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트 아르마5
*
“데스트 아르마.”
인도자가 심각한 얼굴로 꺼낸 말이었다.
제드가 그 이름을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아는 척하지 않고 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
인도자도 에델노르도 시선은 여전히 서 있는 아우로렐에게 꽂힌 채였다.
“인간의 언어로 재앙신이라는 뜻입니다.”
제드가 그 말의 의미를 헤아렸다.
데스트 아르마.
요정의 언어로 불렸던 그 이름에 그런 의미가 있었던가.
다만, 지금의 아우로렐이 그렇게 불릴 이유가 있는가?
대수림을 구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아우로렐은 숲으로 밀려드는 적을 물리치고 지금은 저 뒤에서 숲과 하나 된 듯 조용히 교감하고 있지 않은가. 그 모습에서는 재앙신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재앙신이라고 불릴 이유가 있겠습니까? 제가 보기엔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만.”
“대자연에는 평화롭고 상냥한 얼굴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 너머에는 아주 무섭고 파괴적인 면이 존재하죠.”
“흐음, 아우로렐이 그 무서운 일면이라는 겁니까?”
“정도를 넘어선 힘은 제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너무 당연하게도 많은 것들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제드 크레인, 당신도 예외는 아닌 것 같군요.”
“······.”
제드는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조차도 순리겠죠. 그러니 하나만 충고하겠습니다. 정령은 절대로 지배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자유로워요. 그들은 곧 자연이고, 세계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아우로렐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저 존재는 그런 존재 중에서도 특별한 격을 갖추었어요. 그러한 존재가 언제 어떻게 무서운 일면을 드러내어 재앙신이 될 것인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재앙신이라.
제드도 아우로렐을 눈에 담았다.
‘상위 정령으로서의 자아. 그 가능성의 힘이 오히려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제드로서는 인도자나 에델노르의 관점은 완벽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요정이었고 제드는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들을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반드시 존재한다.
엘프는 변화를 거부하고 자연 속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존재들이었지만, 인간은 매 순간 발전을 거듭하고 짧은 시간 사이에도 크게 변화한다. 그건 제드도 마찬가지다.
‘일어나지 않은 미지의 일을 두려워하며 걸음을 멈추는 일 따위는 없다. 내가 그린 평화의 시대는 다가오고 있다.’
“충고는 가슴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일어나지 않은 일보다는 정리해야 할 일들에 관한 이야기가 먼저겠군요. 침략자와 숲의 오염. 그리고 앞으로의 일들까지 말입니다.”
제드는 그 이야기를 하다가 힐긋 고개를 돌렸다.
그 방향의 너머에는 자크가 있다.
‘저쪽도 싸움이 끝냈나.’
*
수풀이 우거지고 나무가 빼곡했던 숲의 한복판.
지금 이곳은 초월자의 격전으로 완전히 황폐화된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나무는 쓰러졌고, 수풀은 다 뽑히고 잘려나갔다.
푹 꺼지고 뒤집어진 대지의 너머.
그곳에는 두 개의 그림자가 얽혔다가 이윽고 떨어졌다.
“후우우!”
숨을 한껏 몰아쉬는 거구의 사내.
거대한 짐승을 연상하게 하는 그 인물은 바로 사일러스다.
지금 그의 온몸에는 크고 작은 생채기가 가득하였고, 눈은 핏물로 시뻘게져 흡사 악귀의 그것과 같았다.
“쯧. 빌어먹을.”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사일러스.
이번에야말로 베어 넘길 참이었는데, 그게 쉽지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끝까지 싸워서 누구 하나가 죽을 때까지 칼을 부딪쳐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다.
‘시간이 다됐군.’
조금 전부터 현장에 당도한 은색 갑주의 기사 넷.
그 넷은 언제든 이 싸움에 끼어들 것처럼 배후의 포지션을 잡고 있었다. 공격을 허용하기라도 했다가는 아주 위험할 위치에서 말이다.
자크와의 칼부림으로 주변의 모든 것을 잊고서 싸움에 집중하고 있었던 사일러스였지만, 금방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제드, 그놈이 목적하던 바를 이룬 거다.’
