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트 아르마3
“너는······.”
“이런 식으로 재회할 수 있다니. 정말 특별한 인간이네. 거기다가 이 숲에서 말이지.”
금발의 소년은 보이지 않는 것을 훑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키득댔다.
하지만 제드는 웃을 수가 없었다.
이 상황 자체가 그랬다.
“네가 지금 나의 눈앞에 나타났다는 사실. 그 말은 세계수의 가지 내부에 존재하는 지식이 안타레스의 유산이라는 얘기인가?”
“예리한 걸. 아주 정확해.”
소년의 대답에 제드는 미간을 모았다. 지금 그는 당혹스러움을 좀처럼 감추기가 어려웠다. 대수림의 깊숙한 곳. 요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비전이 존재하는 이곳에 존재하는 것이 안타레스의 유산이라니?
“하하하. 전혀 모르고 온 모양인걸.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는 일이군. 이곳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서 이곳에 올 수 있었다는 게 말이야. 근데 말이야. 여기에 안타레스의 유산이 있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이야?”
“······.”
“잘 생각해보라고. 안타레스는 특별한 존재였다. 만물을 꿰뚫어보고 미래를 내다보았으며 세상의 균형을 조율하고 인간에게 지식을 열어주었다. 그게 과연 인간에게만 허락된 것이었을까?”
“오늘은 유난히 묻지도 않은 것들을 말하는군. 예전에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말이야.”
“두 번째 만남이다. 지식은 쌓이는 법이야. 그리고 아는 게 많으면 보이는 것도 많아지는 법이지. 물론, 이곳에 인간이 도달하게 된 것은 뜻밖의 일이지만 말이야. 아, 참고로 미리 말해두는데, 네가 이곳에서 얻을 건 별로 없을 거야.”
“그게 무슨 뜻이지?”
“설명보다는 직접 이해하는 게 더 빠르겠지.”
소년은 그때와 똑같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제드의 눈앞의 풍경은 일그러졌고, 새로운 경관이 펼쳐졌다. 발밑이 꺼지고 세상의 감각이 뒤얽혔다.
마법의 영역.
고대의 위대한 대마법사 안타레스가 남긴 마법이 긴 시간을 초월하여 제드의 눈앞에 펼쳐진 순간이었다.
*
콰아앙!
솟구치는 화염.
찢겨나가는 오러의 파동.
갈려나가는 대지.
마스터라고 불리는 지고한 영역에 도달한 두 존재가 벌이는 사투는 이 일대의 풍경을 뒤바꾸기에 충분했다.
“좋아, 이래야지.”
혀를 날름대는 사일러스. 일그러진 흉터가 씰룩였다.
죽음의 순간을 수없이 넘으며, 그는 점점 더 강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고오오오.
사일러스의 투지에 요동치는 마나가 오러의 불꽃이 되어 뿜어져 나왔다.
쾅!
달려나가는 사일러스의 칼끝에서 솟구친 오러는 짐승의 이빨이 되어 단숨에 자크의 갑주 표면을 갉아먹었다.
흑요석으로 제련된 갑주조차도 찢어발기는 힘. 그것이 마스터 급 기사의 오러였다.
그러나 받아치는 자크의 칼끝에서 파도와 같은 오러가 날아드는 이빨을 튕겨내며 상쇄하였다.
콰가가가각!
쌍검과 대검.
상대의 목숨을 노리는 칼이 부딪치며 불똥을 일으켰다.
처음 맞붙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등한 둘이었기에 이 승부가 끝나려면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 무렵, 사냥꾼들은 숲 중심부로 향하는 길목에서 아직도 은색 기사들을 어쩌지 못하고 쩔쩔매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이 자식들 대체 정체가 뭐야!”
카록이 조바심을 드러내며 소리를 질렀다.
처음에는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상황이 길어지면서 그런 생각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저 괴물 둘이 한창 떨어진 곳에서 싸우기 시작한 뒤로는 모든 사냥꾼이 이곳에 포진해서 길을 뚫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보라.
저 세 명의 기사는 쓰러질 듯 좀처럼 쓰러지지가 않았다.
“어디서 저런 실력자들이 나타난 거냐. 저 정도면 절대로 방랑하는 기사 수준이 아니야. 웬만한 기사단 혹은 근위대급······.”
카록의 표정이 굳었다. 느낌이 안 좋다. 지금까지 술술 잘 풀리던 상황이 별안간 안 풀리기 시작했다.
마치, 목에 가시라도 낀 것처럼 말이다.
