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1
쿠우웅.
검은색 골렘이 굉음과 함께 무너져내렸다.
몸의 정중앙을 꿰뚫은 것은 날카롭게 벼려진 거대한 창이었다. 쓰러진 골렘의 배후에는 아우로렐이 있었다.
우우우우.
그 모습은 처음과는 사뭇 다르다. 좌우의 어깨에 방패의 역할을 하던 견갑이 완전히 떨어져 나간 상태였고, 몸 전체를 이루는 두꺼운 나무껍질을 벗은 듯 가벼운 모양새였다.
바로 저 경무장이 뒤늦게 대응했던 아우로렐이 발트의 드레이크 급 골렘을 추격하여 단숨에 꿰뚫어버릴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제드는 무너진 발트의 골렘을 눈에 담았다.
‘보편적인 상황이었더라면 그 선택은 옳았다. 다만, 전황이라는 것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발트는 그걸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바로 직전의 근거리 싸움에서 미처 재구축하지 못하고 분해되듯 바닥에 널브러졌던 아우로렐의 왼팔 견갑을 말이다.
그리고 제드를 향해 몸을 돌린 순간, 모든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아우로렐은 모든 장갑을 몸에서 털어내 가볍게 만들고서 뒤늦게 가속했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견갑을 창으로 재구축, 무시무시한 노심 코어의 엄청난 출력을 바탕으로 단숨에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결국, 발트의 드레이크는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꿰뚫리고 말았던 것이다.
드래곤의 호문쿨루스.
발트 테바인이라고 불렸던 남자.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 길고 긴 시간을 살아왔던 그 존재의 죽음이 눈앞에 있다.
우우우우.
아우로렐이 녹색 안광을 불태우며 거친 울음을 내뱉었다. 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모습이었다. 저렇게 거듭난 이후로 자신과 대등하게 싸운 존재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제드가 차분하게 아우로렐의 흥분을 달래다가 미간을 모았다.
“정말 지독한 생명력이로군.”
흉하게 짓뭉개진 탑승부에서 희미하지만 거친 호흡과 신음이 들렸다. 저 지경이 되고도 아직 목숨이 붙어있단 말인가.
제드는 고개를 숙인 골렘에 다가갔다.
그러자 희미하게 들렸던 소리들은 더욱 선명해졌다.
“······크르르르. 나는······ 주, 죽을 수 없다. 아직, 아직 해야 할 일들이······.”
오싹.
제드는 등줄기를 내달리는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삶과 목표에 대한 무서운 집념. 그것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주변을 압도하는 강렬한 사념이 되어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만약, 제드가 고등한 정신세계를 확립하지 못했더라면 단숨에 그 사념에 휩쓸려 정신을 놓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제드가 박살이 난 탑승부 앞까지 다다르자, 짙은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황금색 눈동자가 명멸하고 있었다.
“제드······ 크······ 크레인······.”
카악. 겨우 그 말을 하고서는 피를 토한다. 골렘의 몸을 꿰뚫은 창은 그의 몸 절반을 앗아갔다. 그런데도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몹시도 특별한 생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발트 테바인, 시간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흐르는 법이다. 평화든 전쟁이든 그것은 이 시대의 무수한 의지가 만들어내는 결과다. 내가 네 죽음으로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 역시 그렇다.”
제드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발트는 제드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시대의 의지. 그리고 부름.
기묘한 일이었다. 이 시대의 운명은 분명히 그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 내가 아니라, 운명이 놈의 편에 서 있었는가? 아니, 애초에 정말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그만한 힘이 있었던가. 어쩌면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자문자답.
발트의 눈빛에 드리웠던 집착이 서서히 옅어졌다.
그렇게 믿고 있었던 건 바로 그 자신이었다.
자신에게는 힘이 있었기에.
보통의 인간들과는 달랐기에.
그리고 그의 계획은 지금껏 실패하지 않았기에.
그렇기에 그는 믿었던 것이다. 어떤 특별한 힘이 자신을 인도하고 있노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가 이 시대를 손에 쥐었는가?’
발트는 방관자로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목적을 위해서 불씨를 던져왔다. 하지만 제드는 다르다. 그는 시대의 전면에서 모든 것을 끌고 바꿔왔다.
그것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고 한다면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것은 순수한 인간이 아닌 그에겐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도, 드래곤도 될 수 없는 존재였다.
