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지저왕(2)
"선물이라고?"
"그래, 아마 너라면 알고있겠지? 베누스가 단순한 갈색 사막 뱀에서 나가 여왕으로 진화한 사실을.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이것이 있다는 것도 말이야."
"그, 그것은!"
마틴이 허공에 생성시킨 알약을 본 테트의 눈이 크게 치켜떠졌다.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는 하나의 알약.
색깔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것은 한정우가 베누스에게 먹였던 빨간색 알약과는 다른 효과를 가지고 있다.
농축도를 최대로 끌어올렸기에 빨간색 알약에 비해 좀 더 상향된 효과를 볼 수 있으며, 시나리오 3를 여는 열쇠의 역할을 하고 있는 봉혼석의 진행 속도 또한 빠르게 촉구시킬 수 있게 개조되어 있는 상태이기도 했다.
물론 이것을 사용하게 된다면 AI유실에게서 제재를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단순히 30일의 제재를 받았던 한정우보다도 강력한 제한이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어차피 상관 없다.
알약은 운영자의 권한중 하나이기에 제 아무리 AI유실이라고 하더라도 저지할 방향이 없다.
이후부터 더 리셋 월드에 전혀 영향세를 끼칠 수 없겠지만 시나리오 3만 발생시키면 되었기에 마틴이 원하는 바는 충분히 이룰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다. 그것이 독이 아니라는 보장이 어디에 있다는 것이지?"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은 너의 자유야. 다만, 빠르게 결정을 내리는게 좋을 걸? 이 알약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거든."
빠른 성장과 진화까지 넘볼 수 있는 알약.
성장에 목 매는 몬스터의 입장으로서는 쉽게 포기할 수가 없는 종류의 것이다.
'자, 어서 먹으라고 데이터 쪼가리.'
곧 있으면 이변을 눈치챈 AI유실이 들이닥칠 것이다.
입장상 붙잡히는 것은 곤란하다.
어차피 알약의 잔재가 남아있는 이상 자신이 저지른 일이라는 것은 들킬 수 밖에 없지만 붙잡히는 것과 붙잡히지 않는 것의 차이는 크다.
"결정은 너의 몫이다."
허공에 알약을 띄워놓은 상태로 마틴은 사라졌다.
[운영자의 선물 - 보라색 알약(?)]
- 운영자가 설치한 임의적인 장치입니다. 섭취시 상당한 능력치를 끌어올릴 수 있으며 종족의 변이 및 진화를 강제적으로 발생시킵니다. 담겨진 농축도가 상당한 상태입니다.
* ???
* ???
* ???
* ???
"운영자······그래, 베누스가 각성했었던 것도 이 단어와 분명히 관계가 있었지."
주시를 통해서 베누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볼 수 있었던 테트다.
한낱 네임드 몬스터에 불과했던 베누스는 이와 비슷했던 알약을 집어삼키고는 뱀이라는 종족의 한계를 초월하고 미스터리의 격을 갖춘 나가 여왕으로서 성장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미스터리의 격을 갖추고 있는 바질리스크인 자신이라면 어떤 변화를 거치게 될까?
- AI유실이 버그를 발견했습니다. 조속히 버그를 해결합니다. 5, 4, 3······.-
독촉하듯 들려오는 알림음에 테트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강해질 것이다."
위험할 수도 있지만 강해지고 싶은 욕구는 위험성을 찍어눌렀다.
뿌득- 뿌드드득-!
알약을 집어삼킨 테트의 몸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 @ @
(크론그릴스의 사막 생존비법 + 지하 도시 탐방)
100:1에 이은 백검과의 결전. 그리고 쵸우지 센세의 강화 교실의 뒤를 이어서 크론TV의 세 번째 영상이 마침내 옥튜브에 업로드 되었다.
길로틴젤로틴 : 뭐지 이 혼종은?
기미맹구 : 하, 159분? 이거 영상 시간 무엇?
오로이아 : 선댓글 후감상, 시작한다.
폭렬의 기아스 : 영상 편집하는 거 귀찮아서 통짜 영상으로 업로드한듯 ㅋㅋ
자그마치 2시간 39분에 이르는 영상 시간을 발견한 유저들은 혀를 차면서 악의가 담긴 댓글을 써내려갔다.
