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척4
*
안투르프라고.
자크의 검은 투구 속에서 녹색의 안광이 흔들리듯 타올랐다. 설마, 그 이름을 여기서 듣게 될 줄이야.
자크가 동요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안투르프는 그의 뿌리였기 때문이다.
죽은 이후로 어떤 접점도 없었던 그 이름을 이렇게 긴 시간이 흐른 뒤에 조우하게 될 줄이야.
고국의 이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이제는 공화국이라는 어색한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안투프르를 잊었던 자크였다.
그리고 그 이름에 대한 동요는 제드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파스칼 안투르프. 푸른 늑대란 말인가?’
제드는 그야말로 허가 찔린 느낌이었다.
설마, 이곳에서 그를 만나게 될 줄이야.
푸른 늑대 파스칼 안투르프.
전생에 승승장구하던 토르가 제국의 침공을 격퇴하고 역전의 용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던 인물. 강습병 교리는 그의 전술로 집대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의 손에 죽은 제국의 골렘 마법사가 얼마나 많았던가.
푸른 늑대의 이름이 제국에 울려 퍼지기 시작할 즈음, 후방에서 지원만 맡았던 제드조차도 연이은 패배에 최전선에 직접 진두지휘를 하기 위해 나섰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전장에서 제드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푸른 늑대가 이끄는 소수 정예 강습병 부대는 단숨에 진형의 배후까지 침투해왔고, 미처 대응할 새도 없이 지휘부와 골렘 마법사들은 죽어 나자빠졌다.
마스터 급 기사를 필두로 한 소수정예의 돌파기동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절실히 깨닫게 된 제드는 그때부터 강습전 전술에 대항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였다.
고난의 싸움 끝에 파스칼의 강습전 교리를 깨부수고 승리를 거머쥔 제국이었지만, 그 과정은 몹시도 위태로웠다.
‘지금 그 역전의 검사, 파스칼이 눈앞에 있다.’
제드는 모든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발트 테바인이라는 당면한 적만큼이나 파스칼은 장래에 막대한 위협이 되어 나타날 존재였다.
‘자크 경, 그 적은 반드시 해치워야 한다.’
[······.]
자크가 침묵했다.
동요와 혼란.
‘자크 경, 망설일 시간이 없다!’
이 무렵의 파스칼이 어느 정도의 실력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건 위기이면서 동시에 기회였다.
머잖은 미래에 위험한 적이 되어 나타날 수 있는 적을 이곳에서 처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파스칼이 전의를 불태웠다.
“······대답은 충분히 기다린 것 같군. 좋다. 어차피 칼을 마주하고서 만난 마당에 대화는 필요하지 않다. 그대가 누구인지는 검을 통해 확인하면 되는 일.”
소년 파스칼은 호기롭게 소리치며 자세를 잡았다. 그 자세는 자크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자그마치 수백 년의 세월이었다.
나라가 망하고 만들어질 정도로 긴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안투르프의 비전 검술은 자크가 기억하던 모습과는 많이 다른 형태가 되어 있었다.
“차앗!”
소년의 대검은 빠르고 매섭다. 칼끝에서 여러 갈래로 일어나는 오러의 파도는 밀어닥치는 노도의 그것과 같았다.
자크도 반사적으로 오러를 일으켜 그 파도검에 대항했다.
카아앙.
오러가 충돌하여 흩어지면서 대검과 대검이 부딪친 순간, 불똥이 튀었고, 파르르 떨렸다. 파스칼의 푸른 눈동자에서는 전의가 무섭게 타올랐고, 자크는 그런 소년의 도전의식을 눈에 담았다.
단 일합만으로 자크는 알았다. 눈앞의 소년이 자신의 적수는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이 소년의 검에서는 사람의 냄새가 났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켜켜이 쌓아온 검술. 그것은 이름 모를 안투르프의 혈육들이 다음의 시대로 전해온 삶의 증거나 다름없었다.