곧 발트의 사고는 끊어졌다.
그 순간, 제드가 날린 불꽃이 탑승부로 날아들었다.
콰아아앙!
폭발이 일어났고, 제드는 희미하게 느껴지던 발트 테바인의 생명이 완전히 끊어졌음을 알았다. 혈액추적의 각인이 조금 전에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공화국의 마법사들에게 그대의 시체가 놀아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게 내 최소한의 자비다.”
제드가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피로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쿠웅. 쿵. 아주 멀리서부터 진동이 느껴졌다.
공화국 수비대의 골렘이 당도한 것이다.
“싸움이 너무 길었군······.”
*
“허억. 허억.”
소년은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강하다. 너무 강해.’
파스칼은 눈앞의 적의 강함을 실감했다.
천재 검사. 공화국의 미래.
그런 과한 수식어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늘 겸손한 마음을 갖고자 했던 파스칼이건만, 이렇게 눈앞의 강적을 만나 명확한 실력의 격차를 느끼고 나니 충격이 앞섰다.
소대원들도 모두 쓰러졌다. 이제 남은 건 파스칼뿐.
‘도대체 어떻게 안투르프의 비전 검술을······. 단순히 도둑질했다거나 그런 수준이 아니야.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다. 깊이가 느껴져.’
10년······ 아니, 그 이상 안투르프의 파도검을 연마하고 벼려왔다는 게 느껴진다. 무엇보다도 그의 검술은 작금의 파도검에서는 볼 수 없는 전혀 다른 검형이 존재하였다.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간 다른 갈래의 검술처럼 말이다.
“후우우.”
파스칼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적을 눈앞에 두고 도망치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각오가 선 순간, 그의 대검에 오러가 휘몰아쳤다.
쩡! 쩌저적!
충격파와 함께 주변 대지를 휩쓰는 오러의 칼날.
둘의 그림자가 얽히고설키기를 반복하였다.
제법 치열한 접전처럼 보였으나, 그 싸움의 우열은 명확하였다.
꽝!
“크악!”
파스칼이 피를 토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금세 다시 몸을 일으켰지만, 왈칵 피를 토하는 모습. 얼굴은 창백했다. 밑천은 드러났다. 호흡은 거칠었고, 조금 전부터 파스칼의 몸에 상처가 드리웠다. 그럼에도 그 눈빛은 꺾이지 않았다.
자크는 그런 파스칼의 모습을 보면서 감탄하였고, 동시에 번뇌했다. 그는 안투르프의 후계에 관한 것은 지금껏 한 번도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지금 그 후계자가 당당하게 파도검을 연마하고서 창창한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걸 자신이 끊어내는 것이 옳은가.
그런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고뇌의 자격이 자신에게 없음을 아는 자크였다. 그는 이 시간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망령이었고, 그는 전혀 다른 존재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그저 존재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그의 염원을 이루어준 것은 제드다.
그렇기에 그 제드를 위해서 그는 할 일을 해야만 했다.
쿠웅.
자크가 내뿜는 기세가 변했다.
파스칼도 그것을 느꼈다.
‘이제 끝인가. 이건 못 막는다.’
고오오오.
공기가 요동쳤다.
자크가 치켜든 대검에서 오러가 소용돌이쳤다. 파스칼도 이에 맞서듯 젖먹던 힘까지 모두 짜내어 대검에 마나를 집중하였다. 자크의 그것에 비하면 훨씬 약한 기세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크가 먼저 달려나갔다.
콰앙.
1톤이 넘는 질량의 기사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허공에 오러를 쏟아내자, 그것은 성난 파도가 대지를 덮치는 듯한 광경을 연상하게 하였다. 그 앞에서는 파스칼의 어떠한 저항도 무의미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지축을 뒤흔들며 골렘이 끼어들었고, 강철의 방패가 파스칼을 보호하였다.
콰가가가각!
방패의 표면이 무섭게 갈려나가는 가운데, 자크가 바닥을 헤집어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적의 골렘이 나타났다는 얘기는 적의 증원군이 나타났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자크, 물러난다.’
아니나다를까, 곧 제드가 사념을 전달해왔다.
투구 속 자크의 녹색 안광이 예리하게 타올랐다.
쿠우웅.
땅을 진동하며 거대한 칼을 휘둘러오는 적 골렘. 그 움직임은 둔중하여 자크가 휘말리는 일은 없었다. 제드가 말했던 바를 이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자크의 발을 무겁게 했다.
