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1
오멜 공국과의 평화조약이 체결되고 라이곤이 군대를 뒤로 뺀 후에야 북부의 땅에 감돌던 군사적 긴장감은 완화되었다.
구체적인 조약의 내용 이행을 하기까지는 세부적인 절차상의 논의가 이루어질 터였으나, 그건 제드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약 보름에 걸쳐서 느긋하게 군대와 함께 움직인 제드는 그레즈에 복귀하였다. 개선식의 반응은 열렬했다.
연전연승. 이제 라이곤은 명실공히 동부대륙에 상대를 찾아볼 수 없는 강대국으로 거듭난 것이다.
왕정에 대한 신민들의 충성심은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제드는 지금 느긋한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나라 안팎으로 좋은 소식만 들려요. 모두 제드 당신 덕분이에요.”
“폐하께서 저를 신뢰하고 맡겨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으로는 우리 아이를 위해서라도 해야 했던 일입니다.”
“그렇게 말해줘서 기뻐요. 전 지금 너무 행복하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 말에 거짓은 없다.
제드는 느낄 수 있었다.
그저 멀게만 느껴졌던 평화의 기조는 성큼성큼 다가와 이제 썩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았다.
앞으로도 여러 문제는 발생할 터였지만, 그 문제들은 전쟁의 불씨가 되는 일은 극히 드물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생겼다.
‘내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북부로는 오멜 공국과의 교류를 넓힐 것이고, 동부로는 독립한 부르크 연방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여 토르가의 성장을 억누른다.
제드가 힘의 증명을 통하여 형성한 이 동부대륙의 국제질서의 흐름을 깨뜨릴 수 있는 곳이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남부의 강국인 렌시아 공화국뿐이었다.
제드는 곤히 잠든 라니아를 뒤로하고서 침실을 나섰다. 복도의 희미한 불빛을 따라서 서재로 나온 그는 닫힌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새벽 공기를 맞으며, 제드는 꺼지지 않은 도시의 불빛들을 눈에 담았다.
“이제 전생과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국제질서의 흐름도 그렇고, 제드 그 자신의 운명 역시 그렇다. 그렇기에 렌시아 공화국도 그리 무서운 적은 아니었다.
당장 이번 오멜 공국과의 싸움 이후, 공화국에서 승전을 축하하는 외교사절이 찾아온 것만 봐도 그렇다. 힘의 저울이 어디로 기울었는가는 분명하였다.
“나의 계획에 변수가 될 존재는 오직 발트 테바인뿐이다.”
도심을 눈에 담는 제드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이튿날, 제드는 그레즈의 도처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정보 길드의 마스터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넓은 회의실 공간에 모인 수십 명의 길드 마스터들은 다소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였다.
그럴 수밖에. 그들은 지금 다른 이도 아니고, 크레인 대공의 이름으로 불려 온 것이었다.
“그쪽은 뭐 아는 거 없나?”
“그러는 그쪽이야말로 뭐 아는 거 아니야?”
“갑자기 그 높으신 분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왜 한 자리에 모은 거지?”
“어이! 혹시 어떤 머저리 같은 놈이 왕실에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라도 한 거 아니야?”
온갖 이야기들이 오가면서 회의장은 금세 떠들썩해졌다.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눈을 부릅뜨는 자들부터 침묵을 지키는 이들까지 모인 이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각양각색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바로 오늘 그들을 이 자리에 불러 모은 장본인인 제드 역시 있었다. 평범하다 못해 다소 후줄근한 그의 외관은 도저히 이 나라의 정점에 있는 인물로서의 그것이 아니다. 그게 바로 노림수였다.
제드가 그들 사이에 껴있는 이유는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쓸만한 인재를 물색하기 위함이었다.
“이봐. 넌 못 보던 얼굴인데, 어디 출신이야?”
불쑥 제드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내. 이십 대 후반 즈음으로 보이는 사내는 눈이 작고 다소 유약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그레즈 남부 지구 출신이다. 떠돌이야.”
