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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렘 마법사의 회귀-124화 (완결) (88) (88/124)

데스트 아르마1

날렵한 몸짓으로 착지하는 요정들.

그 순간, 숲의 넝쿨이 그들이 지나온 길을 감싸 안았고, 이내 바깥과 내부의 공간을 나누어놓았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요정들의 몸엔 크고 작은 상처가 즐비하다. 이 숲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피비린내다.

“발키리, 괜찮으십니까?””

“난 아무렇지도 않아.”

걱정하며 다가온 어린 요정에게 그리 말하며 자신의 상처를 살피는 에델노르. 벌어진 뱃가죽에서 핏물이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조금만 더 깊었더라면 내장이 흘러나왔을 것이다.

숲의 가호를 받는 요정들은 큰 상처를 입어도 금방 회복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회복은 너무 더뎠다. 숲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호 역시 약해졌고, 요정들은 서서히 말라가듯 죽어가고 있었다.

에델노르의 얼굴이 악귀의 그것처럼 변했다.

“인도자를 뵈어야겠어.”

에델노르는 넝쿨의 끝에 자라난 푸른 잎사귀로 자신의 상처를 덮으며 넝쿨의 길을 따라 걸어갔다.

머잖아 복잡하게 얽혀서 막혀있던 길들이 일제히 열리면서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이 앞은 대수림에서도 가장 신성한 장소였다. 이곳에 다다랐을 때, 에델노르는 겨우 지혈만 해두었던 상처의 회복이 점차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 오염되지 않은 선명한 생명의 근원이 존재하는 곳.

머잖아 낭떠러지와 같은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 너머에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태초에 세상에 가장 먼저 뿌리를 내렸다고 하는 세계수의 가지 중 하나. 비록, 긴 세월 속에서 잎사귀는 다 떨어지고 가지는 다 메말랐으나, 그 영롱한 힘은 아직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에델노르가 절벽의 앞에 선 순간, 넝쿨과 흙 따위가 한데 모여 연결되더니 저 너머의 영역으로 나아갈 길이 되어주었다. 그 길의 끝에 인도자가 있었다.

“고생했군요. 에델노르.”

“역할을 다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 듯하군요. 그들의 탐욕이 이 땅을 좀먹고 생명을 더럽히고 있음이 느껴집니다. 이대로라면 우리의 터전은 이제 사라지게 되겠죠.”

“인도자시여, 이제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저 사악한 인간들이 우리를 어떻게 더럽히는지는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

메마른 세계수의 가지.

그 앞에 서 있는 젊은 요정은 슬픈 표정을 했다.

나무 넝쿨을 팔다리에 휘감은 그녀는 은색의 투명한 눈동자로 뜨거운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후계자를 눈에 담았다. 그녀의 눈빛이 결연했다. 최후의 순간임을 직감했다는 얘기이리라.

인도자 역시 마찬가지다. 최강의 발키리인 에델노르가 막을 수 없다면 그들 중 누구도 대항할 수는 없다. 숲이 죽어갈수록 그들은 더 약해질 테니까.

“인도자시여.”

에델노르가 답을 재촉했다.

그러나 인도자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돌렸다.

“아주 강한 정령의 의지가 느껴집니다. 그 정령의 의지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은 정확히 알 수 없어요. 다만, 그것이 이곳으로 오고 있음은 명확해요.”

“······.”

인도자도 제대로 모르는 것을 에델노르가 알 리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인도자가 아직 포기하지 않은 한 줄기의 희망임은 명백했다.

세계수의 가지가 안겨준 지식일까, 그게 아니면 부질없는 희망을 붙잡고자 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최후의 결단을 내리는 것을, 인도자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쿠웅.

별안간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그들이 왔군요.”

“······제가 끝까지 막아보겠습니다.”

“에델노르, 이 앞에 있는 것이 희망일지 절망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정령의 의지가 항상 우리의 편이라는 보증은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인도자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희미한 희망이 한 줄기의 희망이라도 존재한다면 그걸 붙잡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당신께서 내린 결정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에델노르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날렸다. 바람을 타고 가볍게 넝쿨의 길을 지나서 밖으로 이어지는 벽에 다다른 그녀의 손끝에는 어느새 정령의 무구 실피드가 쥐어져 있었다. 긴 칼의 형상을 하고서 은은한 바람을 머금은 이 칼은 그녀가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도 힘을 빌려주리라.

“파수꾼들이여, 우리는 숲과 우리의 터전을 지킬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

“부숴라!”

