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응애부터 시종까지 #2
* * *
“ 하아──. ”
달빛이 환히 들어오는 유리창. 자그맣게 열린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에 날려 하늘거리는 레이스 커튼.
그리고 그 너머에는 한 소녀가 창문턱에 기댄 채 달을 바라보며 길게 한숨 쉬고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헬레나 크라우저.
내일부로 아홉 살 생일을 맞이하며, 장차 크라우저 공작가의 적통을 이을 소녀였다.
거기다 가문 비전의 검술을 빠르게 소화하여 무재에 축복받았음을 알린 기재이기도 했다.
그런 헬레나의 앞날은 가히 창창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으나, 정작 장본인은 그 모든 것을 갑갑한 족쇄로 느끼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재능이 드러났고, 그로 인해 공작가의 적통을 이을 여자라 점 찍히는 상황.
능력주의를 표방하는 크라우저 공작가이기에 가능한 행보는 공평한 기회를 부여했으나, 오히려 그 공평함이 헬레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조금쯤은 들뜰 만 했음에도 그런 기색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차라리 성질 나쁜 동생이 공작가를 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헬레나는 내일 있을 파티를 그저 무사히 넘기기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파티 당일.
“ 오늘, 부족한 저를 축하해 주기 위해 바쁜 와중에도 이곳에 모여주신 내빈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크라우저의 피를 잇는다고는 하나 저는 아직 갈 길이 먼 아이입니다. 그럼에도 과분한 칭찬들을 주시는 것에 부끄러우면서도 기쁜 마음으로……. ”
헬레나는 부담감에 짓눌리는 내심과는 다르게 겉으로는 누구보다 훌륭한 레이디의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의 수준을 진즉 뛰어넘은 교양과 부드러운 말솜씨는 가히 성인들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검의 재능과 공작가의 영애로서 부족함 없는 예의. 상대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듯한 말솜씨까지. 이곳에 모인 귀족들은 헬레나의 그 모습을 입을 모아 칭찬하기 바빴다.
“ 정말 의젓하시군요. 어린아이임에도 불구하고 저런 모습이라니……. ”
“ 하하. 헬레나 영애를 보면 크라우저 공작가의 미래가 정말 구름 한 점 없이 맑아 보입니다. ”
“ 정말…! 제게는 너무 과한 칭찬이세요. ”
그럼에도 선물이나 칭찬을 받으면 제대로 아이처럼 기뻐하거나 쑥스러워하는 기색을 드러낸다.
덕분에 헬레나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중이었다. 그녀의 부모에게나, 손님들에게나.
다만 그녀의 남동생만큼은 그 모습을 시기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나, 극히 사소한 일이었을 뿐이다.
“ 헬레나 님. 마실 것을 더 드릴까요? ”
“ 아뇨. 괜찮아요. 바쁘신 와중에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
거기다 잡일을 하는 시종들에게마저 배려를 잊지 않으니, 그야말로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상냥한 공주님이었다.
“ 헬레나 님, 괜찮으십니까? ”
그렇게 파티가 한창 무르익어 주역에게 향하는 시선의 농도가 옅어질 무렵, 오늘 파티의 총괄 업무를 담당하던 체스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다가왔다.
이런 종류의 파티는 사실상 귀족들의 사교장과 같기에, 서로 안면을 트고 친목을 다지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지금 헬레나가 누리는 휴식시간은 그러한 빈틈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 아, 체스 님. 바쁘신 와중에 저에게까지 신경을 다 써 주시고……. ”
“ 헬레나 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가 아닙니까? 그 주역에 신경을 기울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요. ”
그 명분이 어찌되었던 귀족의 파티가 인맥전으로 흘러간다는 것은 체스도 잘 안다.
변변한 영지도, 사교 파티를 꾸릴 필요도 없는 귀족인 체스라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그렇다 해도… 아니, 그렇기에 체스는 오로지 오늘의 주역이자 명분이기도 한 헬레나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현 공작가의 영애이자, 멀지 않은 미래에 그의 아들 지온이 모실 지도 모르는 여성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알트람 일가의 인간에게 친근감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앞서는 감정이 바로 크라우저가에 대한 충성심이었다.
