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륙 전쟁1
야밤의 기습이었다.
잠든 도시 포부르크는 지축을 뒤흔들며 나타난 거인들의 침공에 그야말로 아비규환에 빠졌다.
성벽은 거인의 발목을 붙잡지 못하였으니, 건물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고, 불꽃이 치솟았다. 그 너머에서 거인들은 거침없이 대로를 따라 움직였다.
골렘들의 목적이 무엇인가는 명확했다.
바로 왕궁이다.
그리고 왕궁도 거리만큼이나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폐하, 어서 피신하셔야 합니다! 적 골렘이 쳐들어왔습니다!”
“골렘? 골렘이라니. 당장 대응하라!”
“폐하, 현재 수도에 있는 골렘은 두 기뿐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남부 전선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 말에 여왕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현재 부르크 연방의 주전력은 모두 남부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다. 토르가의 침공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대체 어떻게······.’
까드득.
록산느가 이를 갈았다.
토르가. 토르가!
많은 준비를 하였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그녀는 여전히 무력하기만 했다.
쿠구궁.
또다시 땅이 무섭게 진동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골렘끼리 충돌하는 소리가 들렸다.
수도를 지키는 두 기의 골렘이 사력을 다해 적들을 격퇴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폐하!”
다급한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든 록산느가 달리기 시작했다.
토르가가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여왕인 그녀를 잡으면 연방을 좌지우지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일 것이다.
“그리 뜻대로는 안 될 것이다.”
그녀는 이제 한 나라의 여왕이었지만, 불과 수년 전까지만 해도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해방전선의 일원이기도 했다.
복도를 가로질러 왕궁 밖으로 나온 록산느가 말 위에 펄쩍 뛰어올랐다.
“이랴!”
샛길로 벼락같이 달려나가는 준마.
‘이대로 군대에 합류할 수밖에! 만약 지금 내가 잡혀서는 연방 자체가 위험해질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콰아앙.
별안간 눈앞으로 널브러지는 골렘.
땅이 무너질 듯 진동하는 충격 속에서 힘차게 달리던 말이 발광하며 나뒹굴었고 록산느 역시 튕겨 나가서 바닥을 거칠게 나뒹굴었다.
“으윽.”
낮게 신음하며 몸을 일으킨 그녀는 숨이 턱 막히는 통증을 느꼈다. 이마에서 주륵 피가 흘렀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바로 코앞에 쓰러진 골렘에 꽂혀 있었다. 그 골렘은 연방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지축을 뒤흔들며 나타난 녹색의 골렘. 스산하게 일렁이는 철갑 투구 내부의 붉은색 안광.
“이거 운이 좋군. 아니, 그쪽이 운이 없는 건가?”
골렘 내부에서 들려온 웅장한 목소리에 록산느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빛났다.
‘내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있다는 건가.’
토르가가 이 기습작전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였는지를 짐작할만했다.
“얌전히 잡혀주시지요, 폐하.”
골렘의 탑승자가 이죽거리며 손을 뻗을 때였다.
콰아앙!
별안간 녹색 골렘의 상반신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마법이었다.
“폐하!”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 달려오는 인물들이 보였다.
그들은 과거 해방전선의 동료들이었고, 지금은 부르크 연방의 핵심인사들이었다.
“당장 폐하를 모셔라!”
기사들이 록산느를 부축하여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쿠웅. 쿵.
불꽃 너머에서 또 다른 한 기의 골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끝이 아니다.
한 기씩 연이어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가 여섯 기나 됐다.
“버, 벌써 골렘 둘을 쓰러뜨렸다는 것인가.”
신음을 흘리는 기사들.
골렘을 상대할 수 있는 건 골렘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지금 저항할 수단이 없다는 말이었다.
“자, 여왕 폐하, 순순히 저희에게 협조해주신다면 험한 일은 당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골렘의 너머로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감히······.”
록산느가 분통을 터뜨릴 때였다.
쿠쿠쿵. 저편에서부터 굉음이 들렸고, 지축을 뒤흔들며 커다란 골렘 한 기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한두 기가 나타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걸 모르는군. 대장님, 제가 처치하겠습니다.”
