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이래서 집착한다 #3
* * *
“ 하아…! 진짜 힘들다아~. ”
넓은 텐트로 만들어진 지휘관용 막사.
귀족의 저택처럼 장엄하지는 않았으나 있을 것은 다 갖춘 실용성 넘치는 공간에서, 헬레나는 야전침대 위를 구르며 신음했다.
5박 6일의 왕국 기사단 훈련 일정 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무척 지쳐 보이는 기색이었다.
“ 고생하셨어요. ”
나는 헬레나의 시종이기에 훈련에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딱 붙어 있거나, 쓸데없이 훈련장에 얼굴을 내미는 일은 없었다. 괜히 눈에 띄는 짓은 삼가고 싶었던 탓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놀고먹고 있었느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비교적 가볍게 휴대할 수 있는 야전침대를 시작으로 간단한 조리기구 등을 준비하느라 분주했었다.
참고로 야전침대라 하여 현대와 같은 것이 아니라, 가대를 세우고 그 위에 매트리스 비슷한 것을 얹는 방식이었다.
그렇다 하여 그것을 나 혼자서 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금만 성장했다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영락없는 아이다. 그렇기에 기사 몇 명과 힘을 합쳐 일을 해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 대가로 조촐하지만 과자를 만들어 주었는데, 다행히 무척 기뻐했다.
한가하다 못해 따분할 만큼 평화로운 신계 생활을 보내고자 요리에 공을 들인 보람을 느낀 순간이었다.
힙노스는 대충 먹고 잤으니 보람이고 뭐고 없었으니까.
“ 지온, 나 정말 죽을 것 같아아……. ”
“ 죽기는요. 오늘도 열심히 잘 하시던 걸요. ”
헬레나는 나를 침대 근처로 오라 손짓하더니, 가까이 다가온 내 몸을 덥석 껴안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칠칠맞은 동생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으나, 배를 꾹 누르며 자극하는 감촉은 장난 수준이 아니었다.
질량과 부드러움에 의한 압도적인 폭력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저 무덤덤하게 헬레나의 정수리에 손을 얹으며 그녀를 위로했다.강철멘탈의 은총 덕분이었다.
“ 정말…? ”
“ 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만약, 여전히 불안하시다면 이렇게 어리광을 부려도 괜찮아요. 숨기는 것 보다는 이렇게 토해내는 게 좋다고 제가 예전부터 말씀 드렸으니까. ”
“ 지오온…! 지온은 정말 내 엄마야! ”
나보다 압도적으로 큰 소녀가 한껏 어리광을 부리며 뺨까지 비벼댔다.
누군가 이 유아퇴행의 현장을 본다면, 정녕 이 여자가 그 헬레나 크라우저가 맞나 싶어 눈을 몇 번이고 비빌 것이 분명하리라.
그래. 내가 니 애미다. 이 순간만큼은.
“ 네, 네. ”
나야 헬레나를 잘 아는 편이니까 그저 그렇게 넘어갈 뿐이지, 그녀가 어리광 부리는 모습은 그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설령 그녀의 부모라 해도 그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유리멘탈 주제에 집 안에서도 여린 모습을 보이지 않는 여자였으니까.
“ 자, 차랑 과자를 구웠으니까 가져다 드릴게요. ”
“ 과자…? 이런 막사에서? ”
“ 네. 급양관에게 부탁해서 재료를 얻어 뒀으니까요. 그러니까 잠시 실례할게요. ”
나는 헬레나를 조심스레 떼어놓은 뒤, 텐트 구석에 마련된 조리대에서 차와 과자를 트레이에 담아 가져왔다.
실용성 넘치는 매직 아이템이 제법 널리 알려진 세계였기에, 마치 현대의 휴대용 버너와 같은 것들도 더러 있었던 덕이다.
“ 와아…! 달다, 달아. ”
헬레나는 트레이를 건네받아 자기 허벅지 위에 올린 뒤, 가볍게 구운 쿠키 하나를 덥석 베어 물었다.
헬레나의 취향에 맞춰 간을 했기에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기색이었다.
약간 씁쓸한 맛이 감도는 차에 단 쿠키의 조합이 엄청났던지 둘 모두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그것 또한 놀랍기도 했으나, 내가 더 놀란 점은 저 와중에도 우아함을 잃지 않은 헬레나의 태도였다.
