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 이래서 집착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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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어렴풋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아침. 잘 닦인 길을 따라 한 마차가 내달렸다.
힘차게 땅을 내달리는 말발굽이 따가닥 소리. 바퀴가 길을 구르며 내는 소리가 귀를 울리는 가운데, 나는 마차의 창 너머로 어지러이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차는 크라우저의 저택을 향하고 있었다.
알트람의 저택 또한 크라우저 공작령에 있어 걸어가도 될 정도였으나, 굳이 마차를 탄 이유는 간단했다. 그저 빠르기 때문이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나와 마주한 체스는 오늘 할 일, 더 나아가 앞으로 할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애초에 헬레나의 몸종 역할을 할 뿐이기에 거창한 것은 없었다. 그저 곁을 지키다 부르면 부르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 끝날 일이었다.
“ 참 크네요. ”
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얼빠진 소리를 냈다. 공작의 저택이 커다란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 후후.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너도 아직은 아이로구나. ”
뒤따라 마차에서 내린 체스는 내 등을 두드리며 피식 웃었다. 나이 여덟이면 빼도박도 못하는 아이 아니었던가?
나는 그 의문을 입에 담으며 체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고 싶었지만, 어서 오라는 듯 활짝 열리는 철창 대문 때문에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크라우저라는 거대한 덩치를 원활히 돌리도록 돕는 하인들의 아침은 늘 빨랐기 때문이다.
저택의 홀을 비롯한 각 방의 청소는 물론, 시트의 세탁이나 옷의 정비 등. 할 일은 늘 많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헬레나의 시종만 들면 되는 나로서는 감사하기 짝이 없었다.
“ 체스 님, 어서 오십시오. ”
조용히 저택 뒷문으로 발을 들이자, 연미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내가 알기론 이 집의 집사이자 하인들을 총괄하는 남자였다. 헬레나의 생일파티마다 보았던 얼굴이기에 기억이 났다.
“ 음. 자네도 고생이 많군. 어제는 별 일 없었는가? ”
“ 예. 다행히 어제도 평화로웠습니다. ”
“ 그것 참 다행이로군. 아, 여기는 내 아들 지온일세. 오늘부터 헬레나 님의 시종을 들게 하려고 데려왔네. ”
“ 아~. 어제 말씀하셨던 아드님이셨군요? ”
집사는 허허 소리를 내며 사람 좋게 웃더니, 나를 향해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자작의 아들에게 건넨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겸손함이 느껴지는 인사였다.
“ 허허. 이곳에서는 처음 뵙는군요? 정식으로 다시 소개를 올리겠습니다. 집사 앤디라고 합니다. ”
본래 귀족의 고개는 빳빳하다. 한낱 자작이라고 해도 자존심만큼은 공작 뺨치는 수준이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원래부터 고개가 빳빳한 사람은 아니었다. 태생부터 그러했고, 죽고 나서 힙노스의 시종 노릇을 하면서도 그랬다.
더해, 이곳 하인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교육을 받기도 했었다.
고로,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최대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 지온 알트람입니다. 제가 부족한 점이 많아 답답하실 때가 많으시겠지만, 부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 이런, 이런. 체스 님의 아드님이 부족하다면 여러 귀족 자제분들은 피눈물을 흘려야겠군요. ”
앤디는 나를 지나치게 띄워주며 껄껄 웃어댔다.
은근히 조숙한 것을 천재적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혹시 이 집사도 그런 부류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보았다.
“ 그런데, 정말 알트람의 자제분께 하인들이 입는 옷을 입혀도 되는 겁니까? 최소한 연미복 한 벌이라도 마련하는 것이……. ”
부드럽고 느긋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이 집사는 문득 내 옷차림을 보며 안타까운 듯이 중얼거렸다.
새 옷이기에 깨끗하기는 했으나 이곳 하인들과 똑같은 양식의, 말 그대로 하인들이 입는 옷이었던 탓이다.