동토의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검술의 완성이라는 단 한 가지의 염원 이외에는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던 자크였다. 그런 자크에게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분명하게 한 가지 감정이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부러움.
그러다 이내 전의로 바뀌었다. 그 긴 시간을 그저 존재만 해온 것이 아님을, 자크는 증명하고 싶었다. 안투르프의 이름 앞에서 말이다. 보라, 나의 검을. 나 역시 그 검술에 매달려왔노라.
그 순간, 투구 속 자크의 녹색 안광이 세차게 타올랐다.
“윽!”
쩡!
파스칼은 별안간 대검에서 밀어닥치는 힘에 튕겨 날아갔다. 그리고 다시 자세를 잡았을 때, 저 거대한 검은 기사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를 온몸으로 느끼고 전율하였다.
마스터에 이른 실력자가 뿜어내는 기세라는 것을 파스칼이 언제 느껴 보았을까.
바로 그때, 멀리서부터 달려온 2소대원들이 포위 진형으로 자크를 둘러쌌다.
“1:1을 고집할 때가 아니란 것은 파스칼 중사도 알고 있을 테지.”
“······예, 조금 전에 분명히 알았습니다. 제가 홀로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것을 말입니다.”
“좋아, 모두 방심하지 마라. 마스터 이상이라고 생각해.”
*
‘이제야 진심인가.’
이대로 자크가 파스칼을 베어버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었지만, 조금 전의 반응을 보건대 그건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야겠지.’
이곳에 온 목적은 발트 테바인 때문이었다.
제드는 눈을 치켜떴다. 자욱한 흙먼지 너머로 몸을 날린 발트는 지금 이 순간,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린 자신의 골렘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골렘의 뒤로 숨기라도 하려는 것인가.’
제드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우우우.
반쯤 가슴팍이 주저앉은 드레이크 급 골렘을 두들기던 아우로렐이 고개를 돌렸다. 제드의 의지를 따라 지척의 흙먼지 안으로 몸을 숨긴 발트를 잡아들이기 위함이었다.
“짓뭉개라, 아우로렐.”
제드의 명령과 함께 아우로렐이 거대한 발을 들어 올렸다가 바닥을 내리찍으려고 할 때였다.
조금 전까지 반쯤 무너진 별채 건물에 누워있던 적 골렘이 불쑥 몸을 일으키더니 아우로렐에게 달려들었다.
콰아아앙!
수십 톤이 넘는 두 골렘이 바닥으로 나뒹구는 순간, 온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매섭게 진동하였다.
훅 밀어닥치는 흙먼지에 제드가 미간을 모았다.
‘저 골렘은 코어가 망가지고도 움직인단 말인가?’
아우로렐의 연이은 공격에 가슴팍이 완전히 주저앉은 것을 목도한 제드였다. 그리고 그걸 확인하였기에 발트를 처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 골렘은 기동한 것이다.
머리의 뿔 아래로 번뜩이는 황금색의 안광은 여전히 코어가 기동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쿠구구궁!
우우우.
바닥에 깔린 아우로렐이 드레이크를 밀어내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였다.
흙먼지 속에서 황금빛 비늘을 온몸에 두른 발트가 튀어나오더니 그대로 드레이크의 몸을 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제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아우로렐의 힘에 짓눌리면 제아무리 드래곤의 피로서 탄생한 호문쿨루스라고 해도 버틸 재간이 없을 터였다. 그러다가 제드가 눈을 치켜떴다. 뒤늦게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리를 스친 것이다.
“탑승형 골렘?”
바로 그때, 짓뭉개진 드레이크의 가슴팍 언저리의 장갑을 억지로 벌리는 발트의 모습이 보였다. 으지직 다 뭉개진 장갑판은 이윽고 개방되었으니, 제드는 그 생각이 맞아떨어졌음을 알았다. 조종과 탑승을 병행할 수 있는 골렘이라니.
