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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 마법사의 회귀-124화 (완결) (97) (97/124)

강대국의 증명5

*

우거진 대수림의 길목.

저 앞으로 요정들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들은 요정족의 인도자가 보내준 길잡이였다.

대수림을 지키기 위해서 병력을 데리고 대수림을 넘어야겠다는 제드의 말에 별 거부감없이 수락했다. 그건 제드로서도 처음엔 다소 의아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인간의 관점이다. 요정은 약속한 것을 지키는 종족. 이것이 대수림을 지킬 방법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일 테지.’

여러모로 요정은 신비로운 존재들이다. 꽉 막힌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의외의 융통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라이곤의 기갑전력은 열린 대수림의 길을 따라 빠른 속도로 횡단했다. 미로처럼 얽혀있던 숲은 쫙 뻗은 대로처럼 펼쳐져 있었고, 한나절이 채 지나기도 전에 그들은 생명의 줄기라고 불리는 대수림의 강가에 다다랐다.

“흐음, 강폭이 넓군요. 이대로 넘어가려면 도강 방법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법사들을 전부 동원한다면 길어도 이틀에서 사흘 안에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마법사들이 나서려고 하자, 제드가 그들을 제지했다.

“아니, 기다린다. 지금 우리의 길잡이는 요정들이야.”

제드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정령의 기운이 요동치는 걸 말이다.

‘시작된다.’

드드드드.

별안간 땅이 흔들렸다.

“무, 무슨 일이지.”

“전원 전투태세를 취하라!”

“허둥댈 것 없다. 길잡이가 길을 열고 있는 것뿐이야.”

제드가 그들을 진정시키는 사이, 강 저편의 길목에서부터 두터운 넝쿨이 엮이기 시작하더니 그것이 다리가 되어 이곳까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게 요정의 정령술인가.”

마법부 소속의 마법사들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마나의 고고한 흐름은 느껴지는데 어떤 마법적 징조나 징후도 없이 그 일련의 과정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찌 알까. 지금 그들이 지나왔던 길조차도 요정들이 정령술로 숲을 보듬어 길을 만들었음을 말이다.

“다시 이동한다.”

수백 줄기로 얽힌 넝쿨은 탄력적이면서도 단단한 다리가 되어 주었으니, 수십 톤이 넘는 골렘이 하나씩 지나가는데도 굳건하게 버텨주었다.

‘지금과 같은 속도라면 대수림을 완전히 횡단하기까지는 앞으로 기껏해야 한나절. 길을 돌아서 선전포고가 이행되기까지는 며칠의 유예가 남을 터.’

“로톤 경.”

“옛, 각하.”

“이대로 길잡이를 따라 움직인다면 오르노벨의 목전에 두게 될 겁니다. 적어도 한나절 안에는 말입니다.”

“빠르군요. 정말로 대수림을 횡단할 수가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대수림은 항상 안개가 드리운 아주 위험한 곳이라고 들었는데, 이토록 안전하다니 지금까지 들었던 이야기들이 다 거짓말처럼 느껴집니다······.”

“숲의 종족이 우리를 적으로 인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어쨌든 저는 작전계획대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내 눈은 이곳의 전역을 살피고 있을 겁니다. 저 하늘 위에서 말이죠.”

제드는 하늘을 가리켰다. 석양이 지면서 붉게 물든 하늘, 그곳엔 푸른 새가 배회하고 있었다.

*

숲을 횡단하는 라이곤의 기갑전력과 떨어져 왼쪽 길목으로 나아가는 제드의 움직임은 날렵했다. 그에겐 이 대수림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세계수의 가지와 접촉한 이후부터인가. 이 숲의 존재감······ 아니, 호흡이라고 부를 그런 감각이 피부로 느껴진다.’

제드는 우거진 숲의 길을 전부 꿰뚫고 있는 것처럼 거침없이 움직이며 나아갔다.

곧 그런 제드의 감각의 저편으로 한 존재감이 잡혔다.

“발키리 에델노르.”

“제드 크레인.”

