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이래서 집착한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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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점호를 하고, 식사를 하고, 오전 훈련에 돌입한다.
나는 헬레나가 그 모든 과정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며 놀라워했다.
헬레나의 검이 뛰어나다는 것은 충분히 보았으나, 오늘 휘두르는 것은 또 다른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굶주린 맹수처럼 몰아붙이는 것이 어제였다면, 바람처럼 전부 흘려내는 것이 바로 오늘의 헬레나였다.
“ 진짜 대단하긴 하네. ”
특히 발달된 융기를 가죽 갑옷으로 누르듯 단단히 고정하고 기사들 사이를 누비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할 일도 잊은 채 이대로 저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시종이다. 할 일을 미뤄서는 안 되었다.
물론 내 주인은 그런 것도 관대하게 넘어갈 만했으나,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이 그래서는 곤란했다.
그래서 나는 급히 몸을 돌려 헬레나의 텐트로 걸음을 옮긴 뒤, 어제 벗어 둔 빨랫감을 챙겨 빨래터로 돌아왔다.
훈련 중에 일일이 빨래나 샤워를 하며, 평소같이 청결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비록 훈련이라곤 하나 실전과 같은 공기를 방불케 하기에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훈련받을 시절에도 이와 비슷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지만, 헬레나가 공작이자 이 훈련장의 대가리라는 것이 그 예외를 용납하게 만들었다.
여자라서가 아니라 강하기에 허락된 특권이었다.
그렇다 해서 다른 기사들이 늘 땀에 흠뻑 젖은 옷을 입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갈아입을 옷 정도는 챙기고 있고, 개인정비 시간에는 스스로 빨래를 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훈련 중에 빨래를 할 수는 없겠지.
“ 오오. ”
나는 냇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헬레나의 속옷이자 가슴 가리개가 상상 이상으로 커다랬던 탓이다.
또, 전체적으로 검정에 레이스가 달린 그것은 남자의 본능을 자극하는 요소로 가득하기도 했다.
“ 솔직히 이정도면 비벼도 무죄지. ”
어쩐지, 헬레나가 옷가지를 넘기기 전 얼굴을 붉힌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겉으로는 잘 꾸며낸 주제에 본질이 천박하기 그지없는 속옷을 맡기려니 영 찝찝했던 것이리라.
그래도, 내 할 일에 변함은 없었다.
성실한 종자답게 때를 빼는 친환경 액체를 묻혀 조심스레 문대고, 세척을 할 때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보통 물에 씻어 말리는 보통 세탁과 비교해보면 사치스럽기 그지없었다. 당연히 냄새는 안 맡았다.
나는 도마와도 닮은 큰 나무판에 겉옷을 개어 올리고, 남은 칸에 속옷을 놓은 뒤 급히 자리를 떴다.
속옷을 대놓고 광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헬레나의 텐트 뒤편이 바로 숲이었고, 사람이 오지 않기에 빨래 건조에 적합했다.
그래서 빨래하러 가기 전 미리 만들어 두었던 건조대에 옷을 가지런히 걸쳐 햇빛에 말렸다.
숲의 초입이기에 빽빽한 나뭇잎 그늘이 햇빛을 가리지 못하는 위치였다.
“ 후우! ”
세탁이라는 한 고비를 넘기자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다음으로는 텐트 안을 청소해야 할 차례였으나, 평소 헬레나가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어 조금만 손보면 되었다. 덕분에 할 일이 대폭으로 줄었다.
그렇다면, 다음은 점심 준비를 도울 차례던가.
“ 지온 님, 이 시간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취사 텐트로 들어가니 재료 준비에 분주하던 바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사람들을 시켜 여러 밑 준비를 하고 있던 중이라 몹시 미안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질질 끌지 않고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 헬레나 님은 물론, 기사 분들도 드실 점심 식사잖아요. 저도 부족하나마 한 팔 거들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
“ 예? 지온 님께서 직접? 아니, 아무리 시종이라도 이렇게 수고로운 일을 안겨드릴 수는 없습니다. ”
주방 일이라는 것이 손 하나라도 있으면 좋기는 하다. 그러나 그는 내가 귀족이기에 여러모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들만의 선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 민폐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하는 것 같았다.
물론, 나도 그 점은 잘 안다고 생각한다.
계급이 높은 인간일수록 자리나 지켜주는 것이 좋지, 시찰이니 뭐니 하는 명분으로 아래를 쑤시면 그만큼 피곤해진다는 것을 안다.