“아, 그쪽이었나. 그럼 애들 데리고 장난질하는 쪽인가?”
“내가 뭘 하고 살든 그쪽과는 상관없지 않나?”
“뭐, 그건 맞는 말이지.”
사내가 어깨를 으쓱할 때였다.
머잖아 회의실 앞쪽의 문이 열리면서 검은 제복의 기사와 함께 나타난 젊은 청년. 그의 등장과 함께 떠들썩했던 회의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그리고 청년은 무표정한 얼굴로 상석에 앉았다.
“모두 자리에 앉도록.”
젊은 나이임에도 무겁고 카리스마가 있는 목소리였다. 좌중은 그 말을 따라 자리에 앉았다. 제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메르센 경이 아주 잘하는군.’
지금 저곳에서 제드를 연기하는 인물은 바로 메르센이었다. 그는 제드와 비교하면 훤칠하고 키도 더 컸으며 몸도 다부졌기에 제드를 알고 있는 사람이 보면 혹시라도 착각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선 제드를 아는 이가 없었다.
“내가 그대들을 이곳에 부른 이유가 무엇인지 알겠나?”
메르센이 제법 제드의 말투를 흉내 내며 무겁게 장내를 훑었다. 태반이 그 시선을 감히 마주하지 못하였다. 소수를 제외하면 말이다.
“정보 길드의 리더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은 까닭은 각하께서 저희에게 시킬 일이 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그때, 처음 자리에 모였을 때부터 언성을 꽤 높였던 중년인이 공손한 태도로 대답하였다.
“정확하다. 본국은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정보는 어둡다. 눈과 귀가 꽉 막힌 것과 같으니, 국제질서의 중심에 있음에도 각국의 사정에 관해 아는 바가 적다. 이는 장기적으로 국가의 경쟁력에 큰 차질을 빚는 문제가 될 것이다.”
메르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내의 분위기는 변했다. 저 젊은 원수가 누구란 말인가. 여왕의 남편인 국서였고, 육군으로 통칭하는 왕국 군부의 정점에 있는 권력자였다.
그런 그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는 얘기나 다름없었다.
즉, 이건 기회란 얘기다.
“만약 각하께서 이 나라와 왕실, 그리고 신민을 위하여 헌신할 기회를 저 프라운 막심에게 맡겨만 주신다면 기꺼이 각하의 눈과 귀가 되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각하! 저 역시 그와 같은 각오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저마다 나서며 언성을 높였다. 처음의 그 침묵은 온데간데없이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운 상황 속에서 제드는 그저 말없이 면면들을 살필 따름이었다.
‘쭉정이를 걸러내면 남아나는 게 없을지도 모르겠군.’
다른 사람의 위에 서서 통제하고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역할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그릇이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제드가 이번에 그들에게서 기대하는 것은 바로 ‘정보’였다.
‘단순히 부서가 아니라, 정보국으로 더 확장된 개념으로서 크게 수백 수천 명을 엄격히 관리하고 통제해야 할 자리다. 사람을 꿰뚫어보는 혜안이 없어서야 그 자리는 맡을 수 없는 법.’
곧 메르센이 손을 든 순간, 소란은 가라앉았다.
“지금부터 묻고 대답을 듣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시간이 얼마나 소요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이 이 자리에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자는 언제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도 좋다.”
*
대개 질문은 국제질서에 관한 것들부터 시작하여, 라이곤 내부의 공개되지 않은 정보들에 관한 것들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따위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이와 같은 시험은 큰 정보 길드단체를 운영하고 있는 쪽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정보는 돈이나 다름없었기에 사람을 많이 부릴 수 있는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 자원의 태반은 서부의 레지앙으로 유통되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으로······.”