“ 그리고, 파티 운영이라면 괜찮습니다. 이미 여러 귀족 분들께선 각자의 일로 환담을 나누고 계시고, 이쯤 되면 제 지시를 받은 하인들만으로도 충분히 꾸려갈 수 있습니다. 간단한 보조와 마중, 뒷정리만이 남은 상황이니까요. ”
“ 아… 역시 자작님이세요. 빈틈이 없으시군요. ”
헬레나는 체스의 충성심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순순히 받아들였다. 알트람 자작가가 대를 이어 크라우저 공작 가문에 충성해 왔기에, 남다른 친근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짓눌렸던 마음이 조금은 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여유를 갖고 한 구석에서 쉬고 있을 무렵, 헬레나는 앗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 아 참. 그러고 보니 득남을 한지 벌 써 일 년이 되셨다고 하셨죠? 변변한 선물이나 축하의 말 하나 드리지 못한 것에 사과를 드리고 싶어요. ”
“ 무슨, 그런 말씀을. 헬레나 님께서 알고 계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영광스럽습니다. ”
이 세계는 태어난 아이의 나이를 0살부터 따진다. 흔히들 알고 있는 만 나이 계산법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면, 지온은 이 세계에서 1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셈이다.
헬레나는 부담감과 자기 일에 치여 사느라 잊고 있었던 이제야 떠올리며 반성했다.
그 누구도 아닌 충신의 가문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신경 쓰지 못한 것은 엄연한 부덕이라 생각한 탓이다.
“ 헬레나 님.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제 아들의 탄생을 알고 계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영광스러운 일이니까요. ”
체스는 그 기색을 잃고 심심한 위로를 건넸지만, 헬레나의 마음에 닿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위로에 감사하다며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긴 했으나 억지로 꾸며낸 미소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
체스가 그렇게 고민하는 와중, 문득 자신의 아들 지온이 떠올랐다. 무언가를 할 수는 없을 테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치유하는 무언가가 아기에게는 있다.
그는 그것에 걸어보기로 마음먹었다.
“ 저, 헬레나 님. ”
“ 네. 무슨 일이신가요? ”
“ 혹시 괜찮으시다면, 내일 제 아들을 보러 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바람도 쐴 겸. ”
“ 자작님의 아들을…? ”
공작 영애에게 직접 발걸음을 옮기라는 것은 다소 무례한 부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선을 지키는 은근한 권유가 된다면, 하물며 그 말을 꺼낸 것이 충신의 일가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짧게나마 바깥바람이라도 쐬라는 것일까.
헬레나는 자신의 저택과 가까운 알트람의 집을 떠올리다,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소녀에게도 동생이 있으나, 고작 한 살이라는 터울이었던 탓에 아기를 직접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아도 이번 외유는 나쁘지 않을 것 같다며,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
“ 응애. ”
아기 생활을 한 지 일 년.
부족할 것 없는 생활이나 불편 아닌 불편이 있다면 똥오줌을 제대로 못 가린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고는 하나 창피스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좀 더 뻔뻔스러운 마음을 가져보자 마음먹어보지만, 아랫도리를 깔 때마다 그런 결심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 짓을 일 년이나 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 정말. 우리 지온은 누굴 닮아 이렇게 얌전한 걸까? ”
몸을 깨끗이 하고 새 기저귀로 갈아입고 나자, 리나는 나를 두 팔로 껴안으며 눈을 반짝였다.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른다는 표정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아낀다고 하는데, 이 여성의 모성애는 그 수준마저 뛰어넘고 있었다.
뭐, 아끼는 것도 이해는 간다.
두 사람이 나를 재워둔 채 격렬한 정사에 빠져드는 것도 얌전히 넘어가고, 갑자기 급똥이 마려운 것이 아닌 이상 밤에 울지도 않았다.
육아 초기에 시도 때도 없이 우는 아이 때문에 겪는 수면 부족이 없으니 대견할 만도 했다.
울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칭찬을 받는다.
그야말로 날로 먹는 칭찬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세계의 아기들이 말을 이해할 수 있다면, 밤에만 조용히 있어보길 권장하고 싶다.
“ 마님. 주인어른께서 오셨습니다. ”
“ 어머.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알았어요. 곧 내려가죠. ”
리나나 체스는 하인들에게도 말을 높여준다. 오만하게 명령을 내리는 일반 귀족들과는 일선을 달리하는 태도였다.