아무리 크라우저를 모시는 인간들이라고는 하나 알트람은 엄연한 귀족. 그렇기에 저런 물음이 본능적으로 튀어나왔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 걱정 말게. 앝트람이 귀족이라고는 하나, 그 이전에 같은 주인을 모시는 동료가 아닌가? 내가 교육을 시켰다고는 하나 처음부터 일을 배우며 성장하는 중에 실수도 하겠지. 또, 하인의 복장을 입겠다 말한 것은 전적으로 지온의 의지일세. ”
“ 예…? 아드님께서 직접? ”
내가 직접 하인과 같은 옷을 입길 자처했다는 소리를 듣자, 앤디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하긴, 그 체스조차도 몹시 놀랐었던 것이 바로 어제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할 수 있을 반응이었다.
“ 네. 제가 직접 아버지께 부탁드렸습니다. 비록 제가 알트람의 인간이기는 하나 일을 직접 해 보는 것은 처음인데다, 하물며 저는 아이입니다. 어울리지도 않는 연미복 따위 보다는 이곳에서 일하는 분들과 같은 옷을 입는 것이 속도 편할 것 같고요. ”
아이에게 좋은 옷을 입혀주고자 하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땅꼬마 같은 놈이 고급 연미복을 입고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생각하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그래서 깔끔하면서도 품이 넉넉한 하인의 복장을 입기로 결정했다.
“ 정말… 지온 님은 보통 아이와는 생각이 다르시군요. 이것이 알트람의 핏줄이라는 걸까요? ”
“ 허허, 거 너무 과장된 칭찬일세. 지나치게 받들어주지는 말게나. ”
체스는 앤디가 감격하여 내뱉은 말을 짐짓 엄격하게 받아쳤으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자기 자식이 칭찬받으니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그야말로 팔불출이 따로 없었다.
“ 아, 저기… 일은 지금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
“ 게다가 의욕까지 넘치시는군요. 좋습니다. 올라가 보시죠. ”
칭찬이 좋은 것이기는 하나 지나치면 낯이 뜨거워진다. 그래서 집사의 허락을 맡은 뒤 곧장 헬레나의 방으로 올랐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들르는 정도지만 대략적인 구조는 파악하고 있다. 안내는 필요 없었다.
나는 헬레나가 있을 방문 앞에 멈춰 서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을 지켰다.
크라우저 일가는 각 구성원마다 전속 하인 한 명을 배치해 두었는데, 이런 식으로 기다렸다 신속하게 불러내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귀족들도 똑같이 시행하는 일 중 하나였다.
다만 크라우저의 경우 당번 주기가 널널했던지라 일하기가 다른 귀족들보다 훨씬 편했다.
“ …거기, 누구 있나요? ”
대략 문 앞에서 대기한 지 삼십 분 정도 흘렀을까. 안쪽에서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헬레나의 목소리였다.
“ 네. 헬레나 님. 대기하고 있습니다. ”
“ 저어, 그럼 미안하지만 물을……. ”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끊어버리더니, 갑자기 안쪽에서 분주한 소리를 냈다.
쿠당탕, 하고 자주 허둥대는 사람들이 내지를 법한 요란한 소리였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으나, 순간적으로 벌컥 열린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무척이나 가벼운 차림을 한 헬레나가 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채 입술을 파르르 떨기까지 했다.
내가 이 시간에 여기 서 있던 것이 놀라웠을 지도 모르겠다.
“ 지, 지온…? 정말 지온인가요? ”
“ 네. 헬레나 님. 이런 아침부터 뵙는 건 처음이죠? ”
“ 그야… 처음이긴 하지만……. ”
헬레나는 여전히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 목소리를 더듬었다.
그에 따라 열여섯답지 않은 가슴팍의 융기가 부르르 떨렸다. 키도 보통 남자 수준 이상으로 자라나 완연한 성인 여성 같은 모습이었다.