그도 그럴것이 영상의 상영 시간이 너무나도 길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옥튜브 영상들은 거의 10~20분의 단타 치기의 형태가 주류로 손꼽혔으며 길다고 느껴질만한 영상도 거의 30분을 넘어가는 경우가 적은 편에 속해있기 마련이었다.
크론 광팬 : 님들아, 이 영상 꼭 보세요. 진짜 대박입니다. 어제 봤었던 크론TV의 주옥같은 풀 영상의 중요 부분이 전부 나왔습니다!
크롱 : 영상 편집자님 짱! 저도 꾸벅꾸벅 졸면서 봤던 영상을 이렇게 까지 줄여서 편집하시다니, 편집 기술 칭찬해~
강태공 : 영화 본다는 느낌으로 감상하시면 좋을 듯요.
그래도 현재 더 리셋 월드에서 가장 논란과 이슈의 중심에 서 있는 유저 '크론'의 영상이었다는 흥행 보장과 방송을 통해서 풀 버전을 보고온 시청자들이 핏대를 세운 주장이 줄을 이었다.
어차피 영상을 본다고해서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었기에 옥튜브를 즐기는 이들은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영상을 클릭했다.
@ @ @
"역시 그 빌어먹을 테트 녀석의 짓거리였다는 것인가. 후우······혹시 인근에 또 다른 지저인은 없었던가?"
메던이 간절한 눈빛으로 답변을 기다렸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원하는 대답은 들려줄 수가 없다.
이제는 자신의 부하가 되어버린 행콕의 뱃속에서 소화과정이 끝마쳐진 상황이었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그 사실은 입이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할 수 없다.
"제가 살펴보았을 때에는 이미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그런가······."
절망스러운 표정을 짓는 메던의 모습을 보니 새삼 행콕을 끄집어내서 뱉어내라고 하고싶었지만 어쩌겠는가.
뱀이 두더지를 먹었다고 혼내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닐세. 그것이 자네의 잘못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우리들을 도와준 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울 따름이라네. 자네에 대한 보고는 내가 잘 처리해서 끝마친 상황이야. 준비해둔 안내원이 있으니, 그를 따라가도록 하게. 자네의 행보에 주목하신 것인지 지저왕께서 만남을 원하는 상황이라네."
"말씀에 감사합니다."
메던의 말에 답변하는 것과 동시에 크론이 기다렸던 알림음이 시끌벅적에게 울렸다.
- 퀘스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
- 무한의 뱀 테트가 당신에게 저주를 담아 주시합니다. 모든 스텟이 20감소합니다. -
- 보상으로 100,000골드와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 지저인들을 도왔다는 업적이 널리 퍼집니다. 명성이 500증가합니다. -
- 아포카에 존재하는 모든 지저인들과의 관계가 대체적으로 완화됩니다. -
- 아포카에 대한 입장이 가능해졌습니다. -
- 최초로 지저인와의 우호 관계를 쌓았습니다. 칭호 '지저인의 첫 친구(모든 스텟+2)'를 얻었습니다. -
- 레벨이 올랐습니다. 90레벨이 되셨습니다. -
"뭐라고?"
기분좋게 퀘스트 보상 내역을 확인하던 크론의 몸이 순간 흠칫거렸다.
테트의 주시가 단순히 시야를 침범당하는 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주로 인해서 능력치의 감소로까지 이어진다니?
그것도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니라 무려 모든 스텟이 20이나 감소한다.
어이가 없게도 이것의 지속시간에 대한 설명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테트를 저지하지 않는 이상 해제할 방법은 없다는 소리다.
아니, 그 전에 더욱 중요한 것은 본래 테트의 명칭이다.
분명히 초기의 테트의 명칭은 분명히 '메두사'였었다.
허나 지금은 무슨 변화를 거친 것인지는 몰라도 '무한의 뱀'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기까지 했다.
당최 어떻게 되먹은 일인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었다.
"친구여. 나를 따라오면 된다네."
"안내 잘 부탁할게."
머리 아프게 생각하는 것은 추후로 미룬 크론은 안내인의 뒤를 따라서 아포카로 발을 들였다.