다시 말해서 사일러스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했다는 얘기였다. 제드는 지극히 실리적인 인물이었고, 더는 이 대결로 마나를 소모하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놈들이 합공을 벌인다면 싸움의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쳇.”
붕. 칼을 휘두르며 거두는 사일러스.
자크는 여전히 대검을 겨눈 모습이었지만, 이미 사일러스는 등을 돌린 뒤였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어차피 이렇게 숨이 턱까지 차오른 모양새로 네놈과 승부를 낸다고 해도 그 개자식한테는 통하지 않겠지.”
하인리 엘스우드를 말하는 것이다.
자크와 사일러스는 대등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일러스를, 하인리는 압도한다.
사일러스는 퉷 침을 뱉었다.
“나중에 찾아오겠노라고, 네 녀석의 주인에게 말해둬라.”
그 말을 끝으로 숲 너머로 성큼성큼 나아가는 사일러스.
자크는 그의 뒷모습이 완전히 저 너머로 사라진 후에야 칼을 거두었다.
‘끝까지 싸워보지 못해서 아쉽나?’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오. 저 짐승의 이빨이 전보다 더 날카로워졌소. 아마도 다음에 또 붙게 된다면 그때는 더욱더 예리한 이빨이 되어 나타날 것이오.]
‘그때는 이길 수 있겠나?’
[물론이오. 나 역시 배운 게 적지 않으니.]
‘다행이군. 경에게는 기대하는 게 많아. 앞으로 해줘야 할 것도 많고. 성장할 수 있노라면 계속 성장해줘야겠어.’
[그러겠소.]
‘좋아, 경이 필요할 때 부르지. 저편에서 대기하도록.’
곧 자크의 뒤쪽 공간이 쩍 열렸다. 검은 기사는 그 틈으로 녹아들 듯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 현장의 은색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
푸른 창공에 녹아들 듯 은은한 푸른색의 새.
활공하며 나아가는 블라르를 따라 지금 이 순간, 숲 속을 가로지르는 그림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이 숲의 주인이었고, 사냥꾼들이었다.
어느새 완전히 회복한 에델노르를 중심으로 약 열 명의 파수꾼들은 오염된 대지를 지났다. 진득한 악의와 독기는 그들의 생명력을 좀먹었지만, 에델노르는 멈추지 않았다.
정령의 무구 실피드를 휘둘러 세찬 정령의 바람으로 스며드는 독기를 찢어발기며 계속 움직인다.
요정들의 시선은 저 하늘의 너머에서 길잡이가 되어주는 새의 형상을 한 정령에게 꽂혀 있었다.
-나는 오염의 근원지를 알고 있습니다.
제드가 그녀에게 한 말이었다.
그리하여 에델노르는 파수꾼들과 함께 오염의 근원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대수림의 앞날을 위해서 말이다.
그 사이, 오염의 밀도는 점차 심해졌다. 초록 잎사귀가 가득해야 할 대수림의 나무는 말라 있었고, 심한 악취가 강에서부터 났다.
요정들은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파수꾼들의 얼굴이 점차 검게 물들었으니, 그것은 에델노르도 예외는 아니다.
온몸으로 저미는 오염에 그들은 고통을 느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오염의 근원지에 다다랐다. 인위적인 마법의 결계. 그 너머에서 사악한 마법과 독을 휘감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르르르륵.
소름 끼치는 울음이 귓전을 때렸다.
악취의 너머.
요정의 몸과 온갖 짐승의 팔과 다리 따위가 제멋대로 얽힌 존재는 죽지 않고 비틀린 채로 선명한 악의를 내뿜고 있었다.
“정말 끔찍하군.”
에델노르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합성생물 키메라.
그 존재를 두고 요정들은 전투를 준비했다.
‘더할 나위 없는 마무리다.’
제드는 저 멀리 서쪽의 오염지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지켜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빌헬름 앙드레는 제드가 요구한 것을 충실하게 이행하였다.
그가 지시를 내리고서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을 텐데, 썩 괜찮은 물건을 앞세웠다.
저 키메라는 제드와 같은 마법사에게는 시답잖은 장난질에 불과하지만, 요정에게는 천적이나 다름없다.