나로서는 저렇게 굴곡이 심한 몸을 하고서도 왕국 제일의 기사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 아, 아무튼! 그게 아니라, 지온이 왜 여기에 있는 건가요? ”
“ 오늘부터 헬레나 님의 시종을 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거죠. ”
“ 시, 시종?! 지온이, 저의 시종을…? ”
아무리 알트람이라 하더라도 여덟 살 아이를 일에 투입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열다섯 정도는 되어야 바깥일을 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아이의 몸은 작고 가늘기에 일을 시키기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은 노예나 고아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움직인다고는 하는데, 알트람의 경우엔 그것도 아니다.
비록 영지가 없다고는 하나 지금도 계속되는 사업이 있어 돈에 쪼달리는 인생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아이의 몸으로 일을 하게 된 것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순전히 내 의지다.
헬레나의 멘탈은 스무 살 전후로 완전히 박살이 나기에 미리부터 보살펴 주어야겠다고 판단해서다.
다만 알트람 가에 자주 들르게 된 그녀는 최근 정신적으로도 건강해 보였기에, 너무 지나친 걱정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 네. 다만, 혹시라도 불만이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세요. 이전의 시종이 더 편하시다면 저는 그 분을 보좌하는 방향으로……. ”
“ 아, 아뇨! 불만 없어요! 오히려 자주 볼 수 있을 것 같아 기쁘네요! ”
“ 아… 예. 그것 참 다행이네요. ”
헬레나는 평소 침착한 태도를 어디다 버렸는지 무척 허둥댔으나, 얼굴에 감도는 화색을 보니 기뻐하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훌륭한 영애이자 기사로 있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나에게 털어놓는 사람이었으니 본심을 숨기는 것은 아니리라.
아무튼, 주인의 허가는 얻은 셈이니 본격적으로 내 일을 시작할 차례다.
그 첫걸음으로 이 칠칠맞은 아가씨의 옷차림을 손보아야지.
“ 그럼, 우선 경장으로 갈아입도록 할까요? 잠옷 차림으로 식사를 하실 순 없잖아요. ”
“ …아. ”
헬레나는 내가 지적하고 나서야 자기 옷차림이 어떤지를 확인하고 얼굴을 붉혔다.
내가 생물학적 남자이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어린아이.
그렇기에 이성으로 의식하느냐에 관한 문제는 없어 보였고, 단지 저렇게 허술한 차림으로 나온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다인 것으로 보였다.
“ 아, 으음……. 네. 그러네요. ”
“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
대부분의 귀족은 옷을 갈아입는 데에도 시종의 도움을 받는다.
헬레나도 그 예외가 아니었기에 자연스레 도움을 받았을 것이 분명했고, 이제는 내가 그 역할을 할 차례였다.
다행히 나는 여성의 옷을 갈아입히는 데는 도가 텄다. 알트람의 여성 하인 하나를 제물로 옷 갈아입히기 연습을 꾸준히 해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어떤 복잡한 드레스라도 척척 입힐 수 있었다.
그래서 헬레나를 방에 들어가도록 손짓했지만, 그녀는 문 앞에 멈춰선 채 우물쭈물 거렸다. 뭔가 걸리는 것이 있나 싶어 주위를 살폈지만 텅텅 비어 있었다.
그에, 나는 헬레나를 조심스레 채근하며 방에 들어가도록 유도했다.
“ 헬레나 님? 얼른 들어가셔야죠. 이대로 밖을 돌아다니면 공작님께서 좋게 보시지 않을 겁니다. ”
“ 크, 크흠! 그래요. 이대로 있을 수는 없겠지요. 좋아요. 각오는 되었습니다. 가죠! ”
그녀는 마치 전쟁을 치르는 사람마냥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등을 돌렸다.
옷 하나 갈아입는 데 너무 요란한 반응이 아닐까 싶었다. 아니면, 어린애라도 남자는 남자라는 것일까.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그저, 왠지 모르게 동정심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곳의 장남이자 헬레나의 동생 케인은 일방적으로 헬레나를 증오하는 놈이기 때문이다.
그런 놈을 동생으로 두었으니, 가족으로서 정을 쌓을 기회도 없었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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