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장인의 품격(1)
젬의 동굴 앞에서 좌판을 깔고있는 상인 유저, 레이큰은 던전에 들어서는 유저를 상대로 물건을 매입 매각하면서 싱글벙글 웃음지었다.
전투력이 약한 대신 상인 직업군은 물건을 판매해서 얻는 이윤에 따라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는 특전이 존재한다.
"나도 언젠가는 무역을 하는 날이 오겠지."
무역.
그것은 모든 상인 유저들의 꿈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에 이른 상인들은 상단을 이끌고 대규모의 무역을 행사할 수 있다.
각 마을에는 상인만이 이용할 수 있는 교역소가 존재한다.
상인은 그곳에서 특산품을 구매하거나, 재료를 투자해서 직접 제작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
동시에 얻은 교역품은 먼 마을의 교역소로 최대한 빠르게 운송만 시킨다면 웬만한 수입을 뺨칠 수준으로 벌어들일 수도 있다.
물론 값진 물건인 만큼 다른이들의 표적 또한 되기 쉽다.
특산품은 얻거나 만드는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는데에 반해 빼앗는 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
방심해서 뒷통수가 깨지는 날에는 상당한 적자를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 무역이다.
그 덕분에 레이큰은 짐마차 정도는 운용할 수 있음에도 무역을 시도하지 않고 있다.
자신이 멍청이도 아니고 지켜줄 만한 엄호 세력도 없는데 무역을 시도할 턱이 없었다.
우우우웅-!
"오오, 왔구나 왔어!"
던전의 한 어귀에서 빛과 함께 자그마한 차원 포탈이 생성되었다.
동시에 그 앞으로 레이큰을 비롯한 상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던전을 공략하고 나온 이들은 대부분이 잡템과 재료템을 산더미처럼 얻게된다.
그러한 양을 상인이 한 번에 사들일 수만 있다면 상당량의 경험치와 스킬 숙련도는 당연히 뒤따라오게 된다.
또한 젬의 동굴은 밝혀진 던전들 중에서도 나름 까다롭기로 정평난 던전이다.
타 던전에 비해서 등장하는 몬스터들의 레벨은 낮은 편에 속하지만 함정과 보스의 시독 때문에 어느정도 해독 능력과 함정 해제 능력을 겸비한 유저가 필수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엌! 이게 대체 무슨 냄새야!"
"코가 썩을 것만 같아!"
"어, 어라······?"
빛나는 차원 포탈에서 풍겨오는 시큼한 냄새에 모두가 코를 부여잡으며 괴로워했다.
탈춤 추듯 난리블루스를 추던 상인들은 이어서 벌어지는 광경에 춤을 멈추고 두 눈을 번쩍 뜰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그림자를 뒤덮을 정도의 우람한 거체의 몬스터.
던전을 들어가본 적은 없지만 굳이 안들어가도 알 것만 같았다.
보스의 격을 갖춘 몬스터들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 위엄이 몸을 저릿저릿하게 만들었다.
"꿀꺽-"
레이큰은 침을 꿀꺽였다.
상인 특성상 취약한 몸둥아리를 가지고 있는 자신으로서는 트롤의 몽둥이 한 방이면 그대로 즉사다.
유저들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결코 겪고 싶지 않는 법이니까.
'자, 잠깐만. 이거 뭔가 이상한데?'
죽음을 기다리던 레이큰은 떠오른 상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은 던전의 입구다.
안전 지역은 아니기에 유저들끼리 서로 치고박고 할 수는 있어도 몬스터들의 침입은 허용되지 않는 공간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간에 어떻게 몬스터가 들어설 수 있겠는가?
시스템이 등장에 허락을 내릴 정도면 두 가지의 경우중 하나다.
첫 번째는 누군가 길들였을 가능성이였고, 두 번째의 경우에는 그냥 프로그램 문제로 발생한 버그이거나.
전자라면 놀라운 일이지만 후자라면 더더욱 놀라운 일이다.
자신을 비롯한 상인들은 이곳에서 개죽음을 당할테니까.
"실례합니다. 비켜주세요."
