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치는 정세1
쿠르릉.
하늘에 먹구름이 짙게 드리운 날이었다.
꼭 라이곤 왕국의 앞날을 말하는 것 같은 날씨였다.
“뉴레이그에서 높으신 분이 암살을 당할 뻔했다던데.”
“그게 우리 왕실의 소행이라는군.”
“말도 안 되는 소리. 당당하신 여왕 폐하께서 그런 짓을 벌일 이유가 없잖아! 우리 라이곤 왕국은 동부에서도 가장 강한 군사 강국이 되었다고!”
“쯧쯧. 그런다고 일어날 전쟁이 안 일어나나?”
“전쟁 따위가 무슨 문제인가? 우리에겐 전쟁의 신이 있는데 말이야.”
쏴아아아.
곧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비가 쏟아졌다. 길거리에 삼삼오오 모였던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 그 사이로 한 기의 마차가 지나갔다.
투박하고 낡은 마차의 마부는 빗물에 흠뻑 젖은 얼굴로 거리를 나아갔고, 머잖아 목적지에 다다라 고삐를 당겼다.
“워워.”
마부가 얼굴에 흐르는 빗물을 대충 닦아냈을 때, 마차의 문이 열리면서 한 사람이 내렸다. 마차 이상으로 낡은 망토와 후드를 걸친 젊은이였다.
“고생했소.”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마부는 깜짝 놀란 얼굴로 마차에서 내려 고개를 굽실댔다. 이미 선금으로도 많은 돈을 받았는데, 개의치 않고 또 큰 금액을 그의 손에 안겨주고 떠난 까닭이다. 이런 횡재가 어디에 있으랴. 마부는 흠뻑 젖어 쫄딱 젖은 생쥐 꼴이었지만, 그 얼굴엔 기쁨이 가득하였다.
마차에서 내린 젊은 인물이 향한 곳은 과거 라르곤 마탑이라고 불렸던 장소였다. 후드의 안쪽에서 푸른 눈동자가 일렁였다. 며칠 전의 뉴레이그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 그는 바로 제드 크레인이었다.
뚝뚝. 빗물이 복도를 적셨다.
거리낌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내부의 풍경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다를 게 없었다.
한 가지 다른 게 있다면 이 공방의 주인이 그를 반기며 헐레벌떡 달려왔다는 점일까.
추레하게 늙은 연금술사의 눈에는 탐욕의 빛이 일렁였다.
“이야기는 들었소. 뉴레이그 사태. 저 남쪽의 공화국에서 아주 큰 일이 났다고 말이오. 그리고 바로 알았소. 그 일은 바로 귀공이 벌인 일이라는 것을 말이오. 그 호문쿨루스를 찾아간 것이 틀림없겠지. 내 말이 틀렸소?”
“정확하다. 나는 그 호문쿨루스를 찾아갔다. 그대가 알려준 방법을 통해서 말이야.”
“혈액추적은 감출 수 없는 법이지. 그래서······ 그래서 ㅇ떻게 되었소?
“놈을 해치웠다. 바깥세상에서는 그 일이 크리스티앙 발뭉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일쯤으로 알려져있지만, 그런 인물은 애초에 내 안중에도 없었다.”
“그, 그렇다면······ 드래곤의 피로 연성된 그 호문쿨루스는 어떻게 됐소. 표본은, 표본은 얻은 것이오?”
연금술사 빌헬름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은 전설로만 전해지는 그 드래곤이 남긴 호문쿨루스다. 잘만 조사한다면 빌헬름 앙드레가 평생을 바친 연구가 열매를 맺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감이다. 얻을 수 없었다. 적진에서 어떤 소동이 있었는지도 들었을 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표본을 완전히 불태워 제거하는 것뿐이었다.”
“이, 이런 미친! 그, 그딴 짓을······ 그딴 짓을 했다고!”
빌헬름이 눈이 벌겋게 변해서 고함을 질렀다. 살기등등한 그의 눈빛은 눈앞에 있는 인물이 제드가 아니었더라면 이미 여러 번은 죽이고도 남았으리라.
바로 그 순간.
“빌헬름 앙드레.”
제드가 그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퍽!
“끄아악!”
별안간 허벅지에 불을 지지는 듯한 통증에 철푸덕 쓰러진 빌헬름은 들끓던 머리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마탄.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날아든 마법이다.
이 정도로 고속 영창이 가능하다니······.
꿀꺽.
마른침을 삼킨 빌헬름은 어느새 핏기가 가신 얼굴이다.
