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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 마법사의 회귀-124화 (완결) (100) (100/124)

강대국의 증명8

*

쿠우웅.

팔이 잘리고 몸이 반쯤 잘려나간 후에야 기동을 멈춘 골렘.

안광은 빛을 잃었고, 바닥에 주저앉은 골렘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 골렘이었다.

오르노벨 기습전은 라이곤 왕국군의 완벽한 승리로 막을 내렸다. 수적 열세의 상황이었고, 기습전을 대비되어있지 않았던 마르쿠스 길드연합이었다. 다급히 골렘들이 움직이며 전열을 갖추었으나, 다급히 형성된 전열은 엉성하였다.

라이곤의 베테랑 육군 기갑중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물론, 마르쿠스 길드연합도 그냥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최정예인 붉은 송곳니 골렘부대를 앞세워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스타피르와 스타벳에서 당도할 증원군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나 스타피르 방면에서 당도한 퀘베스 길드연합군은 포병대의 지원을 받는 소수의 기갑중대 및 마법부 특무대가 길을 틀어막고 합류를 방해했다.

그리고 스타벳 방면의 트라키아 길드연합군은 제드의 아우로렐이 완전히 분쇄되고 말았다. 이 충격적인 소식은 해가 떴을 무렵 오멜 대공의 귀에도 들어갔다.

“아, 아니······ 이게,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

“아무리 기습을 받았다고 해도 오멜 공국이 자랑하는 3대 거대 길드의 군대가 이토록 쉽게 무너져도 되느냔 말이야!”

대공이 측근들을 향해 답답한 듯 소리쳤다.

라이곤 왕국과 싸워도 공국의 전력이 절대로 밀리지 않을 것임을 모두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하였던 그들이었으나, 이 예기치 못한 사태 앞에서는 다들 할 말이 없었다.

대공은 겨우 진정하고서 침착하게 말했다.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싸움의 때를 노리다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트라키아, 마르쿠스, 퀘베스가 어디 보통 길드연합인가? 오멜 공국을 떠받드는 든든한 기둥인 그들이라면 재기는 금방일 터. 다시 기회만 잡는다면······.”

“대공 전하! 이젠 상황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무모하게 싸움을 이어나갈 것이 아니라, 하루라도 빨리 강화를 맺어야 할 때입니다.”

“제 뜻도 그와 같습니다! 적의 군사력은 예상을 아득하게 웃돌고 있습니다. 만약 때를 놓친다면 공국의 피해는 전과 비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측근들은 연이어 무릎을 꿇고 말렸다. 골렘의 수가 어느 정도 비등한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일방적인 결과가 나왔는데, 불리한 상황에서 싸우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쉬이 짐작할만하다.

“이익! 그렇다면 그대들은 이렇게 싸움을 그만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선전포고 이후에 유예도 없이 이런 비열한 공격을 일삼는 저 라이곤 왕국의 작태를 보면서도!”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릎을 굽혀야 할 때입니다. 미래를 헤아려주십시오.”

빠드득.

대공이 이를 갈며 몸을 떨었다. 어찌나 분하였는지 붉으락푸르락하였고, 멋들어지게 기른 콧수염이 거세게 떨렸다.

“후우우. 좋다, 그대들의 뜻은 잘 알겠다. 사절을······ 오르노벨에 사절을 보내겠다.”

오멜 대공은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결단을 내렸고, 화친의 사절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잘 모르고 있었다.

활은 시위를 떠났다.

이 싸움은 그들이 끝내고 싶다고 해서 끝낼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사절이 찾아왔단 말이죠.”

“옛, 각하.”

그 무렵, 제드는 오르노벨에 들어와 있었다.

“대처가 빠르군요. 더는 승산이 없다고 내다본 모양이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로톤 경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스타리아 지방의 양도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조건이라고 생각됩니다.”

“하하하.”

제드가 로톤의 말을 듣고 웃었다.

로톤이 말한 스타리아 지방의 양도가 오멜 공국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조건임을 알기 때문이다.

코노마 강 하류 유역인 스타리아 지방 전체를 잃으면 앞으로 남쪽으로 타타르 습지와 대수림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과 더불어 신생 부르크 연방에 대한 영향력도 상당 부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막강한 군사강국인 라이곤과 국경을 맞댄다는 것도 공국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얘기일 터였다.

당연히 그와 같은 조건을 지금 들이민다는 것은 오멜 공국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로톤 경은 전쟁을 더 이어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겁니까?”

“굳이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3대 길드연합은 치워냈지만, 아직 대의회를 주최한 대공의 군대는 남아 있습니다.”