아니, 그렇게 게걸스럽게 먹어대는 것을 봤는데도 천박하다는 인상이 느껴지질 않았다고?
이게 진짜 귀족의 교양이라는 걸까?
“ 고마워. 정말 잘 먹었어. ”
“ 만든 입장에서는 정말 다행이네요. ”
나는 뒷정리를 하며 피식 웃었다.
식사는 배급이 되니 괜찮아도, 야외훈련 중 이런 기호품을 즐기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치스럽게 보이기도 했고.
그러나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남은 재료를 긁어모아 만들었으니 괜찮을 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애초에 헬레나 혼자 머무르는 막사 안에서 해결했으니 보는 눈도 없었다.
“ 저… 이제 잠을 자려 하는데, 괜찮을까요? ”
정리를 전부 끝내고, 나는 저도 모르게 치밀어 오르는 하품을 억누르며 물었다.
아이의 몸이라 그런지 밤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잠이 쏟아지고 말았다.
헬레나를 그런 사정을 알았는지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으나, 어딘가 아쉬운 기색이 역력한 표정이었다.
아마 조금 더 있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저런 얼굴을 한 것처럼 보였다.
“ 내일 시간에 맞춰 깨우러 올게요. 자기 전에 이빨 꼭 닦으시고요. ”
누구 한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 편히 쉴 수 없는데다, 하인들에게도 휴식이 필요하다.
24시간 뜬 눈으로 주인의 곁을 지새우는 하인은 아무도 없었다. 지극히 당연한 이치다.
그래서 내일 깨우러 오겠다는 말을 던졌더니 헬레나의 표정이 제법 밝아졌다.
무슨 조삼모사도 아니고…….
아무튼, 나는 헬레나의 막사에서 나와 취사병들이 단체로 머무르는 숙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쪽에서 잠을 자겠다고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었기에 놀랄 것은 없었다.
“ 아, 지온 님. 어서 오세요. ”
넓은 텐트에 발을 들이자, 공작가의 사병이자 이곳 취사반의 반장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분명 바트라는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편하게 말을 걸어달라고 했음에도 내가 귀족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절한 사람이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귀족에게 말을 놓는 게 훨씬 부담일 테니, 차라리 내가 그만큼 정중하게 대하는 것으로 퉁치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 아, 바트 씨. 아직 안 주무셨어요? ”
“ 일은 끝났지만 아직 잠들기엔 애매한 시간이니까요. 그보다, 아가씨는 괜찮은 건가요? ”
“ 네. 몸 상태도 좋으시고, 문제없습니다. ”
나는 입구 구석에 마련된 이부자리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한숨을 토해냈다.
맨바닥이기는 하지만 모포 등 열을 보존하는 재료를 깔아 제법 푹신하고 따뜻했다.
거기다 중앙에 난로형 아이템까지 설치했으니 추운지도 몰랐다.
다른 텐트에도 이와 같은 아이템이 전부 설치되어 있었으나, 나는 새삼스레 공작가의 재력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어느 정도 재력이 있다면 누구나 사들일 수 있는 것이 생활형 아이템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 아… 정말 좋네요. ”
나는 새삼 하인 복장을 선택한 자신에게 뿌듯함을 느꼈다.
만약 연미복 같은 것을 입었다면 입니 벗니 하는 문제로 골치가 아팠을 것이 분명했다.
“ 그렇죠? 야외 같지가 않아요. ”
“ 정말… 그러네요. ”
가만히 누워 이불을 덮고 있으려니 잠기운이 몰려왔다.
공기는 따뜻하고, 등도 제법 따뜻한 편에 아이의 몸이라는 특성까지 합쳐지자 저항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저항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
“ 어, 으어어……. ”
기사단의 기상 시각이 대략 아침 7시임을 감안하면, 지금은 여섯시 정도 되었을까.
나는 이미 텅 비어버린 취사병 숙소 텐트를 느긋이 돌아본 뒤, 기지개를 펴며 몸을 일으켰다.
여느 때보다 내가 귀족이라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 여기는 순간이었다.
만약 내가 평범한 취사병이었다면 꼭두새벽부터 밀가루 반죽을 하고 스프를 끓이는 등 정신이 없었으리라.
