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의 증명4
*
시간은 거침없이 흘렀다.
오멜 공국의 대의회는 닷새를 넘기지 않았다.
공국의 길드는 영지에 해당하는 관할 구역과 단독으로 움직일 수 있는 길드의 용병부대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의결이 통과되자마자 각 길드는 군대를 파견해왔다.
불과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육군과 골렘 부대가 공국의 동남부 지대에 모여들었으니, 최남부인 오르노벨을 중심으로 스타벳, 스타피르까지 삼각으로 묶인 세 개의 도시에 각 길드의 병력이 앞다퉈 도착하였다.
이제 머잖아 오멜과 라이곤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지경이 되었다. 공국이 가진 바 전력을 모두 끌어모은 후에는 선전포고를 해오리라.
그때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아아아악!”
라이곤 왕국의 수도 그레즈의 성 안쪽 깊숙한 곳에서 쥐어짜는 신음이 울려 퍼졌다.
“폐하, 숨을 고르셔야 합니다!”
“헉헉!”
식은땀에 절은 머리칼은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고 그렇잖아도 하얗던 얼굴은 이제 창백할 지경이었다. 지금 이 성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과 신음은 바로 여왕 라니아의 것이었다.
“끼아아아아악!”
다시금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는 여왕.
곁을 지키는 무수한 시녀가 한 기색이 역력한 가운데, 늙은 산파는 계속 유도를 하였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폐하, 한 번 더 호흡을 깊게 하시고 힘을 주십시오. 그리하면 끝나실 것입니다.”
다시금 라니아는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그리고.
“잘 이겨내셨습니다.”
산파는 반색하며 그녀의 아래에서 작은 아이를 들었고, 이내 거꾸로 잡아올려 엉덩이를 쳤다.
“응애!”
“왕자님이십니다.”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울음에 기진맥진한 라니아는 겨우 고개만 돌려 자신이 잉태한 아이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아아, 내 아이. 나의 왕자.”
“대공 전하께도 전해드리겠습니다.”
뒷정리를 서두르는 시녀들 사이로 산파가 방을 나섰다. 지쳐버린 라니아는 늘어진 채로 그저 자신의 품에 안긴 너무나도 조그만 아이를 필사적으로 눈에 담았다.
이토록 신비로운 순간이 또 어디에 있으랴. 작지만 고귀한 생명을 품고 이 세상에 낳았다는 사실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주륵 흘렸다.
“훌륭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그런 그녀를 위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니아가 고개를 들자, 어느새 그곳에 한 남자가 있었다. 오늘 이 세상에 빛을 본 아이의 아버지이자, 그녀의 남편이었다.
“제드······.”
제드는 그녀의 간절한 부름에 응하듯 그녀의 뺨을 가만히 쓸었다. 자신의 앞에서는 항상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주고자 했던 여인은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름다우십니다, 나의 폐하.”
제드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품에 있는 아이를 들여다보았다. 아이는 쌕쌕 잠들어있었다.
‘나의 아이.’
제드의 눈동자에도 경이로움이 감돌았다.
한 생명이 탄생하는 순간은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놀랍도록 벅찬 감정이 제드의 안에서 끓어올랐다.
이 아이는 제드의 분신이다. 그가 이 시대를 살아왔음을 증명하는 존재이다. 삶의 흔적이다.
무수한 정의가 머릿속에 소용돌이쳤지만, 제드는 그 어떤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이름······ 아이의 이름을 당신이 정해주세요.”
“제가 그리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해주세요. 당신이 이 왕자의 아버지니까요.”
제드는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이내 나직이 중얼거렸다.
“카로스.”
“좋은 어감이에요. 무슨 의미가 있나요?”
“고어입니다. 평화로운 대지를 의미하지요. 그 발음은 조금씩은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평화로운 대지. 좋네요. 마음에 들어요. 카로스. 왕자의 이름은 카로스예요.”
라니아가 그렇게 그 이름을 중얼거리자, 잠든 아이가 잠꼬대하듯 칭얼댔다. 마치,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고단한 하루였을 것입니다. 이제 푹 쉬십시오, 폐하.”
“네, 그럴게요······. 푹 자고 일어나면 당신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그건 어려운 일이겠죠.”
“카로스라는 왕자의 이름에 걸맞은 시대를 선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푹 쉬십시오. 폐하께서는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으십니다.”
라니아는 제드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기절하듯 잠든 그녀를 바라보던 제드는 기척을 죽이고 방을 나섰다.