그들이 말하는 정보들은 틀린 것도 있었고 정확한 것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좀도둑 무리의 네트워크 정도에 불과한 작은 길드의 마스터들 태반이 돌아갔고, 이제 이곳엔 이십여 명 남짓만이 남아있었다.
“잠깐의 쉬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모두 충분히 쉰 후에 다시 역량 평가를 재개하도록 할 것이다.”
메르센이 회의장을 나서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던 장내의 분위기는 한껏 풀렸다.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답변을 한 중년의 인물은 득의양양한 얼굴이었다. 단적으로 보더라도 중책은 그가 맡는 게 당연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짐작한 듯, 대여섯 명이 그에게 다가가 잘 보이기 위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쪽은 끝까지 자리를 지킬 생각인 모양이군. 무슨 특별한 사정이라도 있나?”
제드가 힐긋 고개를 돌렸다. 예의 그 청년이었다.
“탐이 나는 자리다. 자리를 지키고만 있어도 새로운 단체의 일원이 될 수 있을 테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내 생각은 그렇지 않은데. 그 각하께서는 그렇게 만만하신 분이 아니야.”
제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그렇게 말하는 청년의 눈빛이 찰나 간 희번덕거렸기 때문이다.
“그쪽 생각은 다르다는 건가?”
“물론, 다르지. 각하께서는 오직 능력만을 보시는 분이야. 그런 분께서 이미 알고 있는 정보를 우리에게 아는지 모르는지, 그런 단순한 시험을 할 리가 없어. 진정으로 그분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한다면 이 자리, 이 순간, 이 시험의 본질을 꿰뚫어야겠지.”
그 말은 거침이 없었다. 제드는 점점 더 흥미롭다는 표정을 했다. 이 겉으로 보기엔 껄렁대는 것처럼만 보이는 청년이 하는 말이 제법 자신이 이 자리를 만든 취지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본질이란 게 무엇인지, 그쪽은 그걸 안다는 얘기처럼 들리는데.”
“그전에 나도 좀 묻자고. 일방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은 공평하지 않잖아. 안 그래?”
“좋아. 말해봐. 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나?”
“물어본다기보다는······ 그래, 사실 확인? 그 정도가 좋겠군. 그쪽 말이야. 아주 특이해.”
“특이하다고 판단한 이유는?”
“오늘 이 자리에 수십 명이 모였어. 그 중 4분의 1정도는 모두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었지. 뭐, 그거야 그럴 수 있어. 근데 모두가 한 가지 상황에는 똑같이 반응했다. 바로 대공 각하께서 이 회의장에 들어오셨을 때였지. 당연히 각하께 집중할 수밖에 없었어. 그래야 했고.”
제드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계속해봐.”
“근데 말이야. 단 한 사람은 그렇지가 않더라고. 바로 그쪽이지. 각하가 오기 전부터 그랬고, 오신 후에도 그랬어. 그리고 이 파격적인 자리의 취지를 들은 이후에도 마찬가지. 그쪽은 각하의 말과 행동이 아니라,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있던걸. 어때, 내 말이 틀렸나?”
“아니, 정확해.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냐. 나는 쓸데없이 말을 돌려서 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꿀꺽.
청년은 마른 침을 삼켰다.
별안간 눈앞에 있던 제드의 분위기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저 눈빛······. 저것은 일개 부랑자의 무리를 끌고 다니는 자가 가질 눈동자가 아니다. 그것은 만인의 위에서 호령하고 이끄는 지도자의 그것이었다.
틀림없다.
창백하게 질린 청년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크레인 대공이시자, 왕립 육군의 정점이신 원수 각하를 뵙습니다.”
순간적으로 장내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좌중은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제드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 적막을 깼다.
“눈썰미가 좋군.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지?”
“제 이름은 코라스 렘입니다.”
“코라스 렘이여, 그대는 나를 위해, 폐하를 위해,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할 생각이 있는가?”
“기꺼이 이 목숨, 바치겠나이다!”
코라스가 쿵 소리가 나도록 땅에 이마를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