내가 그 정도로 거창한 인간은 아니고 그런 생각도 없지만, 그럼에도 일단 귀족이기에 신경을 쓰는 것이겠지.
하지만.
“ 저도 크게 보면 바트 씨나 여러분과 같은 처지의 사람이잖아요. 그러니 사양 말고 의지해 주세요. ”
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스프의 밑 준비를 하는 쪽에 섞여 칼질을 해댔다.
조리대 뒤편에 수북히 쌓인 재료를 보니 스프가 아니라 비프스튜를 준비하는 모양새였다.
“ 어, 저, 저어……. ”
바트가 여전히 굳어있는 동안에도, 나는 토마토 상자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껍질을 벗겨냈다.
주방에서의 칼질만큼은 헬레나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지라 작업 속도는 무척 빠른 편이었다.
“ 바트. 얼른 지시 주세요. 여기 최고참이 멍하니 있으면 안 되잖아요? ”
내가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피식 웃자, 바트는 그제 서야 체념한 듯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불과 몇 초 정도 굳어있었을 뿐이었음에도 가열찬 채찍질로 취사병들을 다그쳤다.
“ 다들 병신 소리 듣기 싫으면 다들 움직여! 몸도 멀쩡한 새끼들이 빌빌댈 거야?! ”
“ 예! ”
나는 졸지에 먹지 않아도 욕을 먹인 것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평온한 마음으로 토마토 한 상자를 바닥냈다.
작업 속도로 보면 가히 믹서기로 갈아낸 수준이라 보아도 손색이 없었다.
정말 미안합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좆 빠지게 움직여서 할당량이라도 덜어드리겠습니다.
“ 와. 귀족 분들이 이런 것도 알아요? ”
양파를 까려고 덤벼들던 취사병 중 하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워했다.
내가 물이 든 대야를 들고 양파 박스 앞으로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 말씀드렸잖아요. 여러분과 같이 누군가를 모시는 입장이라고. ”
“ 그래도 그렇지, 체스 님도 이런 건 모르시지 않나요? ”
“ 지식으로는 아시지 않을까요? 저도 물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아무튼 슬슬 움직여 보죠. ”
나와 취사병은 대야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양파를 최대한 끌어 물을 채운 대야에 담갔다.
이렇게 하면 매운 성분이 물에 녹아 눈이 따가워지는 것을 조금이나마 막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양파 껍질을 벗길 때에는 뿌리를 가장 나중에 잘라내야 했다.매운 성분이 뿌리 쪽에 많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식들 모두가 신계의 잡학 도서관에서 알아낸 것들이었다.
“ 와… 존나 빠르다. ”
왼쪽 양파 박스에서 꺼낸 양파를 중앙 대야에 담그고, 처리를 한 양파를 오른쪽 빈 박스에 쌓아둔다.
이렇게 하면 작업 효율이 그럭저럭 괜찮았기에 제법 나쁘지 않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덕분에 취사병에게 진심어린 감탄을 들었다.
“ 저게 진짜 귀족이야? ”
“ 아무리 체스 어르신의 아드님이라 해도 좀 너무한데? 못하는 게 없어. ”
양파에 이어 당근과 감자 껍질까지 빠르게 벗겨내자 사방에서 탄성이 들려왔다.
비프스튜의 밑 준비 외에 빵 반죽을 하는 이들이 주로 내뱉는 감탄이었다.
감자, 당근, 양파를 비롯해 타임과 로리에… 월계수의 잎도 준비했다.
나머지는 고기를 써는 일 정도였으나 이미 다 끝낸 상태였다. 손을 바쁘게 놀린 것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 정말 대단하십니다. 평소보다 더럽게 빨리 끝났어요. ”
바트는 한가로이 손이 빈 나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처음 보였던 걱정의 기색은 완전히 사라져, 믿을 만한 동료에게나 표현할 법한 신뢰를 보이고 있었다.
“ 그건 다행이네요. 조금 전에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
나는 고집을 부린 것을 순순히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바트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 아뇨! 오히려 저야말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조리 시간도 빨라졌고, 나머지는 스튜 조리와 반죽을 쉬게 했다 굽는 것뿐이니 참 편해질 것 같습니다. 지온 님도 아시다시피, 밑 준비가 참 고생스럽죠. ”
“ 네. 저도 잘 알죠. 아예 누가 다듬어서 팔아줬으면 하는 생각을 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니까요. ”
“ 그렇다니까요! 재료의 신선도 문제고 있고 해서 그럴 수 없다는 게 참……. ”
바트는 자기 고생을 알아준 것이 기뻤는지 완전한 수다쟁이가 되어 있었다.