트롤의 주인으로 보이는 유저가 슬그머니 기어나왔다.
어떻게 그 유저가 트롤의 주인으로 보였냐고?
그야 뒤로 철제 무구를 장비한 홉 고블린과 두 마리의 짐승이 함께 나왔기 때문이다.
사장되어버린 직업 테이머가 아니면 몬스터를 저렇게 길들일 수는 없을테니까.
"야, 야. 쟤 개 아니야?"
"제로 뚝배기 부숴버린 그 녀석이잖아?"
얼굴을 전부 가리는 판금 뚜껑을 착용하고 있는 유저.
상인들은 단숨에 알아봤다.
그도 그럴게 방금 전에 이곳의 지배자로 통하는 북두칠성중 하나를 박살내고 최초로 면제권을 얻은 유저를 어떻게 잊겠는가?
칠성인 제로를 박살낸 것도 놀라운데 트롤까지 길들이다니, 그야말로 놀랄 노자다.
"아, 이런 젠장할······."
상인 유저 1명이 자기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트롤의 거체에 놀란 나머지 상인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매입/매각을 망각해버렸다.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판금 뚜껑의 유저는 시야바깥까지 떠나버렸으니 상인의 체력과 속도로 쫒아가는 것은 무리다.
한 차례 거래를 이루지 못했다는 생각에 상인들이 쯧하고 혀를 찼다.
"젠장 종쳤네."
"하, 저 정도의 유저라면 아이템도 많이 주웠을텐데······."
"어이 레이큰 형씨. 왜 그렇게 겁먹었어. 잘못하면 오줌 지리겠어 크큭."
그나마 안면이 있는 동료 상인 쿠퍼가 킥킥거리자 레이큰이 빳빳하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우물거렸다.
"뭐?"
"시, 시간······."
"그게 무슨소리야?"
"저 녀석 들어간지 1시간 30분도 안걸렸다고! 그, 그것도 솔플로!"
"······."
모두 약속이라도 한듯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 @ @
"내 평생 자네같은 모험가는 처음이야. 정말 대단하군! 껄껄껄!"
여관 '포도 구슬'의 여관장 데프가 물을 길어오면서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돈은 위대하다.
처음에 크론의 명성이고 뭐고간에 좀과 함께 내쫒으려고 했던 데프였지만 골드를 두둑히 챙겨주자 입을 함지박만하게 벌려서는 아주 지극정성이였다.
"씻기, 싫다."
"닥치고 씻어. 안그러면 네 몸을 해체해서라도 손해본 골드를 메꾸어야하니까."
"······."
좀의 입에 접착제가 붙은것 마냥 찰싹 달라붙었다.
크론은 찬란하기 그지없는 좀의 자태를 씻을 생각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 녀석을 디메른 마을로 통과시키느냐고 정말이지 죽는줄 알았다.
어디 호수라도 있으면 좀을 빠트리고 싶었지만 오는 길에는 없었다.
겨우겨우 도착한 끝에는 경비병들과의 실랑이가 벌어질 것만 같았는데 의외로 경비병들은 코를 부여잡으면서 씻기라는 부탁과 함께 무사 통과시켜주었다.
역시 NPC와의 관계는 유지해보고 볼 일이다.
"우와. 나 트롤을 씻기는 광경은 처음 봤어."
"저 사람이 주인인건가? 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트롤을 곁에 두고 다녀?"
"나 저 직업 알아! 테이머야, 테이머!"
"뭐야? 히든 클래스 같은건가?"
"놉. 희대의 쓰레기 직업임. 성공률 극악이라 테이머로 전직하자마자 캐릭터 삭제하고 새로키웠음요."
무슨 철창 안의 원숭이도 아니고 유저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좀의 목욕하는 장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오, 때밀리는거 봐라. 키야, 지리는구만!"
"나도 저렇게 한 번 밀어보고 싶다."
때밀이를 하는 분들의 쾌감이 이러할까?
좀의 몸을 쭉쭉 포대로 밀자 까마귀가 형님할 수준의 때들이 오돌톨 밀려나왔다.
사람 주먹만한 크기의 때를 보면서 사람들은 전율했다.
