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1
“후우.”
서류 더미를 훑던 라니아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가벼운 편두통이 일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해가 중천이었다.
카로스가 걷고 뛰어다니는 나이가 된 이후로 그녀는 다시 정치전선에 뛰어들었다.
마도공학이라는 미래의 비전을 토대로 다양한 부서의 설립과 관련 법안이 3년 사이에 많이 정리된 배경에는 바로 여왕인 라니아가 있었다. 그녀가 수년 사이에 이렇게 국정에 열정적으로 변한 건 남편인 제드 때문이었다.
‘더 좋은 나라, 평화의 시대를 일구겠다는 그의 의지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다.’
그 생각에 다다랐을 때, 라니아는 어떤 시대적 사명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진작 죽었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여왕이 되고, 새로운 시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일련의 일들은 기적이라고 해도 좋은 것이었다.
별안간 그녀는 그 사실에서 어떤 거대한 운명의 흐름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는 정말로 열성적으로 정치에 몰두했다. 오죽하면 코피도 종종 쏟을 지경이었다.
똑똑.
별안간 노크 소리에 졸고 있던 라니아가 깨어났다.
“폐하, 아리에입니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리에.
그녀는 여왕의 최측근인 시녀였다.
“무슨 일이야?”
“조금 전에 파악한 사실인데, 국서께서 정원에 계십니다.”
“뭐라고?”
라니아가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왔다.
커다란 복도의 모퉁이를 지나 회랑으로 나왔을 때, 라니아는 멈춰 섰다. 회랑의 계단에 앉아 있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칼에 찔린다고 해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냉철한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그 시선의 끝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몹시도 따뜻했다.
방을 나와서 복도를 지날 때만 해도 섭섭한 마음이 앞섰던 라니아였지만, 그 얼굴을 본 순간 그런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부드럽게 풀린 얼굴로 라니아가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곧 제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똑바로 보았다.
“폐하, 잘 지내셨습니까.”
“당신이 내 옆에 없었는데 그랬을 리가 없죠, 제드.”
제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라니아를 부드럽게 안았다.
“그거 알아요? 당신이 레지앙에서 이곳에 찾아온 게 벌써 4개월 만이라는 거.”
“벌써 4개월이나 흘렀다니. 꽤 길었군요.”
“네, 길었어요. 너무 긴 시간이었다고요.”
라니아는 투정부리듯 제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완연한 어둠이 드리운 시각이었다.
어질러진 침대 위에 얽혀 있는 남녀가 있다.
제드와 라니아였다. 채 가시지 않은 방 안의 열기만이 이 방에서 휘몰아친 일들을 짐작게 할 따름이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 때문에 그레즈에 왔나요?”
제드의 단단한 가슴팍에 기댄 채로 라니아는 물었다. 제드는 절대로 이유 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그레즈에 왔다는 것은 뭔가 용무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야 폐하와 왕자가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풋. 마음에도 없는 소릴······.”
“제 진심을 믿지 못하시는군요.”
제드가 그녀의 등을 따라 허리로 손을 부드럽게 쓸자, 라니아가 움찔 몸을 떨었다.
“아이, 간지러워요. 알았어요. 믿을게요. 그냥 심술을 부려봤어요. 내가 당신을 의심할 리가 없잖아요.”
라니아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고 해도 좋았기 때문이다.
제드는 그런 라니아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그녀의 행복을 깨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조금 전에 했던 말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라니아는 그걸 알았다.
“괜찮으니까 말해요. 또 다른 이유가 있지 않나요.”
“폐하,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침내 꺼낸 이야기에 라니아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전쟁.
또 다시 전쟁이란 말인가.
그녀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
대수림 분쟁 이후로 대륙 동부는 라이곤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질서가 만들어졌다.
그 뒤로 라이곤은 군비증강 및 국지도발에 해당하는 행위를 제외하면 외교적으로 평화적인 노선을 추구하였고, 각국은 이에 협조적이었다.
이대로 장기적인 평화의 시대가 열리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평화의 시대 뒤에는 전쟁의 불씨가 여전히 존재했다. 바로 렌시아 공화국의 새로운 골렘 설계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제드는 그 골렘의 특별한 사양에 대응하기 위해서 새로운 골렘의 연구에 매진했다.