아마 이 팔불출 부모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모시는 입장이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제법 큰 공감대이기도 하고.
“ 자. 우리 지온은 여기서 잠깐만, 얌전히 기다리렴. 알았지? ”
“ 응애. ”
차마 응, 이라고 대답하기는 그래서 응애 소리로 대신했다.
맘마를 조를 때도 응애 소리를 내고, 똥을 치워달라 할 때도 응애 소리를 낸다. 응애란, 그야말로 최고 수준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마법의 단어였다.
“ 하아……. ”
아기용 침대가 놓인 부부의 침실엔 아무도 없다. 그저 천장을 바라보며 한숨 쉬는 내가 있을 뿐이었다.
한 살 아기의 몸으로 한숨을 쉬며 침대를 구르는 풍경은 기괴하기 짝이 없겠지만, 아무도 없으니 뭐 어떤가. 오히려 이럴 때야 말로 여유를 만끽하며 긴장을 풀어줘야만 했다.
일단, 지금의 나는 응애 역할에 충실하게 임하고 있으니까.
─이… 방인가요? 체스 님과 리나 님의 침실이기도 한 것 같은데… 저 혼자 들어가는 건 무례가 아닐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 얼른 들어가시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응? 밖에서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낯선 소녀 홀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대화 내용을 들어보니 혼자 들어오는 건 이해가 가지만, 이 저택에서 그럴 만한 인간이 있었던가.
아니, 단연코 없다 단언할 수 있었다.
“ 후아! ”
단정하면서도 길고 검은 머리칼에 황금의 눈동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완벽한 조형의 소녀의 모습을 보고, 나는 무심코 헛바람을 삼키고 말았다.
늘 맘마를 주는 리나도 예쁘긴 하지만, 저 소녀의 장래는 그것을 월등히 뛰어넘으리라 확신했다.
“ 네가… 지온 알트람이구나. ”
소녀는 아기용 침대 틀에 몸을 기대,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내 이름을 아는 걸 보니 부모님이 미리 알려준 것 같았다. 이 저택에 들어온 것도 그렇고, 체스에게 정중하게 대우받는 것도 그렇고… 상당히 높은 사람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던 내 귓가에, 아주 충격적인 이름이 바늘처럼 푹 박혀들었다.
“ 나는 헬레나라고 해. 헬레나 크라우저. ”
오… 시발.
저 소녀는 부담감에 약한 주제에 행동은 또 완벽하고, 그로 인해 멘탈 바사삭 튀김이 되는 그 헬레나 크라우저였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검으로 마스터를 찍는 극한의 재능충, 최강의 여자.
그리고, 그 위험성으로 인해 최우선 공략대상으로 지정된 여자다.
본래라면 이 갑작스러운 만남에 놀라 호들갑을 떨 만도 했으나, 내 마음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언제 어디서나 정의를 위해 싸우는 남자를 위한 강철멘탈 때문이었다.
그런 여자와 갑자기 이렇게 마주하게 되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지만, 일단 반갑게 인사나 해 보자.
“ 아우! ”
남자와 남자의 인사엔 손을 마주잡는 것도 흔하다. 다만 팔이 짧아 그런지 뻗어도 닿질 않는다.
그래서 두 팔을 벌린 채 옹알이를 해대자, 헬레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술을 떨었다.
성품 자체는 나쁘지 않다 들었으니 화가 난 것은 아닌 듯싶었다. 애초에 아기를 보고 화를 낼 것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 아, 저기… 이럴 땐, 그……. ”
아기를 다루는 것은 처음이라는 듯, 헬레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당황해했다.
그러다 침대 턱에 기대던 한 손을 조심스럽게 쭉 뻗어 내 앞으로 내밀었는데, 마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은 손짓이었다.
본래라면 안아달라는 의미로 알아들었을 텐데, 그냥 손을 내미는 걸 보니 의외로 소심한 구석이 있는 것일까.
아무튼, 내민 손을 가만히 놔두는 것도 무안하겠지. 나는 그것을 막고자 소녀의 손을 꼭 잡으며 가볍게 흔들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라 손가락 하나를 양 손으로 쥐고 흔드는 꼴이었다.
“ 아, 아아…! ”
그러자, 헬레나의 입술에선 환희에 넘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니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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