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의 증명6
*
콰아아앙!
불꽃이 튀고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곳은 오르노벨.
오멜 공국 최남단의 도시였다.
“마, 마스터! 피하셔야합니다!”
“······.”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흔들리는 성에서 여전히 몸을 피하지 않고 버티는 로커스. 지팡이를 쥔 뼈만 앙상한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선전포고와 동시에 급습이라니. 이게 말이 된단 말이냐. 이런 짓은 경우에 없는 일이다. 최소한의 유예라는 국제법이 있거늘!”
노인의 그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다. 하지만 지금 그와 같은 발언은 공허할 따름이다.
쿠구구궁.
또다시 땅이 진동하였다.
이제 잠시도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마스터를 모셔라!”
“받아쳐라! 마르쿠스라는 벽이 절대로 낮지 않음을 저 패악한 무리들에게 보여주란 말이다!”
호위가 로커스를 들쳐메고 다급히 성을 빠져나가는 가운데, 도심지 남부에서는 수십 기의 골렘이 얽히고설키는 접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콰콰콰콰콰!
땅이 갈려나가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쓰러질 것처럼 휘청대던 골렘은 가까스로 몸을 다잡았다.
“괜찮나, 코프!”
“옛! 괘, 괜찮습니다!”
곧장 대답하는 코프지만, 코피가 줄줄 흘렀고 한쪽 눈은 핏물로 벌게져 있었다. 탑승형 골렘의 치명적인 단점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러나 젊은 기사 코프는 곧장 자기 부대의 대열로 복귀했다. 자기가 빠진 순간, 5인 1개조의 골렘 대열은 금세 무너지기 때문이다.
푸카아앙!
그 순간, 귓전을 때리는 날카로운 쇳소리.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아군 골렘 한 기가 몸통이 꿰뚫려 쓰러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빌어먹을!”
이를 갈아대던 코프는 이내 무섭게 쇄도해오는 거대한 적 골렘을 눈에 담았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거대한 스톤 골렘이 수 톤은 족히 되는 검을 크게 휘둘러왔다.
콰아아앙!
“이런 곳에서 죽을까 보냐!”
코프가 밀려드는 공포를 억지로 이겨내려는 듯 고함을 질러대며 마나를 내뿜었다.
어둠 속에서 어지럽게 얽히는 골렘들의 광경을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수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사령부를 두고 있었다. 로톤을 중심으로 한 라이곤 왕립 육군의 수뇌부였다.
“조금 전 좌익이 적의 골렘 2개의 제대를 격파했습니다.”
보좌관이 이 일대의 지도에서 말 두 개를 치웠다. 수십 개의 백과 흑의 말이 어지럽게 난립한 지도의 상황.
단순하게 수적으로만 봐도 유리한 것은 흑색 말이다.
“순조롭군. 기습작전이 주효했어. 적은 분단됐다. 좌익은 고립됐고, 우익은 밀려 나갔어. 중앙이 잘 버텨주고 있다만, 날개가 무너진 후에는 자연히 포위될 것이다.”
“각하, 스타피르 방면에서 적의 증원군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음, 퀘베스 길드연합 쪽 군대인가. 생각보다 빠르군. 거리를 생각해보자면 이미 적들의 군대가 꽤 움직였겠어.”
“그 수가 적지 않습니다. 골렘만 근 100기에 육박합니다.”
“문제는 없다. 충분한 방비는 해두었다. 주공은 오르노벨의 병력을 완전히 격파하는 걸 우선시한다. 아무리 늦어도 새벽이 다 가기 전까지는 오르노벨의 마르쿠스 길드연합의 골렘 부대를 다 격파해야만 한다.”
“옛, 그렇게 전파하겠습니다.”
전령들이 말에 올라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나가는 가운데, 보좌와 참모들은 이내 공국 남단의 도시 중 서쪽에 있는 스타벳을 가리켰다.
“각하, 현재와 같은 진형으로는 동쪽에서 오는 적의 증원군까진 대응할 수 있다고 해도 스타벳에서 밀고 들어오는 적군에게는 속수무책입니다. 완전히 배후와 지휘부가 드러난 셈이니 그대로 허를 찔릴 것입니다.”
“맞습니다. 기습전의 이득은 상당히 본 셈입니다. 지금은 전열을 가다듬어 좌우에서 진격해오는 적을 상대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스타벳의 기갑전력이 저희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을 경우, 큰 낭패를 볼 것이 틀림없습니다.”
참모진의 의견은 타당했다.
대수림을 닷새 안팎으로 횡단하였고, 선전포고와 동시에 기습전을 퍼부으면서 초반부터 강한 공세로 적잖은 이득을 취한 라이곤 육군이었다.