그 뒤로 벌써 3년이었다. 라이곤의 정보국은 그 이후로도 열심히 첩보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렌시아 공화국에서 새로운 골렘에 관한 정보를 찾아낼 순 없었다.
마치, 지난 3년 전에 발표되었던 그 정보가 전부였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꼭꼭 숨는다고 해도 모든 걸 전부 감출 수는 없는 법이다. 골렘의 연구와 개발은 하늘에서 별안간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하였다.
새까만 어둠이 드리운 이곳을 밝히는 것은 작은 마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일한 입구이자 출구인 입구의 계단으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림자를 등지고 나타난 인물은 정보국장 코라스였다.
“그는 안에 있나?”
“예, 기다리고 있습니다.”
코라스의 물음에 깎듯이 대답한 사내는 뒤에 따라온 인물을 힐긋 보곤 이내 관심을 끊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코라스가 안쪽의 밀실로 들어갔고, 그 인물이 뒤따랐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밀실에는 토실토실 살이 오른 중년인이 있었다. 그는 불안한 기색이 역력한 듯 보였다.
“다, 당신들은 누구요.”
“겁먹을 것 없소. 오늘 당신과 만나기로 한 책임자가 바로 나요.”
“귀, 귀하가 책임자라고? 그러기엔 너무 젊지 않소.”
“젊음이 어떻게 흠이 되겠소. 중요한 건 귀하의 안전을 내가 보장할 수 있다는 것과 약속했던 것 이상의 보상을 지불할 수 있다는 사실 아니겠소?”
“······그걸 약속할 수 있는 신분이란 말이오?”
“그렇소.”
“크흠. 그렇다면야······.”
힐긋 사내는 코라스의 옆에 있는 인물을 보았다. 로브 차림에 어딘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젊은이다.
“그는 마법사이오?”
“귀하께서 오늘 제공하고자 하는 그 물건을 읽기 위해서는 마법사가 있어야 하지 않겠소. 말이 나온 김에 바로 물건을 보여주시겠소?”
살이 오른 사내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품에서 작은 보석 따위를 꺼냈다. 옆에 잠자코 서 있던 젊은 마법사가 막 그것에 손을 뻗자, 사내는 깜짝 놀라서 꺼내던 물건을 자기 품으로 가져갔다.
“자, 잠깐······. 정말로 약조는 지키는 것이오? 이것만 받아가고 날 배신할 수도 있는 게 아니오!”
“이보시오, 라림······.”
코라스가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목소리를 깔고 입술을 뗐을 때였다. 마법사가 별안간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 말처럼 우리가 배신할 예정이라고 해서 그대가 지금 그것을 나에게 넘기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있는가?”
“뭐, 뭐라고? 가, 감히!”
분기탱천한 사내가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후드 아래에서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목도한 순간, 사내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어설프게 밀고 당기는 협상 따위는 하려고 하지 않는 게 좋아. 나는 상인이 아니다. 순순히 넘기고 대가를 받든지, 그게 아니면······.”
“히익! 너, 넘기겠소. 넘기겠소!”
젊은 마법사의 눈빛에 깃든 살기를 본 사내는 겁에 질려 다급히 보석을 건네왔다. 마법사의 눈동자처럼 푸른색으로 빛나는 그 보석은 일견 사파이어와 닮아있다.
곧 뚱뚱한 사내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밀실에서 나갔다. 이제 이곳에는 코라스와 마법사뿐이었다.
“아직 돌려보내지 마라, 코라스 경. 기억의 회랑에 정말로 우리가 필요한 그 정보가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알겠습니다.”
코라스는 깍듯하였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그의 옆에 있는 마법사는 그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든 장본인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제드 크레인. 그게 그 젊은 마법사의 정체였다.
‘기억의 회랑. 기억의 순간을 저장하는 장치.’
그것은 마법사가 자신의 기억 일부를 기록하는 옛 마법의 방식을 아티팩트로서 활용한 것이었다.
저장할 수 있는 기억의 시간은 아무리 비싼 아티팩트라고 해도 약 5분 남짓.
