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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기둥서방이 되었다-5화 (5/192)

〈 5화 〉 응애부터 시종까지 #4

* * *

“ 허억, 허억…! ”

알트람 저택의 뒷마당 연무장. 나는 이곳에서 숨을 헐떡이며 가빠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일반 상식. 귀족 관계도. 시종으로서의 일. 그리고 유사시를 대비한 육체 훈련에 이르기까지, 여러모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공작을 모시려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공부를 안 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잘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교육을 받을 때에는 걱정도 많았으나, 다행히 아이 특유의 흡수력 덕분에 방대한 내용을 어찌어찌 소화할 수는 있었다.

“ 음. 힘들면 좀 쉬자꾸나. ”

나의 교관이자 지온 알트람의 친아버지, 체스는 가슴팍까지 들어 올린 주먹을 내리며 휴식을 선언했다.

유사시에 크라우저 가의 사람을 지킬 수 있을 한 수가 필요하다는 명분 아래 나를 굴린지 거의 3년은 된 듯싶다.

“ 예. 감사, 합니다……. ”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육탄전 기술은 둘째 치더라도 암살자나 쓸 법한 비도술까지 익히는 탓에 온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더구나 아이의 몸이기도 한 탓에 지치는 속도도 남달랐다.

그래도, 그나마 버틸 만한 수준인 것은 체스가 적당히 가감을 해 주기 때문이었다. 아마 아들이기에 신경을 써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 지온. 너도 벌써 여덟 살이 되었구나. ”

뽀송뽀송한 체스는 다소 뜬금없이 나와 마주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 또한 훈련복을 입고 있기에 더러워져도 별 상관은 없을 테지만, 땅바닥에 쉬이 앉는 것은 일반적인 귀족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행동이었다.

하긴, 이 남자는 내가 아기 시절부터 지금껏 부부의 육체관계를 계속 이어나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아도 늘 허파에 바람을 넣고 다니는 일반 귀족과는 선을 달리하는 것이 분명했다.

“ 네. 그렇긴 한데, 갑자기 제 나이는 왜…? ”

“ 크흠. 본래라면 네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시기상조일 것이 분명하겠지. 그래서 네가 더 자라고 나면 이야기를 꺼내려 했으나… 너는 내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조숙하고, 성장이 빠르구나. ”

조숙이라. 나는 그 말을 지극히 당연하다 생각했다.

애초에 나이 좀 먹은 놈이 환생한 채 기억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 그것 참 부끄럽네요. ”

그에 나는 적당히 겸양을 떨었고, 체스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입가에 희미한 호선이 걸린 것을 보니 내 태도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 부끄러워 할 건 아니지 않느냐. 어찌 되었던, 그런 너를 보고 한 가지 물을 것이 있다. ”

“ 말씀하시죠. ”

“ 너는 우리 알트람의 전통대로, 크라우저 공작가를 모실 의향이 있느냐? ”

드디어 이 물음이 왔다.

나는 여태까지의 교양과 훈련이 모두 크라우저를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체스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한 마디도 꺼낸 적이 없었다. 그저 크라우저의 관대함과 위대함을 설파했을 뿐, 강요하는 기색이 전혀 느껴지질 않았었다.

그것은, 아마 나의 자유의지를 존중했기에 가능했던 행동이라 생각했다.

체스의 자식사랑은 그의 충성심과 비견될 만큼 지극했기에 여태껏 침묵을 지켜 온 것이겠지.

그러나, 그는 지금 내게 크라우저를 섬길 것인지 묻고 있었다.내가 그 무게를 충분히 이해할 것이라 생각해서 말을 꺼낸 것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어린 아이에게 조숙하다는 말로 칭찬을 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 공작가를 모시는 것이 저희 알트람의 역할이었죠? ”

“ 그래. 벌써 300년이 넘었다. 좀 더 높은 작위를 받을 기회가 있음에도 거절하고, 지금도 자작으로 남아 크라우저 공작가를 지지하고 있지. 나의 선친이 그러했으며, 나 또한 그렇게 하고 있는 중이다. 허나, 그 모든 것은 나를 포함한 그분들이 스스로 택한 길이야. 결코 강요는 없었다. ”

강요는 없었다. 그 말은 즉 크라우저가 알트람의 충성을 확실히 살 기량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도 대를 이어 자신들을 섬기게 할 만큼 뛰어난 기량이었다.

“ 지금의 공작님도, 그리고 미래의 공작님이 될 헬레나 님도 훌륭한 분이시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분에 넘치는 영광이지. ”

알트람의 충성심은 나도 잘 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열을 올리는 것을 보니그야말로 광신도가 따로 없었다.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떨떠름한 투로 답하고 말았다.

“ 아, 예에……. ”

“ 아무튼, 지온 너도 사리 판단을 충분히 할 수 있다 생각하기에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결단을 너무 빠른 시기에 강요하는 것 같아 찝찝하기는 하다만… 크라우저 님을 섬길지 아닐지를 잘 판단해다오. ”

판단이라.

선택권을 내게 주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나, 이미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여기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면 환생할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세계가 망하던 말든 상관없이 이곳의 삶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르나, 그 경우 세계가 개박살이 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즐기려 해도 즐길 수 없는 상황이 찾아오게 된다. 그러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이 평화를 유지하는 정답이었다.

“ 아버지. 저는 이미 결심했습니다. 크라우저 공작가를 섬기기로요. ”

“ 뭣?! 정말이냐! ”

은근히 크라우저를 섬기길 기대했던 체스였음에도, 내가 고민하는 기색 하나 없이 답을 던지자 몹시 당황해하고 있었다.