로톤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제드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로톤은 오멜 공국이 다시는 라이곤을 향해 칼을 들이미는 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

‘힘의 차이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겠지.’

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경의 뜻대로 하세요. 조금 더 길어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각하.”

제드는 로톤과의 대담을 마치고 반쯤 무너져서 도심의 정경이 훤히 보이는 성채의 끝자락에 섰다.

상업을 바탕으로 융성한 도시는 망가져 있었다. 마르쿠스 길드연합군의 골렘부대가 끝까지 저항하면서 시가지에서 전투가 벌어진 까닭이다. 이미 전열이 다 무너지고 싸움이 끝난 마당에도 그와 같은 분전을 벌이다니.

“붉은 송곳니. 그는 직접 만나봤습니까?”

“예, 아주 거칠고 날카로운 칼이더군요. 오멜 공국에 돌려보낸다면 훗날 반드시 본국에 위협이 될 존재입니다.”

“로톤 경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더 궁금하군요. 그를 만나봐야겠습니다. 사절은 경에게 맡기도록 하지요. 그 대신, 붉은 송곳니는 제 주관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옛, 알겠습니다.”

*

오르노벨의 지하감옥.

오랜 시간 사용하지 않았던 이곳은 오늘 수백 명이 넘는 인원으로 가득하였다. 모두 마르쿠스 길드연합 출신의 병사들이었다.

“너 이 새끼, 죽여버린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시면 뭐든 하겠습니다!”

온갖 고함이 울려 퍼지는 감옥의 내부.

제드는 그 사이를 걸어갔다. 뒤따르는 병사들은 께름칙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람이 내뿜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거북한 까닭이다. 하지만 제드는 그게 익숙했다.

인간이 내뿜는 선명한 적의와 광기는 전쟁이라면 절대로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감옥의 안쪽에 다다르자, 다른 철창보다 훨씬 두껍고 삼엄하게 감시를 받는 감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엔 팔다리가 묶인 채로 벽에 기대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늘 속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분명한 붉은 머리칼. 붉은 송곳니라고 불리는 용병 게프가 바로 그였다.

“······누구냐.”

“제드 크레인이다.”

“제드 크레인이라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게프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적의가 소용돌이치는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라이곤 왕국의 그 명성 자자한 두 명의 군주 중 한 사람이 그대란 말이지. 큭큭. 젊다는 얘긴 들었다만, 이건 완전히 애송이가 아닌가.”

“감히.”

곁에 있던 기사가 눈을 부릅뜨고 나서자,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는 제드.

“제법 기세가 좋구나. 그래서 지금 그 눈앞의 애송이에게 패배한 기분은 어떤가.”

“흐흐흐. 썩 나쁘진 않다. 할만큼은 했다!”

“과연. 그 말에 동의한다. 그대는 할 만큼 했다. 본디 용병출신이었다지. 공국보다 더 나은 대우를 해주지. 라이곤 왕실에 충성을 바치는 게 어떤가?”

“뭐야?”

게프의 눈빛이 무섭게 빛났다. 제드의 속내를 가늠하려는 듯한 의심의 눈초리. 하지만 제드의 표정엔 변화가 없다.

“내가 우습더냐?”

“그깟 일이나 하려고 이곳에 올 만큼 내 시간이 무가치한 것처럼 보이느냐?”

“흥. 조금 전까지 칼을 겨누던 적이다. 우습지도 않은 소리를 나불대는군. 그것이 진심이라면 더더욱 들을 가치가 없는 소리다.”

“선택은 자유다만, 이거 하나는 알려주지. 지금 그대에게 남은 선택지는 둘 중 하나뿐이라는 걸 말이야. 왕실에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면 그대를 살려서 공국에 넘길 생각은 없다.”

“마음대로 해라!”

게프는 여전히 심드렁한 태도다.

따르지 않으면 죽는다는 말에도 말이다.

물론, 제드도 그 말을 듣고 그가 갑자기 마음이 바꾸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저 정도의 경험과 실력, 그리고 담력은 그냥 쌓이는 게 아니다. 무수한 전장을 넘고 수없이 사선을 오갔으리라.

“따르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로군.”

제드가 무미건조하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이봐. 내 부하들은 어떻게 되는 거냐.”

“붉은 송곳니는 이곳에서 사라진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을 텐데.”

“너······.”

게프가 으드득 이를 갈아댔다. 하지만 그뿐이다. 마나를 억제하는 구속의 사슬을 벗어날 방법은 요원했다.

“억울한가?”

“크으윽!”