그러나 이 아티팩트는 라이곤의 마법부가 가진 마도공학력의 정수를 뽑아내 만든 것으로 약 8분간의 기억을 저장할 수 있었다.
제드는 기억의 회랑을 열었다.
곧 저 사내가 보고 들은 그 순간의 기억이 눈앞에 펼쳐졌다.
*
기억의 재생은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시작된다.
눈이 빛에 익숙해지듯 곧 주변의 풍경이 변하였고, 이내 윙윙 울리듯 귓가에 소리가 들렸다.
“······계약은 그대로 이행할 수밖에 없소.”
“빌어먹을. 최근 철광에서 캐내는 철의 양 자체가 줄었단 말이오. 이번엔 정말로 같은 조건으로는 계약을 연장할 수 없소!”
“조건에 변경은 없소. 안 된다면 계약은 여기까지일 뿐.”
눈앞의 사내는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며 일어났다.
그러자 이 기억의 회랑을 기록한 장본인인 라림은 분한 듯 몸을 바르르 떨어댔다.
“제기랄······.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들 마음대로군!”
자리에서 일어난 라림은 이를 갈면서 문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쿠우웅!
“어, 어어! 뭐, 뭐야······!”
별안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축이 흔들리자, 바닥에 쓰러진 라림의 시야에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산자락에서 자욱하게 치솟는 흙먼지가 눈에 들어왔다.
“저건 설마······.”
치솟는 흙먼지 사이에서 새까만 가시 따위가 불쑥 튀어나와서 먼지를 찢어발겼고, 머잖아 또다시 굉음과 함께 땅이 뒤흔들렸다.
“고, 골렘. 골렘이구나!”
라림이 허둥대며 소리칠 때였다.
무엇인가가 흙먼지 너머에서 붉은 안광을 내뿜으며 불쑥 나타났다. 두 개의 뿔을 이마에 단 그 골렘은 뾰족한 견갑과 펄럭이는 붉은 망토를 달고 있었다.
“며, 몇 번인가 봤던 골렘과는 다른 놈이야. 역시······ 역시 새로운 골렘이다. 아무도 모르게 새로운 골렘을 개발하고 있었던 거다.”
라림은 확신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바닥에 깔린 골렘은 거칠게 움직이며 저항하였지만, 그 두 뿔의 골렘은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콰아앙.
땅이 또다시 진동하는 가운데, 골렘들의 거친 움직임에 절벽의 돌무더기와 흙더미가 쏟아져 내렸다.
“으아악!”
라림은 몸을 둥글게 말고 비명을 질렀다.
저편에서 고함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사, 살려줘!”
라림이 흙더미에 깔려서 소리치는 것으로 기억의 회랑은 끝이 났다.
제드는 눈을 천천히 떴다.
기억의 회랑에 기록된 모든 기록을 다 확인한 것이다.
“훗. 이 정도 지척에서 이런 광경을 목도하고도 죽지 않은 게 용하군. 잘도 기절한 척을 했어.”
“각하, 이대로 그를 보낼까요.”
“보내줘라. 그의 말은 모두 사실이다. 대가를 지불하도록.”
“알겠습니다.”
코라스가 고개를 조아리고 나갔다.
제드는 생각에 잠겼다.
“기어이 그 골렘이 드디어 완성됐나.”
3년 전, 설계도 일부만으로 알게 되었던 골렘의 존재.
그러나 그 이후로는 그 골렘에 관한 정보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공화국은 그 신형의 정보를 꼭꼭 숨겨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
렌시아 공화국 극동의 오지. 그곳에 골렘의 생산설비가 있음을 파악한 정보국은 긴 시간을 들여서 정보를 파악했고, 광산의 관리자 중 한 명을 매수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바로 라림이었던 것이다.
코라스가 곧 밖의 일을 정리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코라스 경, 극동의 루이즈 광산 쪽이면 누가 관리하지?”
“동부 방면의 인사권은 발뭉 의원이 꽉 잡고 있습니다.”
“과연, 발뭉 의원인가. 공화국의 유명인사로군.”
“옛, 그렇습니다.”
“관련 브리핑 준비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어쩐지 느낌이 좋았다.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처럼 자취를 감춘 발트 테바인을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제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