우욱!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 힙노스 님, 감사합니다. ”
나는 귀족으로 태어나게 해 준 힙노스님에게 가볍게 감사기도를 한 뒤, 갈아입을 옷을 갖고 텐트를 나왔다.
어제 이만 닦고 자느라 여러모로 더러워졌으니, 이런 아침에 더러움을 씻고 헬레나에게 가려는 생각에서였다.
이렇게 맑은 아침공기를 마시고 있으면 속이 뻥 뚫리는 것 같고, 몸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나는 미숙하나마 마나로 몸을 강화할 줄 알았으니 그 체감이 더했다.
식사는 취사반 쪽에서 마련하니, 헬레나를 깨워 몸단장을 돕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다.
실제 전쟁 상황이 아닌 이상 다소 여유를 부릴 틈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쟁 중이라 하더라도 최소한의 단장은 했겠지만, 오늘처럼 여유롭지는 않겠지.
“ 으, 추워. ”
차가운 아침 공기 속에서 맨살을 드러내자 온 몸이 부르르 떨렸다.
샤워실 대용으로 이용하는 냇가에 내려와 몸을 담그니 그 추위는 더했으나, 마나를 끌어올려 최대한 추위를 걷어냈다.
육체 강화로 몸에서 열을 일으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오우야……. 이건 식도까지 시리네? ”
씻는 도중 목이 말라 냇물을 마셨더니 기도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화끈할 정도로 시원한 것은 마음에 들었으나, 다음부터는 조금 미지근하게 해서 마셔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또 낮은 목소리로 감탄사를 터뜨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 으으…! ”
나는 최대한 빨리 마무리를 짓고, 냇가에서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헬레나가 훈련에 임할 동안 아이템을 이용해 세탁을 하고 남은 재료로 어떤 간식거리를 만들지 계획했다.
역시 만들기 편한 쿠키 종류로 할까.
아니면 취향을 바꿔 짭짤하고 간단한 감자칩으로 간단히 때울까.
감자칩이라면 만들기도 쉬우니 기사단과 나눠 먹을 만큼 양을 확보할 수도 있겠지만, 야전식량을 간식으로 갈아버리는 것도 꺼림칙하다.
그래서 기사단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 아니면 조리를 도와 메뉴 자체를 색다르게 꾸밀까…? ”
재료는 제법 다채로웠으니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었다.
다만 대량조리에 적합한지 아닌지 그 균형을 맞춰야하는 것이 곤란했다.
재료를 넣고 끓여 대량으로 제조할 수 있으며, 맛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스프가 사랑받는 것도 이 때문이었다.
내 생각이지만, 맛과 조리 시에 드는 수고로움의 균형이 잘 맞아 떨어지는 메뉴 중 하나였으니까.
“ 참 고민되네. ”
할 수 있는 것이 많으면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어지며, 그렇기 때문에 곤란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 때였다.
나는 빵반죽을 손볼지 스프를 손볼지 고민하며 냇가를 벗어나려 했으나, 냇가 건너편에서 익숙한 인영을 둘 보았다.
케인 크라우저와 평범한 복장을 한 남자였다. 남자의 얼굴은 낯설었지만 아마 잡일 담당이리라.
케인은 몹시 인상을 쓰며 남자를 다그쳤고, 남자는 그에 저항하지 못한 채 연신 고개를 숙였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으나 표정이 보일 정도의 거리였던 탓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이렇게 멍하니 냇가에 서서 발각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런 본능에 이끌려 조심스레 냇가를 벗어나 근처 나무 그늘에 몸을 숨겼다. 말은 안 들려도 어떤 행동을 할지 최대한 지켜보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케인은 그 이후에도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말한 뒤 숲의 그늘로 떠나갈 뿐 다른 낌새는 없었다.
남자 또한 두려움의 여운에 떨었으나 별 문제 없이 본래 위치로 돌아갔다.
혹시 헬레나를 관찰해 틈을 찾아보라는 명령을 한 것이 아닐까.
내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헬레나를 싫어하고 귀족주의에 찌든 케인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특히 이런 대규모 훈련의 경우 틈을 찾을 가능성이 높았으니 저 놈이 적극적인 것도 이해는 간다.
“ 뻘짓하네. ”
설령 틈이 발견된다 해도 놈의 개차반적 성격에 비할 것은 아니겠지.
나는 저런 꿍꿍이조차 별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하며, 느긋하게 헬레나의 막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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