건조한 인사였다.

제드는 고개를 들었다. 새까만 어둠이 내린 우거진 나뭇가지 너머로 선명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대수림의 축복을 받는 존재. 바람의 정령으로부터 가호를 받는 요정이 그곳에 있다.

바람에 안긴 채로 부드럽게 내려앉은 에델노르가 제드를 물끄러미 눈에 담고 있었다.

“제드 크레인, 혼자, 다른 곳. 길잡이, 말해 줬어.”

“싸움은 단 한 곳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야. 적들은 많고, 분열되어 있다. 다른 방향을 노려올 테지. 그때 그들의 날개를 잘라내는 것이 내 역할이다.”

“혼자?”

“그러는 편이 훨씬 더 극적일 테지.”

에델노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극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이다.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대수림의 안에서 조용히 기다리며 지켜보도록. 약속은 지킨다. 대수림과 요정을 지키는 것. 그것이 내가 한 약속이었다.”

“······.”

에델노르는 제드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내 녹색으로 일렁이는 눈동자로 제드가 나아가던 길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드드드드드드.

우거진 나무가 에델노르의 의지에 호응하여 좌우로 흩어지듯 물러났다.

“고맙군.”

제드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 길을 따라 나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을 뒤따르던 에델노르의 기척은 완전히 사라졌고, 제드는 이제 단독으로 숲의 동서부로 계속해서 움직였다. 밤의 어둠은 제드에게 큰 제약이 되지 않는다. 숲과 정령의 감각을 읽는 그에겐 길이 훤히 보이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새벽이 지나가도록 숲을 거침없이 달려나간 제드는 머잖아 숲의 끝자락에 다다랐다.

“타타르 습지.”

이곳부터는 대수림의 지역이 아니라, 미지의 땅인 중부 밀림에 해당하는 영역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쭉 나아간 북부의 땅에는 오멜 공국의 최남단 세 개의 도시 중 하나인 스타벳이 있었다.

제드는 희미하게 밝아오는 하늘을 눈에 담았다.

“실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머잖아 치러질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질 때까지는 이 평화로운 풍경을 질리도록 감상할 수 있으리라.

“나와라, 아우로렐.”

제드의 말과 함께 그의 뒤쪽으로 쩌억 공간이 벌어지면서 5미터의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진 아우로렐이었다.

우우우.

기분 좋은 듯한 울음에 제드도 미소 지었다.

상위 정령의 개체로 거듭난 아우로렐이었지만, 사념으로서 말을 전달하기보다는 울음으로서 표현하는 건 여전하였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구나, 아우로렐.”

우우.

“그래,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 이 대수림이야말로 네가 더욱 새롭게 거듭난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제드의 말에 호응하듯 아우로렐이 천천히 몸을 굽혔다. 제드와 키를 맞추려는 것 같은 노력이었다. 제드는 그런 아우로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머잖아 큰 싸움이 있을 거야. 그대, 네가 이곳을 지켜야겠다. 나와 이 숲, 그리고 널 위해서 말이야.”

우우우우우.

아우로렐이 아까보다 크게 울었다. 옹이구멍에서 타오르는 녹색의 안광이 무섭게 타올랐다.

*

늦은 시각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온 중년인은 연신 혀를 찼다.

그의 신분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리듯 그의 주변엔 기사로 보이는 인물이 여럿이었다.

마차에 오른 중년인은 혀를 찼다.

“쯧쯧.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다는 것도 모르다니.”

“벌써 네 번째인데도 거의 진전이 없습니다.”

“지휘권은 전후처리에서 공의 배분과도 연결되는 문제인 만큼, 의견이 쉽게 모이지는 않을 줄 알았다만, 마르쿠스 쪽이 도무지 조금도 양보할 기미가 안 보이는군. 지휘권 양도를 원한다면 무엇이든 내놓아야 얘기가 되는 게 아닌가!”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 같습니다만······ 마르쿠스의 마스터가 너무 완고한 모습입니다.”