그러나 자크가 고집을 부리는 일은 없었다. 제드로부터 흘러들어오는 마나의 흐름이 약해지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곧장 현장을 이탈하는 자크. 한 걸음마다 수 미터를 뛰어넘는 자크의 움직임을 쫓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스칼 중사!”
곧 마법사와 병사들 여럿이 달려왔다. 그들은 수비대 병력들이었다. 마찬가지로 강습대 소대원 출신인 그들은 소대원 태반이 죽은 광경을 목도하곤 신음을 흘렸다.
뉴레이그 수비대 중에서 제2 강습소대는 최강의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정예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이 이 지경이 날 줄이야.
“중사, 괜찮나!”
“······괘, 괜찮습니다.”
바닥에 널브러진 파스칼이 신음하며 대답했다.
오른쪽 눈부터 사선으로 골반에 이르는 흉측한 상처가 그의 몸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골렘이 아니었더라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그의 상처가 중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만 견뎌! 곧 사제가 올 거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절대, 절대 안 죽습니다.”
파스칼이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그렇게 대답했다.
죽을 수 없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파스칼은 계속 중얼거렸다.
*
콰아아앙!
길을 틀어막고 있던 공화국의 검은 골렘이 쓰러졌다.
상대가 나빴다.
도심의 북쪽 큰길을 틀어막는 골렘과의 교전.
제드는 현장을 빠져나가면서 공화국 골렘을 살폈다.
‘신형은 아니군. 하지만 내가 알던 초기형 골렘도 아니다. 확실하게 출력이 올랐다. 120마력 이상이다. 라인급 상은 되는 놈이야. 양산형 골렘의 출력까지 대대적으로 끌어올렸나.’
저택을 빠져나온 제드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골목의 말 위에 올랐다. 자크는 철수를 끝마쳤기에 이제 아우로렐에 붙은 적을 떨쳐내면 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게 쉽지가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줄줄이 계속해서 나타나는군.”
제드가 혀를 찼다. 대지의 진동이 끊이질 않았다. 이곳이 시가지였음에도 적 골렘들은 주저가 없었다. 이곳이 사람의 밀도가 높지 않은 귀족주거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나아가는 아우로렐의 뒤를 따라서 도심을 가로지를 때였다.
별안간 등줄기를 스치는 오싹한 감각에 제드가 몸을 틀었을 때였다.
콰아아앙!
바로 코앞에서 시뻘건 화염이 일었다.
바닥을 나뒹군 제드가 곧장 일어나 벽에 몸을 붙이고 눈을 치켜떴다. 푸른빛 광망이 일렁이는 눈동자. 하늘의 블라르가 이 주변을 훑었다.
‘마법사들이 포위망을 구축했다.’
제드가 낮게 신음했다.
아무래도 예상한 것보다 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게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콰직!
쿠우웅!
그 사이, 아우로렐이 또다시 눈앞의 골렘 한 기의 코어를 짓뭉개고 저택의 건물로 내던져버렸다.
먼지가 피어오르고 건물이 우르르 무너지는 가운데, 제드는 냉정하게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시작했다.
‘마나 소모가 크다. 적 골렘이 추가로 증원되기 전에 빠져나가야 하는데, 그러자면 적의 취약점을 뚫어야 한다. 문제는 적의 대비가 너무 탄탄하다는 건데······.’
제드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막 훔쳤을 때였다.
쾅!
건물이 무너지는 굉음의 너머에서 작은 폭음이 들렸다.
제드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하늘의 블라르가 그 폭음의 지점을 확인하였고, 이내 수백 미터 밖의 도심의 종탑 위에서 붉은빛이 점멸하는 것을 포착하였다.
제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그 사이 붉은빛이 다시금 터졌고, 그 일직선 상으로 제드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모습을 숨기고 있던 공화국 출신 마법사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버렸다.
이 정교하고도 섬세하며 무시무시한 마법은 제드가 아는 한 단 한 명밖에 사용하지 못했다.
“붉은 재앙. 베른 바일.”
전혀 생각지 못한 지원군이었다. 아마도 작전의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가게 될 때를 대비한 코라스의 준비이리라.
“코라스 렘. 그대는 정말로 기대 이상의 인재다.”
제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우로렐을 앞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