“방심하지 마라. 궁지에 몰린 적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법이야.”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마주 뛰어가는 녹색의 골렘. 경무장의 녹색 골렘의 움직임은 달려오는 회색의 적 골렘에 비하면 훨씬 빨랐다.
“고철로 만들어주마!”
우렁차게 외치며 높은 기동성을 바탕으로 거대한 대검을 붕 휘두르는 녹색 골렘. 하지만 그 공격을, 회색의 골렘은 몸을 낮춰 아슬아슬하게 피하였다. 그리곤 단숨에 칼을 찔러왔다.
콰앙!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탑승부가 관통된 골렘은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저 움직임······ 놈을 처치한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녹색 골렘들이 대응에 나섰다.
그러자 무너져 내리는 골렘을 뒤로 하고서 회색 골렘은 몸을 낮추더니 이내 원형의 방패를 홱 던져왔다.
쾅!
“방패를 버린다고?”
적이 방패를 버린 모습에 거침없이 돌격하는 다섯 기의 골렘들. 그런데 그 이후에 벌어진 광경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회색의 골렘은 손쉽게 협공을 흘려내면서 측면을 잡더니 이내 하나씩 골렘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실력면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난다.
꿀꺽.
“지, 지금 저 골렘에 탑승한 자는 누구지?”
록산느가 깜짝 놀라서 물어왔다.
그러자 측근들이 이내 난처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그는 거인기사라고 불리는 인물입니다.”
“거인기사라고.”
록산느가 미간을 모았다.
거인기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외눈의 용병.
그가 누구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사일러스 발베르트.
아이스본을 이끌었던 토르가 왕국의 총독.
이 북부를 압제했던 주구가 지금은 그들을 돕기 위해서 싸우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치욕적인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가 아니었더라면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을 냉정히 받아들였다.
“용병인 그가 싸우고 있다는 건 그가 우리에게 고용됐다는 얘기겠지.”
“······그렇습니다, 폐하.”
“어째서 이런 이야기를······. 후. 뒤늦게 이런 걸 따지는 건 아무 의미도 없겠지. 누가 이런 생각을 했지?”
“크레인 대공이 이전 협상 때, 유사시를 대비해두는 게 좋을 거란 조언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드 크레인, 또 그인가.”
록산느는 탄식했다. 그는 자국의 일뿐만이 아니라, 이 부르크의 상황마저 챙긴단 말인가. 지도자로서의 역량의 차이. 록산느는 그걸 느낄 수밖에 없었다.
콰아앙.
록산느는 상념에서 헤어나왔다.
저편에서 마지막으로 녹색 골렘이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토르가 왕국의 기습작전이 완전히 실패한 순간이었다.
우두커니 서 있는 연방제 회색 골렘을 바라보면서 록산느는 착잡한 표정을 했다.
같은 골렘이라고 해도 탑승형 골렘은 그 탑승자가 어떤 실력자인가에 따라 이토록 큰 차이가 나는 것이다.
철컹.
“흐음. 죽음과 전쟁의 냄새. 오랜만이군. 그래, 이게 바로 사람이 사는 세상이지. 흐흐흐. 자, 이제 조금만 기다려라, 하인리여. 이번에야말로 네놈을 죽여주마.”
사일러스가 골렘에 걸터앉은 채로 광기에 젖은 웃음을 흘렸다. 그의 눈동자는 파괴된 포부르크의 도심에 꽂혀 불꽃에 일렁이고 있었다.
*
“토르가 왕국의 소규모 골렘 부대가 포부르크를 기습 침공했다고 합니다.”
사흘이 채 지나기 전에 들려온 소식이었다.
‘역시 그리 나왔나.’
제드는 턱을 괴었다.
렌시아의 군대는 지난 며칠 동안 수비태세에 돌입하였다. 경계를 늘리고 정찰을 늘렸다. 이대로 국경의 전선을 지키며 시간을 끌겠다는 속셈이다.
‘이쪽이 아니라 동맹전선을 먼저 위축시키겠다는 건가.’