“날짐승 같은 눈동자로군. 부하를 끔찍하게도 생각하는구나. 명성만큼의 명예와 의리는 있는 모양이군. 좋아, 그럼 기회를 주지. 1:1로 싸우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듯하던데, 게프 발렌타인.”

“라이곤의 겁쟁이 놈 중에 나와 1:1로 맞붙을 만큼 기개가 있는 놈이 있기는 하단 말이냐!”

“그 기회를 주겠다. 나의 기사와 1:1로 맞붙어 이긴다면 붉은 송곳니 전원과 포로로 잡은 공국의 병사들은 모두 해방하지. 대신 그대는 무엇을 걸겠나?”

“후회하지 마라. 게프 발레타인. 나를 걸겠다.”

제드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

오르노벨 성채 내부의 연무장.

이곳엔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제드의 주관하에 오늘 이곳에서 붉은 송곳니 게프 발렌타인과 그 부하 및 포로 전원의 석방을 걸고서 내기를 벌이겠다는 것 때문이었다.

제드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아니, 가급적 많은 이들이 이 광경을 똑똑히 보기를 바랐다. 이 사실은 이윽고 오르노벨을 넘어 오멜 공국 전역에 널리 알려지게 될 테니까.

맑은 오후였다.

연무장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모였다. 전투 이후 대기 중이던 장교과 기사, 그리고 병사들이 태반이었다.

로톤 예하의 근위대 출신 기사단부터 골렘 마법사, 그리고 지휘관급 장교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붉은 송곳니 용병단원과 포로 중 기사급 실력자들이 손과 발이 결속된 채로 그 광경을 목도하고 있었다.

“준비는 되었나?”

“난 언제든 준비되어 있다. 약속을 지키길 바란다, 제드 크레인. 당신이 명예라는 걸 아는 자라면 말이야.”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왕가와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그대도 자신이 한 말을 지키길 바란다.”

“물론이다. 하지만 내가 지는 일은 없을 거다!”

게프가 오만하게 소리쳤다.

근거가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예로부터 라이곤 왕국의 기사단의 실력이 형편없다는 건 모르는 이가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하지만 오늘 그가 상대할 존재는 그런 일반적인 기사가 아니었다.

절그럭.

회랑에서 새까만 갑주를 걸친 거구의 존재가 걸어나왔다. 자기 몸만한 거대한 대검을 등에 걸친 채로. 검은 광택이 감도는 기사의 등장에 장내는 침묵에 감겼다.

자크가 내뿜는 묵직한 존재감 때문이다.

크레인 대공의 그림자. 대공의 기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그 존재를 제대로 아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고위급 관료와 장교들은 한 가지는 알았다. 저 검은 기사 자크가 얼마나 대단한 실력자인지 말이다.

“풀어주도록.”

제드가 지시를 내렸고, 곧 게프는 구속에서 벗어났다. 그는 자신의 칼과 방패를 손에 쥐고서 앞으로 천천히 나왔다. 시선은 자크에게 꽂혀 있었다. 상대가 심상찮은 실력자라는 걸 눈치챈 것이다.

‘라이곤에 이런 실력자가 있었단 말인가.’

게프의 눈동자가 호승심으로 불타올랐다.

그러나 그 눈동자에 깃든 호승심이 절망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결이 시작되고서 단 열 합.

그 열 합을 겨루었을 때, 게프는 벽을 느낄 수 있었다. 눈앞에 이 거구의 기사는 그의 실력으로는 넘을 수 없는 존재였다.

콰지직!

마지막 일격.

방패와 함께 쇄골부터 늑골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치명상에 피를 토하며 널브러진 게프. 칼을 지지대로 삼아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지만, 검은 기사는 어느새 그의 눈앞까지 와있었다.

“······빌어먹을.”

그것이 끝이었다.

정신을 잃은 게프를 뒤로하고서 검은 기사는 돌아섰다.

장내는 충격에 잠겨 있었다.

붉은 송곳니 게프 발렌타인을 이토록 간단히 제압하다니.

알만한 사람들은 짐작했으나, 이곳에는 그렇지 않은 이가 태반이었다. 그리고 이 웅성거림 속에서 제드는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이것으로 자크의 명성은 날개가 돋친 듯 퍼져 나갈 것이다. 붉은 송곳니라는 쓸만한 패를 손에 넣고, 라이곤 왕국에도 마스터급 기사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계기로도 활용한다.

‘나아가서는 공국군의 사기를 낮추기까지 하겠지.’

제드가 굳이 이 번거로운 일을 벌인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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