더욱이 그들이 지금 있는 곳은 오염된 대지의 중심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숲에 영향을 강하게 받는 요정들에겐 더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 싸움의 끝은 정해져 있다.
발키리를 필두로 하는 파수꾼들의 전투력은 썩 만만찮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다소 고전은 하더라도 결말은 정해져 있다.
‘숲을 정화하는 건 요정에게는 썩 어려운 일도 아닐 터.’
그러자면 일의 마무리까지 완벽해지는 셈이다.
끝끝내 빌헬름이 이 숲에서 해왔던 일들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요정들은 모든 흔적을 표백하듯 없애버릴 테니까.
제드는 미소 지었다. 대수림에서는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큰 것을 손에 넣게 됐다.
‘요정들에겐 충분한 보상을 해야겠지.’
“상황은 잘 마무리 되어가는 듯하니, 이제 그 이후의 일들을 논의할 때가 된 것 같군요.”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가 더 무엇이 남아 있나요?”
“사냥꾼. 그리고 이 대수림의 안전에 관한 논의라고 하면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가요, 제드 크레인.””
“지금까지 요정족을 위협하는 존재들이 끊이지 않았을 테지요. 북쪽에서든 남쪽에서든. 그들이 요정족을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굳이 제가 더 말씀드릴 것도 없을 겁니다.”
“당신이 그 부분을 도울 수 있다는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그럼 이번에도 거래라는 거군요. 우리 요정에게 달리 뭔가 원하는 게 있나요?”
“아니요. 저는 거래를 제안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받은 것의 가치가 워낙 큰 까닭에 이전 거래의 균형을 맞추는 중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실 겁니다.”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정확히 어떤 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죠, 제드 크레인.”
“이곳 대수림을 라이곤 왕국령으로 삼겠습니다.”
그 말에 인도자가 미간을 살짝 모았다.
“······이곳을 인간 왕국의 영토로 만들겠다는 얘긴가요?”
“명목상으론 그렇습니다. 대수림은 인간 세상에서는 미지의 땅. 하지만 이곳이 라이곤 왕국의 영토가 된다면 그때부터는 북쪽으로는 오멜 공국의 무단 국경 침범에 대응할 수 있고. 남쪽으로는 캄페르의 사냥꾼들을 법령으로 구속할 수 있습니다.”
“······.”
인도자는 말없이 제드의 눈동자를 들여다볼 뿐이다.
처음부터 그러했지만, 제드는 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에게서 무엇을 확인하고 싶어하는지는 명확했다.
진실과 거짓. 그 너머의 기만을 헤아리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드는 진실만을 말했다. 이건 그들에게 나쁠 게 없는 이야기였다.
“제 제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거절하셔도 무방합니다. 오멜 공국은 몰라도 라이곤 왕국령에서 대수림에 멋대로 침범하는 일만큼은 없도록 해드리지요.”
“아니요. 제드 크레인,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당신의 말에는 거짓말이 보이지 않는군요. 진심으로 우리 요정을 위한다는 걸 알겠어요.”
“발키리와 의견을 나눠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명목상이라고 해도 인간과 손을 잡는 일이 되는 겁니다.”
“에델노르도 찬성할 겁니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모든 게 명확해졌어요. 대수림 밖 인간의 힘은 우리 요정들의 힘만으로는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졌어요. 그리고 제드 크레인, 당신과 같은 인간 역시 아주 드물죠.”
그녀의 대답에 제드는 웃었다.
‘현명한 선택이다. 발키리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골렘을 상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오멜 공국······ 그 상인 길드연합은 이번 일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대개 상인이란 족속은 손해를 보는 것에 아주 민감하니까 말이야.’
이번 일을 통해 제드는 오멜 공국의 전력이 무시할 수준이 아님을 알았다. 돌아가면 앞으로 그 부분도 차분히 일의 경위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잘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대수림의 요정은 라이곤 왕국의 귀중한 동맹으로서 대우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외세의 침략과 내부의 혼란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 제드 크레인의 이름을 걸고 말씀드리지요.”
제드는 손을 내밀었다.
인도자는 그런 제드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색하게 희고 작은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