물론 그것을 코 앞에서 닦고 있는 크론은 죽을맛이였지만.
"허억, 허어억······."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크론이 벽을 집고 숨을 헐떡거렸다.
여간해서는 높은 체력 덕분에 지칠 일이 없는 크론이였다지만 이번의 때밀이는 정말이지······.
오랜기간 동안 기억에 남을만한 역대급 노가다였다.
"주인, 아래가 허전하다."
"옷······아, 망가졌군."
바지에 착용하고 있던 거적대기는 내구도가 다 되서 그대로 소멸해버렸다.
수리고 자시고간에 오랜 기간 동안 좀의 몸에 달라붙어있었으니 지금까지 버텨준 것만 해도 용하다.
"흐음······모르겠다. 그냥 따라와."
아쉽게도 좀의 커다란 '그것'을 가릴 만한 물건은 가방을 아무리뒤져봐도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빠르게 몸을 은둔할 곳을 찾는게 좋다.
"와 씨발. 눈이 썩어가고있어."
"트롤 고환 안 본 눈 삽니다."
"아아, 트롤이 저 정도면 오우거님 당신은 대체······."
마을을 뒤집어 엎는 트롤의 고환 노출 소동은 디메른 마을에 길이남을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 @ @
오스온의 세 번째 제자인 아츠 파더는 대장간에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갸웃했다.
"뭔······."
거대한 동체에 부리부리한 눈매를 정면으로 마주봤다.
여간한 강심장이 아니면 그 자리에서 자지러졌겠지만 아츠 파더는 오스온의 제자가 되기전에는 투쟁을 즐기는 전사 드워프였다.
마음만 먹고 손 한 번만 휘저으면 그 자리에서 트롤은 도륙날 것이다.
그렇지만 트롤이 이곳에 있을 이유가 있을 터.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던 아츠 파더는 트롤의 밑에서 뻔뻔한 웃음을 짓고있는 크론을 보고는 혀를 찼다.
"사제.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저런 녀석이 여기있는거냐?"
"······죄송합니다."
아츠 파더는 그저 웃음 밖에 안나왔다.
그렇지만 이내 당연하다는듯 받아들였다.
강철이자 철혈의 대장장이인 오스온의 제자라면 무릇 저 정도 맹랑함은 있어야지 당연한 것이다.
자신도 대장장이의 길을 걷기전에는 엄청난 사고뭉치였으니까.
"일단은 들어오도록해."
"실례하겠습니다."
좀의 몸이 크기는 했지만 고개를 수그리고 들어서자 다행히도 대장간에는 무리없이 들어갈 수 있었다.
"우, 우왁!"
"살다보니 별 신기한 광경을 보기도 하는군."
때마침 작업중이던 듀크와 테크룬이 좀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여간해서는 작업도중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지만 그것도 사정에 따라 다른 법이였으니까.
"사제가 대단한 모험가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색다른 면을 보여주기도 하는군 크하하하!"
듀크가 호탕하게 웃었다.
땅딸막한 드워프가 등이 구부러질 지경으로 웃다보니 넘어질까봐 걱정된다.
반면에 테크룬은 겁을 먹은 것인지 한 쪽 구석에 박혀서는 쭈구리 모드로 들어섰다.
이거 왠지 미안한 걸.
"작업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사형."
"클클, 괜찮아. 좋은 구경 했다고 침세. 내 평생 언제 트롤의 고환을 보겠나."
여전히 웃음기가 멈추지 않는듯 입술을 실룩거리는 듀크를 지나쳐온 크론은 즉시 작업에 착수했다.
"광물이······조만간 캐러가야겠네."
배럴 광산에서 캐온 막대한 양의 광물이 이제는 얼마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광산으로 향하기에는 벌거벗은 좀이 아무래도 걸릴 수 밖에 없다.
"일단은 가릴만한 것부터 만들어야겠네."
크론이 결정한 좀의 첫 무구는 갑옷이였다.