그의 오랜 경험이 서늘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조금 더 해보고 그래도 안 된다면 물러나는 게 맞아. 이 정도로 했는데도 저 셋에 발목이 묶여서 아무것도 못 하는 상황이라면 답은 하나야. 저쪽이 봐주고 있다는 거지.”
*
위도 아래도 없는 공간.
마법의 영역.
이전 폐광에서 유산에 접촉했던 그때와 같다.
그때는 이 부유감 이후에는 마법의 술식이 펼쳐졌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뭔가 다르다.’
제드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어떤 광경과 알 수 없는 언어의 나열.
그러나 놀랍게도 제드는 그것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정령의 말인가.’
그랬다. 그것은 인간의 세상에는 소위 정령술이라고 하는 교감의 영역. 그 자체가 언어나 다름없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다.
제드의 눈앞으로 어떤 그림과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숲과 나무. 그 안에 수많은 생명이 모여 있었다.
‘이건 요정족인가?’
제드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요정들이라고 생각한 생명들이 한둘씩 모습을 바꾸더니 그 배경을 이루는 숲과 같은 자연의 상태로 돌아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정령화에 가깝다.
‘요정이 수명이 다하여 죽을 때가 되면 정령이 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다.’
그 자체는 썩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이 광경은 생명의 순환을 알려주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드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내가 알고 싶은 건 데스트 아르마다, 안타레스여.’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눈앞에서 펼쳐지던 광경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뭐지? 정령화한 존재들이 하나로 합쳐지고 있다. 저건 단순히 정령화하는 게 아니야.’
그러는 사이, 하나로 합쳐진 정령은 더욱 크기를 키워갔다. 마침내 모든 요정이 정령화했을 때, 그것은 몹시도 거대한 개체가 되어 있었다. 생명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존재. 주변의 생명을 흡수하고 세계수의 가지를 온몸에 휘감고 초월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무수한 요정의 염원과 의지가 모여 하나가 된 존재. 그것은 요정족 그 자체였다.
그 순간, 제드는 알았다.
‘설마, 이것이 데스트 아르마의 정체란 말인가?’
곧 눈앞의 광경은 사라졌다.
다시 그 예의 평원의 나무 앞에 선 제드.
금발의 소년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이제 내가 한 말의 의미를 알겠지. 네가 이곳에서 얻게 되는 건 별로 없을 거라고 말이야. 네가 보고 이해한 것, 그것이 진실이다.”
“······.”
제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완전히 이해하였다.
데스트 아르마. 요정족 최후의 병기는 기실 멸망의 직전에 다다른 그들 종족의 복수 의지를 하나로 모은 거대한 화신체였던 것이다.
그것이 우드 골렘과 비슷하게 나무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기에 제국의 사람들은 그것을 골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실상은 골렘과는 전혀 무관했다.
‘이제야 알겠군. 어째서 그 무적에 가까웠던 데스트 아르마가 거듭되는 전투를 겪으며 그토록 빠르게 약해졌는지 말이야.’
전생의 전투기록에 따르면 대수림에서 처음 등장했던 데스트 아르마는 단독으로 수십 기의 골렘을 그 자리에서 박살 냈다고 그랬다. 그 자리에 있었던 베테랑 골렘 마법사들의 평가에 의하면 전쟁의 신이라는 말을 붙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무시무시했던 데스트 아르마는 연이은 전투에서 급속도로 약해졌다. 수십 기도 단숨에 부쉈던 골렘이 다음에는 30기의 골렘을 부수는 데에 다소 시간이 걸리더니, 후에는 후속 부대로 편성된 40기의 골렘을 버거워했다.
당시에는 그만한 골렘이니 연이은 전투의 소모가 조종하는 마법사에게 막대한 피로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거다.
‘생명을 태우는 화신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다. 육체가 사라진 존재, 더욱이 정령화한 존재의 사념의식은 점차 흐려질 수밖에 없어.’
그리고 마침내 데스트 아르마는 쓰러졌다. 마지막 순간에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면서 말이다.
나이트골렘을 취할 기회를 놓쳤노라고 당시에 얼마나 아까워했던가.
‘하지만 애초에 골렘조차 아니었단 말인가.’
“이런. 표정을 보아하니 너무 크게 실망한 것 같군.”
“인도자가 결단을 내리지 못했던 이유도 이제 알겠군. 이 방법을 사용하면 모든 요정의 목숨을 불태워야만 하기 때문이야. 내 말이 맞겠지.”
“총명하군. 정답이다.”
제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여러 궁리를 했고 준비한 무대였다.
따라서 이 결과에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기대했던 것과 그 안에 존재했던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헛걸음했군.”