“정확하다. 늙은이가 나이가 들면서 더 고집스럽게 변했어. 그 정도면 후계자를 둘 법도 한데, 아직도 현역을 고집하는 것부터가 그런 셈이지. 젠장. 이러다가 쓸데없이 돈만 더 축내게 생겼군!”

중년인은 착잡한 표정을 했다.

군대는 돈을 잡아먹는 괴물이나 다름없다. 그나마 평소에는 밥값을 하니까 상관없다지만, 지금은 한 곳에 틀어박혀서 그냥 시간과 음식만 축내고 있질 않은가.

“대공이 대의회를 주재하여 일을 진행하였으니,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골치 아프군. 거대 길드끼리 한 곳에 이렇게 모여 있으니 되는 것도 없고 말이야.”

중년인은 오멜 공국 3대 거대 길드연합 중 하나인 트라키아의 마스터였다.

하이만 잭.

그는 시가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마차를 가득 메웠다.

마차는 새벽이 지나가도록 달렸고, 아침이 될 즈음 스타벳에 다다랐다. 트라키아의 군사병력은 지금 이곳에 모여 있었다.

“으음. 이제야 도착했나.”

마차에서 내리는 하이만은 피로함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몸을 풀었다. 편치 않은 곳에서는 잠깐도 머물지 않는 그의 성격상 새벽을 달려 돌아온 셈이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옳았다.

그가 다시 눈을 붙이고 불과 네 시간.

전령이 다급히 스타벳으로 찾아왔으니, 그는 비몽사몽 간에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였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라이곤 왕국이 선전포고를 해왔습니다.”

이 생각지도 못한 소식에 트라키아의 수뇌부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저들이 먼저 선전포고를 해오다니.”

“아니, 대체 이런 경우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중립지대를 멋대로 영토로 만든 것이 정당하다는 게 아닙니까.”

하나같이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 하지만 정작 길드 마스터 하이만은 오히려 훨씬 냉정해진 듯한 모습이었다.

어째서인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라이곤의 선전포고가 단발적으로 이루어졌을 리가 없다는 그런 강한 확신이 들었다.

“오르노벨의 상황을 살펴라. 그리고 라이곤의 캄페르 쪽에 주둔한 병력에 다른 변화가 없는지도 확인해.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라! 선전포고를 한 이상, 언제 전투를 벌여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야.”

하이만이 사납게 고함을 쳤다.

그리고 반나절이 흘렀을 때, 그는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음을 알았다. 해가 지기 시작했을 무렵, 전령이 스타벳에 당도한 것이다.

“오르노벨이 공격을 받았다고······?”

라이곤 왕국의 기갑전력은 그들보다 한 템포는 더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동태에 관한 첩보의 보고는 없었다. 첩보는 아직이냐!”

하이만이 소리쳤을 때였다.

수십 분의 격차를 두고 라이곤 왕국군이 주둔하고 있는 캄페르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첩자로부터 연락이 당도했다.

“약 닷새 전 캄페르의 적 기갑병단이 대수림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닷새, 닷새라고······?”

하이만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단 얘기는 라이곤 왕국의 기갑부대가 불과 사흘 안팎으로 대수림을 횡단하여 오르노벨을 침공해왔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대수림을 그런 말도 안 되는 속도로 횡단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다 하이만은 이내 정신을 번쩍 차렸다.

지금은 가능과 불가능을 따질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장 골렘 부대를 출진 준비시켜라. 최대한 빨리 오르노벨로 간다! 서둘러!”

수뇌부가 다급히 달려나가는 가운데, 하이만은 작전지도를 눈에 담았다.

‘허를 찔렸다. 우리는 기습전에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 만약 이 기습으로 마르쿠스 길드연합의 골렘 전력이 허무하게 무너진다면 그때는 이 싸움, 한 번에 끝날 수도 있다.’

이젠 손익을 저울질할 때가 아니었다. 자칫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도 몰랐다.

“제드 크레인······. 이게 놈의 방식인가?”

하이만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는 아직 감히 짐작조차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운명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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