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치는 정세3
*
라이곤의 사절은 부르크 연방과 오멜 공국으로 향했다.
이즈음 부르크 연방의 록산느 역시 국제정세를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고, 그들의 정보망에도 토르가와 렌시아의 교섭에 관한 정보가 들어와 있었다.
“라이곤에서 사절이 왔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대응이 빠르군. 이 상황을 포착하자마자 본국으로 사절을 보내왔다는 건가. 라이곤의 사절이 토르가로 향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나?”
“본국의 정보망에는 잡히지 않았습니다.”
록산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드 크레인.
그 남자의 지난날 행보를 미루어보건대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그녀가 아는 한, 그는 절대로 자신의 적으로 돌아선 자에게 평화를 구걸하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연방에 사람을 보내온 것이리라.
‘제드 크레인. 그 남자는 지금 토르가와 렌시아를 한꺼번에 부수려고 하는구나.’
록산느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역사의 격변. 자신이 그 앞에 있음을 말이다.
폭풍이 닥쳐왔다.
이 폭풍을 잘만 탄다면 부르크 연방의 국가적 위상과 기반의 저변을 크게 확대할 수 있으리라.
‘어차피 본국은 이 전쟁에서 벗어날 처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 참전하여 최대한 많은 것을 손에 넣어야만 한다.
결단은 내렸다.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직접 사절과 만나보겠다.”
그 무렵, 오멜 공국에도 라이곤의 사절이 당도하였다.
“오오. 어서 오십시오.”
뜻밖에도 공국의 외교관은 아주 친절한 태도로 라이곤의 사절을 환대했다. 이는 뭔가 기묘한 상황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양국은 불과 3년 전즈음에 대수림 분쟁을 겪었던 원수지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대수림 분쟁 이후의 상황이 오멜 공국을 크게 변화시켰다. 아주 긍정적으로 말이다.
3년 전, 대수림 분쟁 사태 때 오멜 공국의 주역은 절대적 기득권인 길드연합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전쟁을 겪은 이후 몰락하였으니 이내 완전히 붕괴했다. 그리고 이 상황은 막혀있던 둑이 무너지는 것처럼 중소상인들에게 기회가 되었다.
막혀 있던 흐름이 풀린 것처럼 경쟁이 촉구됐고, 출중하 능력을 갖춘 집단들이 우후죽순 튀어나왔다. 그러면서 경제적 상황이 크게 활성화됐다.
더욱이 대수림을 사이에 두고 외교적으로 거의 단절되어 있다시피 했던 오멜과 라이곤 양국이었다.
그런데 오멜 공국의 남단을 라이곤에 할양한 이후엔 양국의 국경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고, 두 나라의 상인들은 활발한 무역을 펼칠 수 있게 됐다.
그런 여러 상황이 맞물리면서 공국 전체에 긍정적 전망으로 작용하였으니, 새롭게 공국의 권력을 잡은 인물들은 라이곤 왕국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멜 공국과의 교섭에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온 라이곤의 외교사절들은 그들의 극진한 환대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오! 삼국교섭이라니. 아주 훌륭합니다. 좋습니다. 제드 각하께서 친히 주선하는 일이라면 당연히 응해야지요. 회담의 장소와 시일만 말씀하시지요. 대공 전하께서는 그 귀국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실 요량이십니다.”
그 답을 이끌어내기까지는 그야말로 일사천리.
그리하여 삼국교섭은 모두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거침없이 진행되었고, 그 회담의 장소로는 라이곤 왕국의 북부 도시인 캄페르로 낙점됐다.
회담의 당일, 제드는 직접 그 회담의 자리에 나섰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젊은 원수의 모습에 오멜과 부르크의 대표자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태도로 그를 맞이하였다.
“서로 시간에 쫓기는 바쁜 사람들이니, 본론만 말하겠소. 국제질서의 흐름을 뒤집어엎을 것이오. 그 흐름에 오멜과 부르크. 양국이 함께 해주면 좋겠소.”
불쑥 꺼낸 말이었다.
제드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당당하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회담을 주도했고, 금세 삼국의 이해관계를 정립해나갔다.
애초에 부르크 연방이나 오멜 공국이 이 교섭자리에 찾아온 것 자체가 라이곤과 손을 잡겠다는 뜻이었으니, 남은 건 조정뿐이었다.