마법사가 되고 자신의 숙명을 깨달은 이후로 이토록 감정적으로 극심하게 동요한 적이 있던가.
‘이 세상에 눈을 뜬 이후로는 없었다.’
신비로운 일이다. 긴 시간을 살아왔다. 전생의 기억은 이 순간에도 제드의 머릿속에 가득하다.
그러나 그 긴 시간 속에는 후세를 살아갈 자신의 아이를 마주하는 순간은 없었다. 역사라는 고고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아동 바동 몸부림치며 격렬히 시대에 저항하고 숙명을 따랐던 시간뿐이었다.
“감동적이군.”
제드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였다.
두 번째 삶이 아니었더라면 절대로 느끼지 못했을 감정들이다. 어찌 이 순간을 감사하지 않을 것인가. 그러면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한 사명감을 느꼈다.
제드는 무겁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나씩 늘어난다. 자신이 목적한 바를 이루어야만 하는 이유가.
하지만 제드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런 것들이 바로 삶의 이유였다.
‘제드 크레인이라는 인간의 발자취다.’
*
오멜 공국은 부유한 국가였다.
북부의 해상과 육로를 통한 중간 무역, 자유로운 노예업, 그리고 상인 집단이 곧 권력집단이기도 한 나라였기에 돈은 곧 권력이었고, 신분을 상징했다.
그런 나라였기에 이곳엔 예로부터 많은 상인들이 대상의 꿈을 꾸고 모여들었고, 막대한 자금의 유통이 이루어졌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돈이 모여드는 곳에는 칼이 뒤따랐고 그걸 보호하기 위한 방패와 사람들 역시 자연히 모여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공국의 내로라하는 거대 길드는 막대한 자금력과 군사력을 계속해서 모으고 있었고, 그 군사력에는 엄청난 수의 골렘도 포함되어 있었다.
“트라키아 길드에서 10기의 골렘을 추가했다고 합니다.”
“10기나? 2개월이 넘어가는 시점인데도 그 정도 수의 골렘을 추가로 가져오다니. 적잖이 무리하는군.”
“이번 대수림 지배권에 걸린 게 적지 않습니다. 퀘베스 길드 역시 만만찮게 많은 군사력을 동원해왔습니다.”
“흐음. 손익이 명확한 일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 이 일이 단순히 대수림의 지배권에 그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니까 말이야······.”
마르쿠스 길드연합의 마스터인 로커스는 입가의 주름을 훑었다. 긴 생각에 잠길 때 그는 이렇게 입가를 쓰다듬곤 했다.
“트라키아든 퀘베스든 대공 측이든······ 누구에게도 이 대수림의 탈환을 두고 주도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이 일은 마르쿠스 길드연합이 판을 만들고 주도해나가야 한다. 모두 그 점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백발노인이 내뿜는 기세치곤 여간 날이 선 게 아니다. 좌중의 지부장들은 긴장한 얼굴이었다. 곧 로커스가 지팡이로 탁자의 지도 한 곳을 탁 찍었다.
“오르노벨과 대수림의 길목. 이곳을 가장 먼저 선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마르쿠스의 길드연합의 병력이다. 이번 기회에 오멜 공국의 3대 거대 길드체제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오롯이 마르쿠스의 이름을 가운데에 둘 때가 되었음을 모두 명심 또 명심해야 할 것이야.”
오멜 공국의 최남단 도시 오르노벨.
이곳엔 마르쿠스 길드연합의 막대한 병력이 주둔 및 배치되었다. 골렘의 수만 약 100기가 넘어갈 정도다.
마르쿠스 길드연합은 골렘 설계도가 공국 내에서 공개되자마자 만사를 제쳐놓고 그 일에 집중했고, 작금에 이르러 짧은 시간 사이에 근 100기에 육박하는 엄청난 수의 골렘 전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막대한 자금력과 선견지명의 결과였다.
물론, 오멜 공국의 3대 거대 길드인 트라키아와 퀘베스 길드연합도 밀리지 않기 위해서 골렘 산업에 주력, 생산설비를 갖추고 골렘을 찍어냈으니 그 수가 수십 기는 족히 됐다.
그렇게 골렘을 따지기만 해도 200기는 우습게 넘는 엄청난 수의 골렘이 지금 이 공국의 최남단 세 개의 도시 부근에 배치되었다는 얘기다.