눈앞의 존재가 누구인지 떠오르면서 냉정을 되찾은 것이다.
고개를 들자, 짙은 그림자가 드리운 후드 안쪽에서 서늘하게 타오르는 푸른 눈동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군. 삶이 지겨워졌더냐.”
“자, 잠깐······ 잠깐 이성을 잃었소. 사, 살려주시오······. 제, 제발 부탁하겠소.”
“네 목숨이 나의 것이 된 날부터 너는 나의 것이나 다름없는데, 너는 지금 주인을 향해 이빨을 들이댔다. 그렇잖아도 마침 네 이용가치 하나가 줄어든 셈인데, 조금 전에 하나를 더 잃은 셈이다.”
빌헬름이 몸을 덜덜 떨어댔다.
저 눈빛. 진심이었다. 겁을 주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저 투명한 푸른 눈동자에는 그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심연이 가득하다.
쿵.
곧장 머리를 찧으며 엎드린 빌헬름이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
제드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별안간 손을 뻗어서 빌헬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움찔하는 빌헬름. 하지만 그는 감히 도망치지 않았다.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그리하면 끝이라는 것을.
“이미 네겐 기회를 주었다. 그러니 이번엔 너에겐 대가를 받아야겠다.”
“대, 대가라면······.”
“낙인을 찍겠다. 그게 널 살려주는 조건이다. 거부하겠느냐?”
낙인.
그것이 무엇인지는 빌헬름도 알고 있다.
그 마법이 자신의 뇌에 스며드는 순간, 이제 그는 다시는 제드를 거스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죽는 것보단 낫다.
죽으면 끝이다. 모든 것이 말이다.
“서, 섬기겠습니다. 그리 해주십시오.”
“좋다. 다행히도 네게는 아직 이용가치가 있다. 너의 그 생물을 다루는 연금술은 머잖아 다가올 시대에 이바지할 수 있을 거다. 절대로 잊지 마라. 네 능력이 너를 구제한 것이다.”
“예, 예······.”
곧 제드가 마법을 영창했다. 이것으로 이제 빌헬름은 영원히 제드가 채운 목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발트 테바인의 피를 연구한 빌헬름 앙드레는 앞날의 위험성을 생각하면 당장 죽이는 게 옳아. 하지만 그의 생물학적 연금술 연구는 가치가 크다. 그는 모든 전쟁이 끝난 이후의 시대. 그 시대가 되면 크게 빛을 발할 인물이다.’
그렇기에 제드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자신의 감시 아래에 두고 그가 일궈내는 연구를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혹여나 다른 허튼짓을 벌인다면······.
‘그때는 없애야겠지.’
제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의 인품과 성격과는 무관하게 빌헬름 앙드레의 연구성과는 마법사로서 아주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마법의 시술을 끝마치고 탑에서 나온 제드는 쏟아지는 빗물을 맞으며 왕궁으로 향했다.
쿠르릉.
무섭게 울어대는 하늘. 비는 한동안 멈추지 않으리라.
그러나 이 비바람이 몰아친 후에는 날이 갠다.
그건 이 시대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발트 테바인이 남긴 마지막 불씨였고, 제드가 불을 붙인 전쟁. 그것은 과연 얼마나 크고 세차게 타오를 것인가.
*
뉴레이그 사태.
대수림 분쟁 이후 잠잠하였던 동부 대륙의 국제질서를 크게 뒤흔드는 사건이 터졌다. 공화국 제2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뉴레이그에서 발발한 골렘전이 바로 그것이었다.
공화국 의원 중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크리스티앙 발뭉을 노린 암살시도는 실패로 끝났으나, 이 사태로 말미암아 공화국 내부의 분위기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고 있었다.
“라이곤 왕국이 배후에 있는 것이 틀림없소!”
그렇잖아도 발언권이 막강한 크리스티앙이었다. 그런 그가 의회에서 그런 발언을 하면서 주전파가 집결하기 시작하였으니, 이는 금방 주류 여론이 되었다.
크리스티앙의 군벌은 결집하고 있었으니, 이미 렌시아 공화국의 내부에서는 급격하게 라이곤 정벌론이 부상했다.
크리스티앙 발뭉은 막강한 입김을 토대로 공화국의 주요 투표인단을 장악하였으니, 물밑에서 계속 진행해왔던 군비증강에 대한 의회의 표결안은 곧바로 가결되었다.