내가 주방의 고생을 안다고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최대한 비위를 맞춰주며 이해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실제로 조금은 이해하기도 했고.
“ 아 참. 저도 재료 좀 쓸 수 있을까요? 헬레나 님의 간식을 만들어야 해서. ”
“ 물론이죠! 크라우저 공작가가 사들인 재료를 크라우저의 영애이신 헬레나 님을 위해 쓰는 건 당연하니까요. 앞으로는 사양하지 마시고 마음대로 쓰셔도 괜찮습니다. ”
“ 예? 정말 그래도 괜찮아요? ”
이 주방의 주인은 바트다.
그렇기에 재료를 사용함에 있어서도 그의 허락을 받는 것이 당연했으나, 설마 이렇게 재료를 자유롭게 사용할 권한을 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는 두말할 것도 없이 그 말을 감사히 받아들이며, 조리대에 서서 남은 재료를 가지고 쿠키 반죽을 만들었다.
“ 저어… 체스 님도 직접 요리를 하시진 않죠? 알트람 가의 주방에서 배우신 기술인가요? ”
“ 어… 그렇지요. ”
알트람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힙노스의 영지에서 독학으로 익혔지만, 그냥 그렇다 치고 넘어가기로 했다.
괜히 돌팔이의 약물 과다처방으로 죽은 것부터 시작하는 구구절절한 사연을 입에 담기엔 피곤했던 탓이다.
그리고, 설령 피곤하지 않았다 해도 말하지는 않았으리라. 괜히 시끄러워 질 일만 늘어날 테니까.
“ 아, 이걸로 됐네요. 나머지는 재운 후에 팬에서 구우면 끝나겠어요. ”
헬레나의 집에는 벽돌로 만든 옛 형식의 오븐이 있으나, 이곳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래서 약한 불에 달군 프라이팬을 써야 했다. 어제도 해봤으니 어려울 것은 없었다.
나는 깨끗한 천에 반죽을 싼 뒤 보울에 담았다. 그 후 취사 텐트를 나와, 헬레나의 텐트로 걸음을 옮겨 서늘한 곳에 반죽을 두었다.
나머지 조리나 배식 등은 취사병들이 알아서 할 테니, 나는 이곳에서 쿠키를 굽기만 하면 되었다. 바로 어제처럼.
“ 흐아암──.대충 삼십분에서 한 시간인가……. ”
마침 여유가 생긴 김에, 나는 텐트 한 구석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채 눈을 감았다.
간단히 선잠을 자며 시간을 때우고, 피로를 약간이라도 덜기 위한 방책이었다.
다행히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기 무섭게 의식이 끊어졌고, 그 이후로 길면서도 짧은 시간을 잠들어 있었던 것 같다.
“ 엉…? ”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입가로 흐르는 침 한 줄기를 소매로 슥 닦아냈다.
아마 텐트가 바람과 부딪혀 땅에 쓸렸고, 그로 인해 소리가 난 것 같았다.
“ 아직 점심시간은 안 됐나보네. ”
헬레나는 자기 몫의 식사를 받으면 곧장 이 텐트로 돌아온다.
아무리 기사들에게 존경받는 여자라 한들, 결국 지휘관이다. 그 지휘관이 기사들 사이에 섞이면 편하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식사를 할 수 없을 터였다.
어쩔 수 없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말겠지.
즉, 그녀가 홀로 밥을 먹는 것은 기사들을 배려한 행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기특함에 대한 보상을 주고자 이렇게 쿠키를 구워 대접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 다 됐나? ”
프라이팬에서 굽는 쿠키는 뚜껑을 덮고 약한 불에 구워야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 타버리고, 뚜껑을 덮지 않으면 미약한 열이 프라이팬 내부를 돌지 못해 제대로 구워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갓 구워진 쿠키를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쿠키는 굳이 따뜻할 필요가 없으니, 이렇게 미리 만들어 두었다 때가 되면 차와 함께 대접하면 그만이었다.
그래도 마지막 점검은 필요했다. 반죽을 하는 도중 간을 보긴 했으나 혹여나 싶은 마음에 하는 맛 점검이다.
“ 음. 역시 맛있……?! ”
적절한 당도에 바삭함. 어제와 같이 잘 구워진 쿠키였다. 분명 이상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집어 먹는 순간 목구멍부터 격렬한 고통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꺽꺽 소리를 낼 뿐 제대로 고함조차 지를 수 없을 정도에다, 전신의 혈관을 바늘로 쿡쿡 쑤시는 것만 같은 강렬한 아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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