마음같아서는 처음으로 길들인 보스급 몬스터였으니 무기를 포함한 각 파츠 방어구들을 제작해서 착용시켜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광물의 양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
그나마 현재로서 가장 효율이 좋은 것은 아무래도 갑옷이였다.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 우월한 데다가 보스의 격을 갖춘 좀이였으니 여간한 유저들은 주먹 한 방이면 넉다운 될테니 오히려 버티는 쪽으로 가는 것이 좋다.
"아끼지말고 그냥 전부 쓰자."
크론은 곧바로 가방에 남아있는 강철들을 전부 용광로에 투입했다.
상당양에 이르는 강철의 액체가 되어 흘러나오자 크론은 그것을 미리 준비해둔 거푸집에 붓는 작업을 반복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트롤 정도의 크기를 지닌 갑옷을 거푸집으로 본뜨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 가깝다.
설령 가능하더라도 효율성으로 따진다면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다.
그럴바에는 차라리 거푸집으로 한 번에 찍어내는 것보다는 강철을 녹인 흐물흐물한 상태의 덩어리를 여러겹 합치는게 재료쪽으로 보나 성능쪽으로 보나 훨씬 이득이다.
"이제 힘 좀 써보도록할까."
이제부터 작업은 중노동의 시작이다.
모여있는 강철 덩어리들을 모루 가까이에 가져온 크론은 온 힘을 실어서 망치를 두들겼다.
여러번의 무구 제작을 통해서 이제 크론의 숙련도는 물이 올랐다.
망치질 한 번 한 번이 기예 그 자체였으니까.
땅! 따앙!
형상이 갖추어진 강철 덩어리에 또 다시 대기중이던 강철 덩어리를 덧대어 두들긴다.
이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힘 분배와 함께 망치질을 쉬지 않는 것이다.
열기와 노동으로 인해 크론의 온 몸에서는 땀이 미친듯이 흘러내렸다.
땀은 눈으로 들어와서 시야를 흐리게 할 정도였지만 흘길 시간 조차도 낭비하면 안된다.
땅---!
금속이란 참으로 오묘한 녀석이다.
완성이 되었을 때에는 여간해서는 쉽게 모양이 변질되지 않지만 액체의 성질을 지니고 있는 지금은 망치질 한 번 한 번마다 쉽사리 그 형상이 바뀐다.
마치 바다의 모래성을 만지작거리는 기분이랄까?
그렇기에 대장장이라는 직업이 재미있는 것이리라.
땅- 따아아앙!
흐트려지지 않는 고른 박자가 울려퍼진다.
시간이 지날 수록 크론의 집중력은 더욱 빛을 발했다.
빠른 작업을 위해서 옮겨두었던 강철 덩어리들은 삽시간에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줄어들고 있는 상태다.
'오스온.'
크론은 무념무상으로 작업하던 도중 문뜩 오스온이 제작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NPC라고는 하지만 오스온은 대장장이로서 존경스러운 명장이다.
별 감정없이 두들기는 모습 속에는 진지한 이면이 있다.
오스온의 망치질 속에는 명장의 혼이 실려있었다.
마치 완성되는 작품에 혼을 불어넣을 기세로 두들기던 그 모습.
그렇지만 크론은 오스온이 아니다.
'나만의 방식으로.'
명장에게는 명장만의 방식이 있다.
그것을 모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모방만으로는 따라잡더라도 만족스러운 작품을 만들 수는 없다.
오스온.
모방보다는 그의 작업 방식에 있어서 장점이 될만한 부분의 액기스를 뽑아낸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각 대장장이들들이 추구하는 과정과 결과는 다른 법이니까.
'타임 리프는 소용없어.'
매 시도 때마다 성공과 실패가 확률적으로 결정되는 강화와는 다르게 무구 제작은 타임 리프로 시간을 되돌려도 별로 소용이 없다.
왜?
냐고 묻는다면 당연한 대답을 해줄 수 있다.
시스템상 강화는 결과를 중요시하는 반면 무구 제작은 오로지 과정만을 중요시한다.
그러니 아무리 타임 리프를 시도해봤자 무구 제작을 통해서 나오는 제작품의 결과는 똑같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초능력을 활용하면 무구 제작에 이로운 효과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자면, 시간을 정지시키는 등으로 말이다.
'타임 스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