수확은 없었다.
제드가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때였다.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아. 너는 이미 알고 있는 게 있잖아. 그렇다면 또 다른 새로운 지식의 가지는 열리는 법이지. 마법이란 세계의 질서를 연계하여 그려내는 것.”
씨익. 소년이 웃으며 손가락을 딱 튕겼을 때였다.
사아아아.
별안간 불어온 바람과 함께 나무 위에서 작은 나뭇가지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제드와 소년 사이에 머물러 두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제드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왜냐하면, 그 나뭇가지에서 맥동하는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주 특이한 일이야. 그대는 놀랍게도 인간이면서 정령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깨우쳤어. 그건 인간에게는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 힘이지. 그게 새로운 길을 열었다.”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제드의 고개가 돌아갔고, 어느새 그 뒤에 커다란 골렘 하나가 서 있었다.
“아우로렐.”
“그 골렘은 마법을 통해 태어났으나 정령에 한없이 가까워. 그렇기에 이 세계수의 가지는 그 골렘을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할 거야. 이건 애초에 요정을 위해서 설계된 마법이었지만, 저 존재라면 이 힘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을 테지.”
“······.”
제드가 말없이 그 나뭇가지를 손에 쥐었다. 생명의 맥동. 강력한 마법의 힘이 그 안에 존재하는 게 느껴졌다. 이것은 정령의 힘이다.
“허락된 시간은 여기까지인 모양이군.”
소년이 불쑥 그렇게 말하며 손을 휘저었다.
그 순간, 저편의 풍경이 변했다. 그곳에 진동하는 대지의 너머로 숲을 헤치며 빠르게 다가오는 골렘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 외관이 익숙했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엔 그들 골렘의 왼쪽 견갑에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었다.
‘오멜 공국의 후속 부대인가.’
“모든 일엔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법이지. 안 그런가, 제드 크레인?”
제드를 가만히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이 의미심장하였다.
“······.”
“어쨌든 작별의 때가 됐군. 하지만 그대와는 또 만나게 될 것 같은걸. 다만, 의문이야. 안타레스의 마법이 이처럼 빠르게 전파되는 것이 과연 너희 인간에게 좋은 일일까?”
그 말을 끝으로 이 세상의 풍경이 외곽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무너져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눈앞의 풍경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제드가 고개를 돌렸다.
숲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인도자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돌아왔군요. 원하는 것은 알게 됐나요, 제드 크레인.”
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쪽을 저편을 눈에 담았다. 곧 그의 눈동자가 싯푸르게 빛났다.
하늘을 나는 블라르가 빠른 속도로 서쪽의 숲 지대의 풍경을 멀리서부터 비추었다. 곧 저 멀리 우거진 나무를 헤치고 움직이는 과격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조금 전 그 동산의 풍경에서 보았던 것은 허상이 아니었다.
“나와라, 아우로렐.”
제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편의 공간이 쩍 열리면서 아우로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쿠웅.
땅이 진동하는 가운데, 인도자와 에델노르가 아우로렐을 보고 깜짝 놀랐다. 대체 저 존재가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그들이 놀랄 일이 한 가지 더 일어났다.
뚝.
별안간 세계수의 가지 끝자락이 알아서 부러지더니, 허공을 둥실 날아서 아우로렐에게 날아간 것이다.
우우우.
아우로렐은 무엇인가에 이끌리듯이 부러진 나뭇가지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변화는 일어났다. 아우로렐의 신체를 이루는 나무의 골조가 부풀어 오른 것이다.
제드는 알 수 있었다.
아우로렐이 이 순간, 마법의 영역에서 엿보았던 그 정령의 화신체와 비슷한 것으로 거듭나고 있음을 말이다. 아우로렐의 자아가 더욱 선명해지면서 존재감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드드드득.
가지가 얽히고 넝쿨이 휘감긴다.
더욱 단단하고 거대하게 변해가는 아우로렐.
이제 그 크기는 거의 5미터에 육박할 정도였다.
제드는 변화를 지켜보다가 품에서 마석을 꺼냈다.
새로운 육체에는 그에 걸맞은 동력원이 필요한 법이었다. 곧 열 개의 마석이 아우로렐의 몸속으로 스며들 듯이 모습을 감추었다.
“큭.”
제드가 순간적으로 엄청난 양의 마나가 쑥 빠지는 것을 느끼며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을 때였다.
우우우우우우!
별안간 아우로렐의 울음소리가 대수림에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무시무시한 존재감에 제드조차 전율이 일 정도였으니, 곧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