여기서 더 욕심을 부리지 말고 전열을 다듬기만 해도 이후 전황이 유리해질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거기다 전황 자체가 스타벳의 적 증원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처럼 전열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도 맞다.
다만.
“아니, 이대로 오르노벨의 마르쿠스 길드연합의 전력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여기서 쐐기를 박을 것이다. 스타벳의 트라키아 길드연합의 군대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로톤은 그렇게 단언하며 새로운 말 하나를 스타벳 방향에 쿵 내려놓았다. 그 말은 다른 말들과 비교해도 훨씬 컸다.
“아군의 배후가 위험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곳엔 원수 각하께서 계신다.”
“아!”
그 이상의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라이곤 왕국의 육군 원수는 오직 한 명뿐이었다.
제드 크레인.
그가 스타벳 방면을 맡았다면, 그곳의 적이 본대의 배후를 노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
스타벳의 트라키아 길드연합군은 해가 지자마자 움직였다.
골렘 부대만 해도 거의 100기에 다다랐고, 보병부대도 거의 10,000명에 육박하는 대군이었는데도 출진 속도는 아주 빨랐다.
쿠웅. 쿵.
수십 기의 골렘들이 한꺼번에 빠른 속도로 움직이자, 일대는 지진이라도 난 것 같았다.
푸드드득.
숲의 새들이 이 요란스러운 진동에 하늘 높이 우르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밤은 금방 찾아왔고, 공기는 빠르게 식었다. 북쪽의 서늘한 바람이 내려왔다.
‘로커스, 그 늙은이가 만만한 인물은 아니다. 기습을 당했다고 해도 마르쿠스의 기갑병단에는 실력자들이 대거 포진해있어. 그곳엔 붉은 송곳니도 있질 않은가.’
트라키아 길드연합의 마스터 하이만은 초조한 기색으로 손톱을 뜯었다. 최대한 희망적인 관측을 해보았지만, 오르노벨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는 만큼, 조바심이 났다. 오르노벨의 첩보가 당도하는 건 앞으로 두어 시간 이내이리라. 하지만 지금은 그 한 시간, 한 시간이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대공도 이 사실을 접했겠지.”
“예, 지금쯤이면 소식이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최악에 우리가 오르노벨에 당도할 시점에 이미 마르쿠스 길드연합의 군대가 무너졌다고 한다면 우리는 곧장 물러나야만 한다.”
“그때는 스타벳으로 돌아옵니까?”
“아니, 전선 자체를 뒤로 물려야 해. 스잔틴······ 아니, 브랑크까지는 물러날 생각을 해야 할 거다. 그리고 일이 그 지경이 된다면 전쟁을 더 해나갈 생각은 그만둬야 한다.”
“······.”
아직 젊은 후계자는 그 말이 썩 불만스러운지 눈살을 찌푸릴 따름이었다. 하지만 하이만은 냉정하게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거대 3대 길드연합 중에서도 마르쿠스는 객관적으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마르쿠스 길드연합의 군대가 박살이 난 상태로 싸움을 이어나간다?
‘리스크가 너무 크다. 승리를 기대하기 어려울 거야. 어쩌면 생각을 잘못했는지도 모른다. 내전부터 국가전까지 치렀던 라이곤 왕국의 기갑부대는 이미 전투의 베테랑이나 다름없다. 자칫 싸움이 더 길어졌다가는 대수림의 지배권을 용인하는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상인집단은 결국 손익을 가장 먼저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만은 상황이 최악으로 흘러갔을 때의 상황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겠지만, 오르노벨의 전투. 여기서 일을 그르친다면 그때는 상황을 뒤집어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우우우우우.
오싹.
별안간 들려온 소리에 하이만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새 마차는 멈춰 있었고, 군대는 전투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냐.”
“아, 알 수 없습니다.”
밖의 호위병에게 물었지만, 알 수 없는 건 병사도 마찬가지다. 그러는 사이, 우거진 숲이 별안간 사아아아아 사나운 춤을 추듯 흔들렸다.
“아니야. 이 소리가 아니야. 다른 소리였다. 훨씬 기분 나쁘고 소름이 돋는······.”
하이만이 눈살을 찌푸릴 때였다.
쿠웅.
묵직하게 울려 퍼지는 땅의 진동.
이런 굉음의 종류는 하나뿐이었다.
“골렘. 골렘이다! 숲이다. 대형을 갖춰라!”
땅에 울려 퍼지는 진동과 소음으로 저 너머에 정체불명의 골렘이 있음을 파악한 골렘부대의 지휘관이 명령을 내렸다.
쿠쿵. 쿵.