“각하,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연방 쪽 전선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것 같습니다. 토르가의 기세가 상당한 듯합니다.”
“당장 오멜 공국에 사람을 보내라. 이쪽에 지원은 필요 없으니 전부 부르크 연방 쪽 전선에 가담하라고 말이야.”
“외람되나 그것으로 충분할지 모르겠습니다. 현재 정보를 따르자면 남부의 공화국 쪽에서 동부전선 쪽으로 꽤 많은 병력이 이동하는 것을 포착한 상황입니다.”
“그 병력이 골렘 전력이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군.”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럴 확률이 없지는 않습니다. 정규군 군대가 제대를 이루어 움직인다면 한정된 상황에서 골렘의 동선을 파악하기란 어렵습니다.”
“전력을 양분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그렇다면 확인해보면 될 일이지. 그리고 정말 경의 말처럼 적이 병력을 양분했다고 한다면 이쪽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끔 하면 될 일이다.”
제드가 막사를 나와 곧장 지휘부로 향했다.
곧 그의 걸음 뒤로 지휘관들이 한 명씩 붙기 시작하였으니, 지휘부 막사에 다다랐을 때는 약 이십여 명이 함께였다.
“제군들, 공화국의 겁쟁이들은 본국과 싸움을 꺼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똑똑히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그들이 싸우고자 하는 적이 누구인지, 그리고 얼마나 강한지 말이다.”
제드가 좌중을 훑으며 지도의 한 곳에 시선을 옮겼다. 약 20여 개가 넘는 말이 모여 있는 장소. 제드는 그곳의 말을 국경의 너머로 하나씩 옮겼다.
“지금부터 본군은 적을 핵심 전력을 이끌어내어 그 숫자를 파악한다. 이견이 있는 자, 기꺼이 말해보라. 나의 귀는 열려 있으니.”
그러나 그 말엔 누구도 감히 이견을 달지 않았다.
제드 크레인이 누구인가.
전쟁의 신.
라이곤이라는 국가를 패도의 길에 올린 절대자였다.
그가 있는 전투에 패배는 없었다.
라이곤 왕국의 브리드마우드 남부 주둔지가 부산했다.
군대가 도열하는 모습이 보였다. 땅이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고,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말에 오른 지휘관들이 부산하게 움직여 다니며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가운데, 마법사들은 기사단의 엄중한 보호를 받으며 이동을 시작했다.
주둔지가 형성된 이후 일주일 동안 변화가 없었던 군대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저, 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둔지를 살피던 렌시아 공화국의 정찰대가 깜짝 놀란 얼굴로 말머리를 돌렸다. 적군이 진군을 시작했음을 빨리 전달해야만 했다.
“이럇!”
곧 정찰대들이 왔던 길을 되돌아서 달려나갈 때였다.
쐐액.
퍽.
별안간 달려나가던 선두의 정찰대원 한 명의 머리가 터졌다.
“무슨······!”
뒤따르던 셋이 다급히 고삐를 당기며 몸을 틀었다.
그들은 섬광이 번쩍했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야생의 땅의 경계 지대인 험한 절벽자락이 보였다.
그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여러 개의 섬광이 동시에 터졌을 때, 그곳에 살아있는 정찰대원들의 모습은 없었다.
각각 머리와 심장부가 관통된 채로 흙바닥에 널브러졌기 때문이다. 주인을 잃은 말들만 느릿하게 사방으로 어슬렁대고 있었다.
절벽의 위, 자욱한 숲.
그곳엔 숲 일부가 된 것처럼 짙은 녹색의 후드와 망토로 자신을 감추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마법사였다.
“마법을 발동하는 순간에 호흡을 가다듬어라. 쓸데없이 마나가 흐트러지고 있어.”
“후. 이토록 먼 거리에서 마법을 사용해보는 건 처음이라서 그런지 쉽지가 않습니다.”
“익숙해져라. 그리고 자부심을 느껴도 좋다. 내가 너희에게 전수한 이 비전의 마법은 이 격변의 시대에 비로소 이르러 빛을 보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니.”
노마법사 베른의 눈빛엔 자부심이 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