지난해 하이렐 전역에서 라이곤과 토르가 양국 합쳐서 약 300기 안팎의 골렘이 충돌하는 대회전이었음을 생각해볼 때, 공국의 군사력은 절대로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호사가들은 떠오르는 태양이나 다름없는 라이곤 왕국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라고 떠들었고, 전쟁은 이제 코앞까지 다가온 듯 양국의 군사적 긴장감은 점점 더 팽팽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3개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북해에서 내려오는 얼어붙은 바람이 약해지면서 날씨는 서서히 풀려갔다. 전쟁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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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페르의 북쪽에 만들어진 임시 주둔지.
지금 이곳에는 다수의 골렘과 군대가 포진해 있었다.
“앞으로 길어봐야 앞으로 보름. 그 안에 오멜 공국이 선전포고를 해올 것 같습니다.”
“날이 풀렸으니 때가 되었다는 건가.”
로톤은 눈을 빛냈다.
“그렇습니다. 다만, 문제는 적의 골렘 수가 최소 200기 이상은 되는 것 같습니다. 예상했던 수치보다 훨씬 많습니다. 전부 예의 탑승형 골렘입니다.”
“전쟁은 숫자로 하는 게 아니야. 거기다 그 탑승형 골렘이라는 건 다시 말하자면 골렘을 쓰러뜨리면 끝이란 얘기다. 장단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탑승형 골렘의 존재에 관해서는 제드로부터 이미 이야기를 들었다.
‘숫자가 많긴 하다만, 표면적인 골렘의 수만으로 따지자면 우리 군의 골렘의 숫자는 훨씬 더 많다.’
로톤은 힐긋 저편에 앉아서 가만히 듣고만 있는 제드를 눈에 담았다. 제드는 한 번씩 끼어드는 것 외에는 전략회의에서 의견을 내는 일이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자리에선 다양한 관점과 전략전술이 논의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제드는 육군 부대의 핵심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기갑중대의 지휘관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기에 제드의 의견이라면 그 어떤 무모한 작전조차 결행될 터였다.
‘그런 방식은 앞으로는 도움이 안 된다. 당장 중구난방의 뜻을 하나로 모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처럼 강대국으로서 미래를 그려야 할 때엔 오히려 독일 뿐이야.’
그게 제드의 판단이었다.
머잖아 회의가 끝났다.
이제 이 넓은 막사엔 제드와 로톤 뿐이었다.
항상 회의가 끝나면 둘은 이런 식으로 대담을 나누곤 했다.
“각하, 적의 선전포고한 이후에는 대수림을 보호하며 싸운다는 제1조건을 충족하기 어렵습니다. 적이 원하는 순간에 움직여오는 이상 받아치는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대수림, 즉 요정의 터전을 지키는 건 제가 직접 그들과 맺은 협정의 제1원칙입니다. 반드시 지켜져야만 한다는 얘깁니다.”
로톤은 생각에 잠겼다.
그 사전 제약을 미리 깔아두고서 수없이 전략회의를 거쳤다. 하지만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도 이렇다 할 명쾌한 답은 없었다. 적어도 로톤과 제드가 만족할 답은 말이다.
그리하여 로톤은 계속되는 회의 속에서 전혀 다른 전략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각하, 본국이 먼저 선전포고를 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선전포고를 말입니까?”
“어차피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욱이 대수림이 본국의 영토임을 공표한 직후에 오멜 공국은 본국의 영토를 분쟁지대로 삼고 대의회를 열었습니다. 이는 명백한 전쟁도발. 적들이 움직이기 전에 선전포고를 하고 선제타격을 가한다면 대수림이 전화에 휩싸이는 일 없이, 적의 주전력을 격파하는 것으로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로톤의 말은 막힘이 없었다. 머릿속에 분명하게 전략이 존재한다는 얘기였다.
그 말에 제드는 희미하게 웃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답안이 나왔다.
틀에 박히지 않는 사고의 전환.
전략의 재구축.
그리고 승리를 위한 결단에 이르기까지.
지금 로톤이 말한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인간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배우고 익히며 성장해나간다.’
제드는 로톤이 라이곤 육군의 핵심인사로서 자신의 능력을 더욱 키워가길 바랐다. 인재를 육성하는 것 이상으로서 지휘관으로서 판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르는 것은 앞으로의 시대에 더욱 중요했다.
“계속 말씀해보시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입니다.”
두 사람의 대담은 밤이 깊도록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일주일 뒤.
캄페르에서 라이곤 왕정의 사절이 북부로 향했다.
오멜 공국에 선전포고를 전하기 위함이었다.
“강대국의 증명인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제드는 중얼거렸다.
드드드드드.
곧 요란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 있는 대수림의 입구가 열렸고 우거진 나무 너머로 쭉 뻗은 길이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