내 사정을 하나도 모르는지라 저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 네. 정말입니다. 예전부터 생각해 오던 일이었으니까요. ”

“ 으음……. 그랬구나. 혹시 헬레나 님 때문이냐? ”

“ 부정은 않겠습니다. ”

헬레나는 내가 아기였을 무렵부터 여유가 있을 때 마다 알트람 일가에 들렀다.

오로지 나를 만나기 위함이 그 이유로, 겉으로는 아기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비춰졌을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도 그랬다.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검을 다루는 데 능숙해지고, 교양을 갈고 닦으며 점점 틈이 없어지는 인간이다.

그런 인간이 아기를 보러 다니는 모습은 퍽 귀여운 틈으로, 더 나아가 그 나이에 맞는 인간미라는 것을 느끼게 했으리라.

그러나, 단지 그 이유만으로 이곳에 자주 들르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 자신에게 쏟아지는 무수한 관심을 한 순간이라도 잊기 위한다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헬레나 님은 참 장해요.

그 때가 아마 다섯 살 무렵이던가.

나는 천진난만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헬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달래주었던 일을 떠올렸다.

내가 말을 이해할 나이에 이르자 혼잣말로 토해내던 푸념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한참 귀족의 머리를 쓰다듬는다는, 경우에 따라서는 귀족을 능멸한 죄로 사형에 처해져도 할 말이 없을 행위에도 확신이 있었다.

헬레나가 병들기 쉬운 성격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저지른 계산이었다.

그리고, 그 행동과 말의 효과는 아주 뛰어났다.

헬레나가 무릎 꿇은 채 나를 꼭 껴안으며 소리를 억누르며 끅끅댔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 이후로 헬레나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고, 병들기 쉬운 성격도 점점 나아지는 듯 보였다.

행동 하나하나에 여유가 느껴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던가. 참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병든 헬레나는 대륙 전체를 화약고에 던져버리는 폭탄이니까.

“ 그래… 크라우저보다 헬레나 님을 위해서라. 그것도 좋겠지. ”

그런데, 이 남자는 뭔가 크게 착각했는지 저 혼자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맥락을 보니 내가 헬레나를 좋아해서 모시고 싶다 생각한 것 같았다.

정정해 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생각하길 잠시.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음 편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착각해도 좋을 듯 싶었고, 착각을 정정하느라 진이 빠지는 것 보다 훨씬 낫기도 했다.

즉, 굳이 벌집을 쑤실 필요가 없다 이 말이다.

“ 좋다. 네 의견을 공작님과 헬레나 님께 전해드리마. ”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체스는 결연한 의지가 엿보이는 눈빛을 띄며 뒷마당을 벗어났다. 거 너무 급한 거 아니오?

◎◎◎

“ …흐음. 그렇군. 자네의 아들 또한 큰 결심을 해 주었군. 그것도 어린 나이에 말일세. ”

전체적으로 붉고 검은 톤에, 호화로우나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가구로 꾸며진 집무실.

그곳의 주인이자 이 영지의 주인이기도 한 남자, 이스 크라우저 공작은 멋들어진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체스의 보고를 받았다.

여덟이라는 어린 나이에 스스로 공작가를 모시겠다고 자청한 아이의 소식은, 그에게 어린 시절의 헬레나를 떠올리게 했다.

헬레나는 우아하면서도 상냥했으며, 검에 대한 재능이 뛰어난 무골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왕국의 군단을 이끄는 크라우저 공작가의 그릇에 어울리는 인간이었다. 비록 여자일지언정 그 재능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아니, 날이 갈수록 날카로움을 더해가고 있었다.

공작 자신이 헬레나를 당해내지 못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으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다 어느 순간부터 날카로움뿐만이 아닌, 부드러움이 녹아든 검을 휘두르고 있어 가히 철벽과도 같았다.

이 상태라면 대륙에 몇 없는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들이는 것도 요원한 일이 아닐 것이라고, 공작은 확신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체스의 아들이 관여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 아이를 남몰래 끌어들이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다.

알트람의 핏줄은 그 무엇보다 확실한 보증수표다.

능력은 둘째 치더라도, 대를 이은 충성심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얻기가 어렵다는 것을 공작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스는 소년의 결심을 기꺼워했으나, 한 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어리다고는 하나 헬레나를 떠올릴 만큼 조숙함을 갖춘 소년이 바로 지온이다.

그런 아이가 굳게 결심했다면, 아마 공작 자신의 여식에게 반했다는 이유도 들어가 있으리라 생각한 탓이다.

다만 그 생각은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지온이 들었다면 내심 어이가 없다며 콧방구를 뀌었으리라. 헬레나를 신경 쓰는 것은 맞았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공작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고민이기도 했다.

헬레나의 강함이 날이 갈수록 단단해 지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에 비례하듯 풍만하고 여성스러운 곡선을 갖추고 있었다.

즉, 남자라면 반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의 아름다움이라고 공작은 자신했다.

“ 흐음. 그렇다 해도 곧장 자네와 같은 일을 시키는 건 어렵겠지. 아직 자네가 은퇴할 시기가 아니기도 하니, 우선은 헬레나의 시종을 시켜 천천히 익숙해지도록 하게. 아직 한참 어린아이이지 않은가? ”

“ 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곧장 헬레나 님께도 보고를 할까요? ”

“ 음. 그리 해 주게. ”

그럼에도, 공작은 지온에게 헬레나의 시종을 들도록 허락했다.

걱정은 걱정이고, 알트람 가를 거닐며 없던 여유가 생겼다는 것을 공작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헬레나가 그 여유를 더없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명령을 내렸고, 체스는 그에 기끼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집무실을 나섰다.

“ 흐음──. ”

홀로 남은 이스는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고민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내린 결론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비로서 딸에게 꼬리치는 인간이 있을까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지만그것을 핑계 삼아 딸을 억압할 수는 없었던 탓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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