하더라도 노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양심에 찔리는 수준이었다.

“ 음. 그러면 이 기회에 어디에서 어디로 갈 지 정해보도록 하죠. 시작은 백작령 부터죠? ”

“ 그럴까? 나는 바르칸 백작령 다음은 피리어드 남작령으로 가보고 싶어. 그 다음은 딜로스 백작령에…….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헬레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정한 동선은 다소 비효율적으로 느껴졌지만, 아마 일부러 저런 식의 동선을 짠 것이 분명했다.

한 번에 쭉 둘러가는 식을 일부러 피해, 최대한 바깥에서의 시간을 즐기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작령을 벗어날 기회가 드물었던 것은 명백했으니까.

“ 네. 그렇게 하죠. ”

헬레나가 정했다면 그에 따를 뿐이었기에 좋다는 소리를 냈다.

왔던 길을 또 오락가락하는 것이 다소 피곤할 법 같기도 했지만, 모처럼의 여행길이기도 하니 즐거우면 좋다고 생각했다.

나도 헬레나의 곁에 딱 붙어 있느라 바깥 구경을 제대로 못해 봤으니, 이참에 바람을 쏘이는 것도 참 좋을 것 같았다.

“ 아. ”

그러던 중, 나는 문득 뇌리를 스치는 두 이름에 무심코 목소리를 냈다.

그에 헬레나가 무슨 할 말이 있냐고 물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물쩡 넘겨버렸다.

헬레나를 달래며 사느라 깜빡 잊고 있었지만, 이 세계에는 그녀 이외에도 두 명의 위험 요인이 존재하고 있었다. 엘렌 레드후드와 이브 그린우드가 그랬다.

엘렌 레드후드는 다크엘프 출신의 용병이다.

본래 깨끗한 백색 피부를 가진 것이 엘프의 고유 특성이나, 간혹 엘렌과 같은 돌연변이가 태어나고는 했다.

그리고 다크엘프는 그 피부색 때문에 더러움의 상징이라 칭해지며, 경멸과 두려움을 한꺼번에 받는 존재였다.

본래 엘프에게는 인간과 같은 성씨가 없다.

굳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이 사는 마을의 이름을 성씨 대신으로 사용했다.

단, 엘렌의 경우는 그런 일반적인 경우와 선을 달리했다.

갈 곳 없는 그녀가 같은 다크엘프 몇 명과 함께 용병 일을 하며 얻은 별명이 바로 레드후드였기 때문이다. 전쟁에 나서면 늘 로브의 후드를 피로 물들인다 해서 붙은 별명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해 보이지만, 엘렌이 위험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전화로 인해 용병단 모두가 죽고, 유일한 다크엘프가 된 엘렌만이 고대 유적의 비전을 얻어낼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엘렌은 비전으로 얻은 파괴력을 가지고 대륙을 더욱 혼란에 빠뜨리게 되었다.

이브 그린우드는 제국 마탑의 이단아이자 왕따이다.

현대에서는 상식으로 분류되나, 이 세계에는 개념조차 알려지지 않은 작은 입자를 탐구하는 탓에 멍청한 년이라 손가락질 받는 소녀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마탑이 박살난 이후 이 소녀는 그 광기 어린 연구에 박차를 가해, 홀로 대규모 화학테러를 일으킬 수 있는 몸이 되었다.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바이오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간단했다.

마탑이 이브를 무시했다곤 해도, 이브에게 있어 마탑은 소중한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로 인해 화학테러를 막는 마법이 개발되는 것은 당연했으나, 그 이전에는 헬레나 등의 마나 유저는 마나를 끌어올려 버티는 식으로 시간을 끌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이들도 지금은 조용했다.

폭주의 원인이 되는 전쟁의 불씨, 헬레나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스무 살이 넘어서도 조용한 그녀를 보며, 새삼 힙노스가 한 수를 참 잘 두었다고 생각했었다.

헬레나를 잘 막으면 반 이상 해결된다는 말이 실제로 일어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요즘 헬레나를 보니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 어떤 식으로 불똥이 튈지 모르니, 앞으로 여유가 되면 그들을 찾아 공작령으로 끌어들이려고 마음먹었다.

왜냐하면친구는 가까이 두고 적은 더욱 가까이 두라는 명언을 믿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들은 적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비유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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