다급히 움직이며 대열을 갖춰 포위하는 골렘들.
수십 기의 골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 광경은 일견 장엄하기까지 하였다.
“적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기회로군요. 적이 병력을 분산했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다.”
후계자 노엘이 혈기왕성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하이만의 표정은 어두웠다.
‘군대라고 하기엔 진동이 적었다. 소수 부대야. 합류를 저지하는 교란작전인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콰앙!
별안간 굉음과 함께 저편에서 골렘 한 기가 바닥에 쓰러졌다.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골렘 다수가 빨려 들어가듯 움직였다.
“무슨, 무슨 일이냐!”
하이만이 물었지만, 그 질문에 답해줄 사람이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아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콰앙!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 연이어 굉음이 들려오고 있다는 것. 즉, 숲을 끼고 교전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마스터, 일단 뒤로 물러나십시오. 휘말릴 수 있습니다.”
“아, 알겠다.”
하이만의 마차가 방향을 돌려 뒤로 빠지고 있을 때였다.
투콰아앙!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귀를 후벼 파는 듯한 불쾌한 소음이었다.
하이만이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는 보았다. 골렘이 하늘로 붕 떠올랐다가 바닥에 널브러지는 광경을 말이다.
콰콰콰쾅!
“으아아아악!”
마차가 휘말리며 하이만은 몸이 떠올랐다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숨이 턱 막히는 고통 속에 밖으로 기어나온 그는 피를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끄으응.”
그리고 보았다.
우거진 숲 속에서 녹색의 안광을 불태우며 그곳에 당당히 서 있는 존재를 말이다.
우우우우우.
그것은 낮게 울었고.
콰아아앙!
순식간에 지척에 있던 트라키아 길드연합의 골렘 한 기를 잡아서 땅에 메다꽂아버렸다.
“저, 저건 괴물이란 말인가······.”
아우로렐은 존재감부터가 달랐다.
체구도 전고도 공국의 골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머리 하나하고도 반 이상은 차이가 났으며, 덩치 역시 그렇다. 하지만 진짜 차이는 바로 숨겨진 힘에 있었다.
쿵쿵쿵!
아우로렐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사방에서 달려드는 공국의 골렘들. 하지만 그 순간, 땅을 쾅 내려찍는 아우로렐. 땅이 진동하면서 땅이 흔들렸고, 그 순간을 아우로렐은 놓치지 않았다. 등에 메고 있는 거대한 랜스를 뽑아서 팔에 결합, 그대로 가장 가까운 골렘의 몸통을 관통,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골렘의 몸뚱어리를 잡아서 내던져버렸다.
콰콰콰쾅!
자그마치 수십 톤이다. 그 엄청난 무게에 휩쓸린 골렘들은 그대로 나자빠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공국의 골렘은 탑승형 골렘. 내부에 가해진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단숨에 여러 기의 골렘을 전투불능에 빠뜨린 아우로렐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움직였다.
“빠, 빠르다!”
쾅! 쾅쾅!
수십 미터를 단숨에 주파하는 아우로렐이 육중한 몸으로 땅을 쾅 박차고 뛰어올라서 일어서는 골렘들을 다시금 가격했다. 쩍쩍 부서지고 짓눌리는 골렘들. 그 공격 한번에 탑승부가 다 찌그러졌다.
“사, 산개해서 파상공격을 퍼붓는다. 놈은 하나다!”
트라키아 길드연합의 각 전투부대가 넓게 흩어지면서 포위진형을 갖추고 덤벼왔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무의미하게 그들의 공격은 아우로렐의 두꺼운 견갑을 뚫지 못했다.
콰드드드!
“바, 방패로 균형을 무너뜨린다!”
그 대안도 먹히지는 않았다. 방패로 밀쳐도 밀쳐지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골렘과는 파워가 달랐다.
우우우우!
아우로렐이 울부짖으며 커다란 손을 휘둘러 적 골렘들의 탑승부를 정확하게 짓이겨놓았다.
콰지직!
칼날처럼 거대하게 자란 손아귀는 바위조차도 우습게 부쉈다.
단 한 기.
고작 단 한 기의 골렘이 적 수십 기가 넘는 적 골렘 군단을 유린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압도적이로군. 재앙신. 재앙신이라고 불렀던가.”
제드는 대수림의 요정들이 했던 그 말을 떠올렸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지금 적들에게 있어 아우로렐은 재앙, 그 자체나 다름없을 테니까.
“그들이 다시는 나의 숲을 넘보지 못하도록 공포를 그 영혼에 단단히 새겨주도록 해라, 아우로렐.”
제드는 차분하게 명령했고.
우우우우우우우.
숲에서 태어난 재앙신은 울부짖음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