“사안에 동의하는 바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두 나라의 대표가 마침내 제드의 제안을 받아들인 순간이었다. 라이곤, 오멜, 부르크로 이어지는 삼국 동맹전선이 성립된 순간이었다.
뒤늦게 이 사태를 파악한 렌시아의 사절이 오멜 공국과 부르크 연방을 찾았으나, 교섭이 끝난 마당이었다.
바야흐로 때는 통합력 1649년 2월 무렵이었다.
라이곤, 오멜, 부르크.
렌시아, 토르가.
이 동부대륙의 운명을 걸고서 저 북부와 동부, 그리고 남부에 이르기까지 각국의 군대가 저마다 목적을 가지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머잖아 공식적으로 렌시아 공화국에서 선전포고문이 발표됐다.
-수개월 전, 뉴레이그에서 발발한 일련의 사태의 배후에는 당대의 폭정을 일삼는 라이곤 왕가가 있음이 명백한 바······.
그 내용은 구구절절 길었지만, 내세운 증거에 명확한 증거는 없이 추측성 내용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젠 그런 내용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이미 이 전쟁은 수개월 전부터 시작된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새벽이 밝아오면서 하늘이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쿵. 쿠웅. 쿵.
골렘들이 이동하면서 내는 진동이 땅을 타고 느껴졌다.
제드는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있었다.
무수한 생각이 머릿속을 헤매다가 서서히 사라지고 이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됐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을 때, 푸른색의 맑은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그 눈빛엔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다. 여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그는 전쟁을 시작하고, 끝낼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기꺼이 맞이하리라.
“출진이다.”
*
쿠웅. 쿵.
지축이 뒤흔들렸다.
새벽의 파르스름한 안개 너머로 일렁이는 실루엣의 너머로 무엇인가가 존재했다.
그것은 은폐장으로 모습을 감춘 골렘이 틀림없었다.
지나온 길에 땅이 푹푹 꺼졌고, 마법사들과 군인들이 일정한 대열을 이루어 함께 움직였다.
그들은 수도 그레즈에서 출발한 군대였다.
남부의 전장으로 나아가는 그들의 얼굴엔 결연한 빛이 감돌았다. 이번 전쟁은 골렘이 역사의 전면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로 가장 큰 전쟁이 될 터였다.
일렬로 길게 늘어선 대열을 따라 말들은 바쁘게 오갔다.
그들은 전령들이다.
골렘 전력을 얼마나 숨기느냐가 곧 전략적 우위로 이어지는 정보전 양상이었기에 이번 전쟁은 유달리 전령과 정찰대의 운용이 많았다.
푸르륵.
저 멀리 동부의 언덕 지대를 가로지르며 달려오는 말이 있었다. 말을 거침없이 몰아서 브리드마우드 남부의 주둔지로 달려온 병사는 거친 숨을 내뿜는 말의 고삐를 거세게 당겼다.
“워워.”
그는 병사에게 지친 말을 넘겨주고 주둔지의 중심부로 향했다. 이곳은 라이곤 왕국령 최남단의 도시 브리드마우드의 남부 접경지의 임시주둔지. 병사는 지금 중요한 정보를 전해야만 했다.
마침내 커다란 막사 앞에 선 인물을 막아서는 병사. 수색검문은 엄중하게 이어졌다. 막사의 외부엔 라이곤 왕가의 깃발이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대고 있었다.
“들어가도 좋습니다.”
수색을 끝마치고 안으로 들어온 전령은 막사 내부의 면면을 살피며 경례를 붙였다.
“제12 정찰대대 3중대 소속 막시밀리안 레인 하사입니다.”
“정찰대라고.”
젊은 원수는 지휘부 막사 중심부에 놓인 지도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제드 크레인.
막시밀리안은 이토록 가까운 곳에서 그를 본 게 처음이었다. 그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제12 정찰대대면 서부 야생의 땅인가?”
“그렇습니다!”
“좋아, 무슨 일로 예까지 직접 왔는지 설명하도록.”
“현재 10단위 정찰대대는 서부 야생의 땅이라고 불리는 인외의 땅에서 작전을 수행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약 반나절 전에 미심쩍은 흔적을 포착하였습니다.”
“흔적?”
“옛, 다수 골렘의 기동흔적입니다.”
전령의 그 말에 장내가 웅성거렸다.
제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부분이었다. 작전 구상의 단계에서부터 제드는 적의 우회기동의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것을 몇 번이고 강조했다.