- 최초로 아포카에 발을 들이셨습니다. 칭호 '아포카의 방문자(모든 스텟+3)'를 얻었습니다. -
- 모험가로서 최초로 새로운 마을에 진입하였습니다. 명성이 300증가합니다. -
'쏠쏠하군.'
최초로 지저인이 부여한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마을에 들어섬으로서 귀중한 칭호를 2개나 습득하게 되었다.
여기서 크론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는다면 아포카의 지배자인 지저왕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칭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리셋 이루벤에서도 제법 뿌려진 정보로서 최초로 영주나 촌장을 만난 이들이 자랑글로 띄웠으니 확실한 정보통이기도 하다.
'여유롭게 구경하고 싶은 마음도 있긴 하지만.'
신종족 지저인의 도시 아포카.
지하 도시의 특성상 다른 도시나 마을과의 교류가 없다보니 생활에 필요한 식량등은 마을 안에서 자급자족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런 신종족의 삶도 신기하긴 했지만 그보다 크론의 관심사는 단연 지저트론이었다.
보급형이라는 단어에서 예측했던 부분이기는 했지만 지저트론은 단순히 전투용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하수를 길러오거나 농사를 지을 때에도 지저트론의 존재는 확실히 지저인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대장장이의 본능이 절로 발동한 크론은 지저트론에 대한 지식만 손에 넣는다면 만들 수 있는 무구의 종류가 하나 추가 될 것이다.
'그건 그렇고 너무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크론이 지저인을 신기하게 보듯이 지저인들 역시 생전 처음보는 인간인 크론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다만 그 숫자가 상당했기에 크론은 몰려오는 부담스러운 눈빛에 시선을 거두었다.
"실례지만 속도를 조금 올릴 수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안내인의 허락 덕분에 크론은 발걸음에 속도를 붙였고, 다행스럽게도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굳혀진 흙으로 쌓아올려져 있는 거대한 건물.
가히 궁전이라고 칭해도 될 정도로 일반적인 지저인들의 건물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웅장함이 돋보였다.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이곳에 기거하고 있는 존재는 지저인들의 왕, 지저왕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터.
"이곳의 입장은 지저왕님의 허락을 받은 자만 가능합니다. 친구여, 지저왕과의 즐거운 담소를 나누도록 하십시오."
"안내 고마웠습니다."
어느정도 시간을 두고 만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바로 지저왕을 만날 수 있을 줄이야.
아마도 이 부분은 퀘스트의 난이도가 A+로 상승한 것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 부분이기도 했다.
코카트리스도 위험한 몬스터로 분류하는 지저인들에게 있어서 140레벨의 미스터리 몬스터였던 베누스는 거의 재앙이나 마찬가지였을테니까.
내심 장고의 몸에서 대기중인 행콕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을 지경이다.
"친구여. 지하 도시에 온 것을 환영하는 바이다."
- 최초로 아포카의 지저왕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칭호 '지저왕의 선구자(모든 스텟+6)'를 얻었습니다. -
- 한 종족을 다스리는 왕과 대화를 나눈 당신의 업적이 널리 퍼져나갑니다. 명성이 750증가합니다. -
역시 예상했던대로 떠오르는 알림음에 크론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머금어졌다.
하지만 지금 앞에있는 자는 지저인들을 다스리는 왕이다.
그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편이 앞으로의 행보에 도움이 되었기에 크론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지하 도시를 다스리는 왕이시여. 한낱 인간에 불과한 저를 불러주셔서 영광일 따름입니다."
"허허허, 그렇게까지 추켜세워줄 필요 없다네, 친구여. 부담가지지 말고 앉도록 하게나. 지금의 자리는 허울없이 서로의 소개를 원해서 만든 자리이니 말일세."
"베품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왕이면서도 강압적이지 않은 분위기는 크론의 마음에 들었다.
그렇지만 앞으로 말빨로 구슬리기에는 조금 공을 들일 필요성이 있다.
크론은 지저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지저트론에 대한 지식을 얻고 싶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존재인 지저왕을 통해서 얻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리라.
'어떻게든 정보를 얻는다.'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서 지저왕을 마주한 크론의 시야에 지저왕에 대한 정보가 띄워졌다.
[1성호의 지저왕 디그다 Lv.133(NPC) - 왕의 권위(부적합 대상), 길들인 몬스터 행콕의 여왕의 권위(적합대상)]
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