“······이로써 공화국은 군비증강 체제를 통하여 국제질서의 평화와 균형을 잡기 위한 자주적 방어태세에 들어갈 것임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그것은 막을 수 없는 일 같았다. 이른바 시대의 격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리고 무거운 표정으로 의회장에서 나오는 의원들.
“고생하셨습니다.”
“······.”
보좌관의 말을 들으며 중년의 의원은 피로한 기색으로 마차에 올랐다. 덜컹거리며 나아가는 마차 안에서 그는 무거운 표정을 좀처럼 지우지 못했다.
“근심이 많아 보이십니다, 의원님.”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그것이 공화국의 다수 의견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공화정이라는 체제라면 순응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구나! 다수의 의지가 늘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참이란 말이냐!”
“그, 그런 것은 아닙니다.”
“발뭉 의원은 지금 폭주하고 있다. 전후 사태 파악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그는 민심을 끓어오르게 하고 있다. 주전파를 대세 여론으로 만들었어. 온 나라가 그들의 광기에 휘말릴 게다. 그리고 그것을 막지 못한 나는 두고두고 오늘을 후회하겠지······.”
“의원님,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의원님 홀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무는 노을의 정경은 꼭 핏빛과 같다. 의원은 질끈 눈을 감았다.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그리고 이 소식은 라이곤의 정보국을 통해서 시시각각 전달되고 있었다.
뉴레이그 사태 이후, 불과 한 달 하고도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따름이었다.
한편, 그 무렵 라이곤 왕국의 정보국은 각국의 정세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었다.
제드와 정보국이 시작한 이 사태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면밀히 파악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렌시아 공화국의 의회에서 가결된 군비증강에 관한 소식을 접하게 됐다.
“공화국의 반응이 거세군.”
“이로써 그들이 본격적인 전쟁준비에 돌입했음은 분명합니다.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으나, 그 대상이 본국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일 테지요.”
“폭주하는군. 명확한 증거도 없는데, 선전포고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들은 아르타시아 가문에 관한 본국의 보호조치를 그 증거로 제시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다소 약한 명분이긴 합니다만, 그 명분을 내세우는 게 크리스티앙 발뭉이라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늙은이, 기세가 좋기도 하군.”
“수완이 대단합니다. 이번 일의 배경을 살펴보니 정말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 폭풍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로베르 가문이 있습니다. 마크 총수가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제아무리 크리스티앙 발뭉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과감한 정치적 행보를 보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제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뉴레이그 사태가 터진 후에 가장 먼저 공화국의 조사를 하려고 든 대상은 당연하게도 라이곤의 아르타시아 가문이었다.
공식적으로 아론 아르타시아는 소요 중에 행방불명이 된 것으로 처리되었고, 리오나도 다급히 라이곤으로 돌아왔으니 그들의 의심은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라이곤 왕국은 그들의 정식적인 외교적 절차를 거절하였다. 라이곤 왕국은 뉴레이그 사태와 본국이 무관함을 전파하면서도 아르타시아 가문의 조사 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사실만을 말할 따름이었다.
이런 외교적 결렬 사태는 기어이 공화국 사람들의 공분을 이끌어내며 크리스티앙 발뭉 일파의 폭주로 이어졌다.
“각하,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불과 반년 이내에 전쟁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그들과 전쟁을 하실 요량이십니까.”
“그래, 이르든 늦든 렌시아 공화국과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골렘 기술은 이미 본국을 앞서고 있어. 그런 와중에도 신형 골렘의 개발은 계속되고 있었다. 바로 그 크리스티앙 발뭉의 주도 아래에. 오히려 지금이라서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지.”
제드의 태도는 담담하다.
코라스는 어느 정도는 짐작한 기색이었다. 이미 이번 작전을 구상했을 때부터 아주 높은 확률로 전쟁이 발발할 거란 예상을 했기 때문이었다.
“코라스 경, 각국의 동태를 주의 깊게 살필 수 있도록. 토르가 왕국이 이런 기회를 놓치진 않을 거다.”
“옛, 알겠습니다.”
전쟁.
제드는 그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럴수록 느슨하게 이완되었던 정신이 팽팽하게 긴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전쟁.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으랴. 인간의 역사는 전쟁으로 이어져 왔을진대.’
그러나 이전과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왜냐하면, 역사의 배후에서 전쟁의 불씨를 뿌리던 발트 테바인이라는 전쟁인도자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오직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지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일 따름이다.
제드의 눈빛이 결연하게 빛났다.
이제부터 국제질서가 요동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