전령은 그 이후로 몇 가지 사실을 더 전하더니, 품에서 현재 상황에 대한 밀서를 전하였다.
제드는 그 내용을 훑으며 말했다.
“수고했다, 막시밀리안 하사. 한나절 푹 쉬고 다시 돌아가서 임무를 다할 수 있도록.”
“옛, 분부 받들겠습니다!”
막시밀리안은 벅찬 표정으로 대답하고서 막사를 나섰다.
지휘부 막사가 적의 기동사실을 두고 여러 이야기가 나오는 가운데, 제드는 태연한 얼굴로 작전지도를 눈에 담았다.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역시 우회기동을 노리는군. 당엲다면 당연한 일이다. 렌시아 공화국의 군사전력이 강해졌다고 해도 웬만하면 정면충돌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라이곤의 육군이 지난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골렘전이라는 경험을 축적하며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는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출력만으로 비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더욱이 양국은 치열한 정보전으로 정확한 전력을 파악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아니던가.
‘따라서 우회기동전술은 당연한 일이다. 단독 작전을 벌일 정도로 무모하지는 않을 테고, 양동······ 혹은 전선을 동시에 압박하겠다는 전략일 터.’
제드의 머리가 거침없이 돌아갔다.
장내의 지휘관들도 저마다 의견을 내면서 작전논의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소리는 제드에게 닿지 않았다.
‘기동흔적은 있으나 골렘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핵심이다. 적들이 골렘을 숨겨놓고 있을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그걸로는 골렘을 완전히 숨길 수 없다. 은폐장은 마법사가 있으면 걷어내는 건 썩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런 어설픈 도박을 하지는 않았을 테지. 그렇다면 작전변경인가.’
제드의 시선이 이 일대의 지도를 슥 훑다가 불과 수 킬로미터 남짓 밖에 있는 국경의 접경지대에 닿았다.
“로톤 경, 남부 접경지대의 정찰보고는 언제입니까.”
“접경지대에서는 앞으로 반나절 이내에 보고가 당도할 것입니다.”
“반나절이라.”
제드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아직 정보가 다 모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떤 날카로운 예감이 들었다. 이런 제드의 예감은 대개 잘 맞는 편이었다. 어쩌면 이 전쟁이 가장 처음 발발하는 장소는 라이곤과 렌시아의 군대가 대치하는 이 남부전선이 아닐지도 몰랐다.
‘적이 전선의 취약점을 노려온다면······.’
제드의 시선이 지도의 동부로 향했다.
*
밤이 깊은 시각. 철썩대는 파도의 소리 너머로 들려오는 묵직한 진동이 있었다. 그것은 귀를 기울이고 듣지 않으면 정확히 판별하기 어려운 소리다.
더욱이 이곳은 동부의 끝자락 절벽. 이곳을 경계하는 이는 없었으니, 어둠 속에서 모래가 쩍쩍 꺼지는 기이한 광경이 연출됐다.
머잖아 험하게 치솟았던 절벽이 완만해졌으니, 곧 모래사장도 끝났다.
쿠웅. 쿵.
바닷물이 대지를 적시는 가운데, 언덕 위로 오르며 서서히 은폐장이 걷혔다. 곧 그곳에 짙은 녹색의 골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골렘의 수는 여섯 기. 생김새는 투박하였고 장갑은 얇았으나, 방패를 착용하지 않고 등에 커다란 대검 무장만 장착한 골렘이었다.
“1단계 작전은 성공했다. 2단계 작전을 이어서 진행한다.”
골렘 내부에서 나직이 전달되는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이 이 부대의 대장인 것이리라. 곧 나머지 골렘들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실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그 골렘들이 전부 탑승형 골렘이라는 사실이었다.
“신속하게 기동한다.”
쿠웅.
그 순간, 조금 전까지의 은밀한 움직임은 온데간데없이 땅을 짓밟으며 달려나가는 골렘들. 경장갑에 단일 무장의 골렘답게 그 움직임은 빠르고 가벼웠다. 하지만 그것이 강철과 바위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수십 톤의 무게에 짓밟힌 대지는 흉하게 찢기고 부서져 흩날렸다.
그리고 이 밤을 사납게 깨우는 이 녹색의 골렘들이 뽑아든 칼끝이 향하는 곳. 그곳에는 이 북부의 독립연방국인 부르크 연방의 수도가 있었다.
포부르크.
동부의 땅에서 전쟁의 서막이 오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