“그리 두지는 않는다.”
제드가 곧장 마법을 영창했다.
지지지지징!
하늘 위로 수십 개의 마탄이 엄청난 속도로 나타났고, 그 마탄 하나하나에 바람의 칼날이 휘감겼다.
머잖아 공간을 찢어발기며 쏟아지는 마탄의 세례. 하나하나가 무시하기 어려운 위력을 자랑하는 마법이었다.
그러나 뜯어낸 장갑 내부로 모습을 감추는 발트를 저지하기에는 다소 늦었다.
콰콰콰쾅!
드레이크의 장갑판을 두드리는 마탄이 연쇄적인 폭발을 일으키며 폭발하는 가운데, 제드는 별안간 드레이크의 소극적이었던 움직임이 변했음을 느꼈다.
드드드드.
‘조금 전보다 출력이 올라갔다.’
반쯤 짓눌렸던 드레이크가 아우로렐의 힘에 대응하면서 거의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탑승형 상태에서 출력을 한계까지 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골렘이었단 말인가?’
조금 전까지 아우로렐의 상대가 안 됐던 골렘이었다.
그런데 발트가 탑승한 순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드드드드.
힘을 겨루는 두 골렘. 그 기세가 비등하다.
발트의 마나가 골렘의 출력을 한껏 끌어올린 것이리라.
[제드 크레인, 날 거듭 놀라게 하는구나. 이 정도로 궁지로 몰아넣다니. 그대는 역시 특별하구나. 이런 형태의 골렘은 위대한 유산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령의 가호를 이런 식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순수하게 경이롭다.]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발트의 사념.
[그렇기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 나와 손을 잡아라, 제드 크레인. 나는 위대한 종족이 만들어낸 존재. 인류의 등대 역할을 기꺼이 맡을 것이다. 그런 나와 그대의 경이로운 능력이 하나가 된다면 찰나의 평화 따위가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는 위대한 진화를 이루게 될 터. 눈을 뜨고 더 큰 것을 봐라.]
쩌렁쩌렁 발트의 의사가 고압적으로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제드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내 머릿속에서 꺼져라.”
아주 가늘게 이어졌던 발트와의 정신연결이 그 순간 완전히 끊어졌다. 제드의 코에서 주륵 코피가 흘러내렸다.
지난 3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전생에 다다랐던 6써클의 경지에 도달했던 제드였다. 확장된 정신세계만큼이나 실제적인 마법의 역량도 그에 다다랐건만, 조금 전 이 강제적인 정신연결은 사전에 차단할 수가 없었다.
‘놈의 마법 수준은 나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복도에서 발트가 부지불식간에 사용한 마법은 제드가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고등한 수준의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제드는 정통 마법사가 아니다. 그가 쌓은 지식으로서 열게 된 대마법사의 길은 골렘 마법사로서 길. 그리고 골렘전이라면 제드는 패배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아우로렐!”
우우우우.
제드의 부름에 아우로렐이 힘차게 울부짖었다.
드드드드.
아우로렐이 힘겨루기를 하다가 이윽고 거대한 견갑으로 드레이크를 밀쳤다.
콰앙!
굉음과 함께 주르륵 밀려나는 드레이크.
그러나 금방 자세를 잡더니 몸을 낮추고 양팔의 거대한 손톱을 겨누며 땅을 묵직하게 박찼다. 거리를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옳다. 아우로렐이 사용하는 무기의 종류는 하나같이 대형이었다. 랜스나 해머처럼 말이다. 단순한 출력과 힘은 여전히 아우로렐이 우위에 있었기에 무기를 재구축하는 순간, 거리가 벌어진 상황에서는 단 일격에 승부가 날 가능성이 높았다.
아우로렐이 견갑을 분해, 재구축하여 랜스를 만들던 찰나의 순간, 방대한 마나를 머금은 드레이크의 발톱이 견갑을 재구축을 방해했다.
으지지직.
재구축이 되다 만 넝쿨들이 바닥에 쿵쿵 떨어졌다. 오른팔의 견갑을 잃은 아우로렐이 균형을 잃은 것처럼 비틀댔지만, 이내 오히려 무게를 실어 왼쪽 견갑에 가시를 세워 드레이크를 향해 부딪쳤다.
콰아아앙!
예상치 못한 공격이었는지, 드레이크가 주르륵 바닥을 짓뭉개며 뒤로 물러났다. 외부 장갑이 너덜너덜해진 모습. 훤히 열린 가슴만큼은 어떻게든 지키는 모습이었다. 그러더니 발톱을 세워 아우로렐의 가슴으로 찔러넣는다.
콰드득.
우우우우.
아우로렐이 울었다. 자칫 코어가 위험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파고든 드레이크를 힘으로 찍어 짓누르자, 무릎이 반쯤 꺾였고, 아우로렐은 그 순간 무릎으로 드레이크의 상체와 얼굴을 올려쳤다.
콰아아앙!
장갑판이 으깨지며 흩날렸다. 드레이크의 거대한 몸이 바닥에 나가떨어지는 가운데, 아우로렐이 뒤로 쿵쿵 밀려나며 자세를 다잡았다.
짧은 시간 사이에 치열하게 오간 합이었다. 그리고 이 싸움 속에서 제드는 마나가 엄청난 속도로 고갈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우로렐과 자크. 두 존재가 거의 전력을 다해서 싸움을 벌이는 상황. 이 상황은 제드가 가장 피해야 할 상황 중 하나였다.
‘자크가 상대하는 쪽엔 마스터 급은 없다. 하지만 상대들의 수준이 높다.’
전력을 쏟아내는 자크를 어찌할 수준은 아니었다. 이미 둘이 팔다리가 잘려나가 전투불능이 되면서 싸움은 기울었다. 하지만 정작 파스칼만큼은 전투 속에서 점점 더 기세가 오르고 있었다.
‘괴물 같은 놈······ 이런 상황에서 천재성을 드러내다니.’
제드의 눈빛이 험악하게 빛났다.
머잖아 당도할 수비대의 골렘까지 생각한다면 이젠 여유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발트의 숨통을 끊어놓고 이 현장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바로 그때, 드드드. 반쯤 뭉개진 얼굴의 드레이크가 몸을 일으켰다. 내부가 보이는 탑승석의 발트. 상태는 썩 안 좋았다. 머리가 깨진 듯 핏물이 흘러내리며 얼굴이 온통 새빨갰던 까닭이다.
“제드 크레이이이이인!”
발트가 포효하더니 이내 드레이크가 쾅 땅을 내디디며 내달렸다. 아우로렐이 있는 곳으로 내달린 게 아니었다.
땅을 무섭게 짓뭉개며 쇄도하는 곳에는 제드가 있었다.
골렘을 조종하는 마법사를 해치운다면 골렘은 멈춘다. 그것은 강습전 교리의 원칙이었다. 발트 테바인의 선택은 전술적 결단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콰앙! 쾅!
지축이 뒤흔들리고, 잔디가 뿌리째 뽑혀 튀어 올랐으며 흙먼지가 솟구쳤다.
용의 형태를 하고서 쇄도하는 거인의 앞에서 제드는 활짝 열린 탑승부의 발트 테바인을 똑바로 눈에 담았다.
삶을 포기한 것도, 두려움에 몸이 얼어붙은 것도 아니었다.
제드는 무수한 전장을 겪으며 생과 사를 넘어온 베테랑 군인 출신이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발트가 내린 그 전술적 결단이 치명적인 실수라는 것을 말이다.
“끝이다.”
제드가 있는 곳까지 불과 백여 미터 남짓의 거리를 두고.
콰지지직!
드레이크는 꿰뚫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