“빌어먹을, 왜 이렇게 불이 안 붙는 거야!”

연이은 승전에 사냥꾼들 사이에 광기가 소용돌이쳤다.

발키리마저도 격퇴한 마당에 무엇을 두려워할까.

사냥꾼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번 사냥을 통해서 그들은 한 몫 챙기는 수준이 아니라, 다른 삶을 살게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칼과 도끼를 든 이들이 탐욕에 눈이 멀어 단단하게 얽힌 넝쿨을 베어 넘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모든 게 다 저자 덕분이다. 대체 정체가 뭐지? 저런 무시무시한 검술은 본 적이 없어. 날고 긴다는 기사를 몇 명인가 봤지만, 모두 저 정도는 아니었다.’

사냥꾼의 리더 카록이 거듭 혀를 내둘렀다.

그러는 사이, 마법사가 신호를 주었다. 마법이 완성됐다는 신호였다.

“좋아, 모두 산개! 마법의 불꽃으로 길을 뚫겠다!”

그 고함에 넝쿨을 베어 넘기던 사냥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곧 마법사들이 손을 쭉 뻗었고, 화염이 소용돌이치며 그 앞에 모여들었다.

화아아악.

열기를 내뿜던 불꽃 덩어리는 이윽고 넝쿨의 벽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게 연이어 세 개였다.

콰콰쾅!

요란한 굉음이 터졌고 세찬 화염이 무섭게 회오리쳤다. 뜨거운 열풍에 사냥꾼들이 몸을 움츠리는 가운데, 곧 새까만 연기 너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꽃에 다 짓이겨진 넝쿨의 너머가 나타났다.

“됐다! 열렸다!”

“사냥의 시간이다!”

“다 잡아들여!”

마침내 요정족의 본거지에 다다랐음을 직감한 사냥꾼들이 우르르 연기 너머로 달려갔다. 탐욕에 눈이 멀어 버린 나머지 냉정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가혹했다.

퓨퓨퓨퓩!

“끄아악!”

“아악!”

“꺽!”

날아드는 화살을 정면에서 그대로 맞은 선두의 사냥꾼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쓰러지며 전투불능이 됐다. 그 뒤를 따르던 사냥꾼들이 기겁하며 멈춰 섰다. 정신이 든 까닭이다.

“빌어먹을. 멍청한 짓 하지 말고 물러나 있어! 내가 신호를 하면 그때 들어가란 말이다. 일단은 마법으로 다 태워서 길을 넓히는 게 우선이다!”

카록이 고함칠 때였다.

“흐흐흐. 발키리가 납셨다. 조무래기들은 다 빠져.”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사울이 별안간 나섰다.

발키리가 나섰다는 말에 사냥꾼들이 다급히 물러나는 가운데, 매캐한 연기 너머로 실피드를 든 에델노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꽤 날카롭게 베였는데, 금방 멀쩡해졌군. 그래, 다 죽어가는 발키리랑 싸우는 것도 재미없는 일이지.”

사울이 씩 웃더니 땅을 쾅 박차고 튀어나갔다. 칼끝에서 피어오르는 오러가 매캐한 연기를 찢어발기며 날아들었고, 에델노르는 날렵하게 움직이며 바람의 칼날로 이에 응수했다.

꽝! 카가각!

충돌할 때마다 충격파가 발생하고 오러와 바람의 칼날이 부딪치며 그 여파가 주변을 휩쓸었다. 일견 비등한 것처럼 보이는 싸움. 하지만 합을 주고받으면서 누가 유리한가는 금세 드러나고 말았다.

이미 한 번 크게 다치고 물러났던 에델노르는 이번에도 어쩔 도리도 없이 수세에 몰려 그 몸에 상처가 한둘씩 생겨나고 있었다.

다른 요정 파수꾼의 상황도 불리한 건 마찬가지다. 그들이 쏘는 화살은 화살막이 마법에 막혔고, 수적으로는 열세였기 때문이다.

마법의 불꽃은 꺼질 기미도 없이 주변으로 계속 옮겨붙으며 기세를 더해가고 있었다.

“헉헉.”

에델노르가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은 상처투성이. 서서 칼을 쥐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다. 회복도 요원하다. 파괴적인 오러의 불꽃은 그녀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었고, 마법의 불꽃은 숲을 불태우고 있었다.

요정의 성역은 이제 더럽혀졌다.

피부로 스미는 열기와 탄내. 그리고 온몸의 고통까지.

에델노르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편에서 광기를 머금은 파멸자가 다가온다. 푸른 불꽃을 머금은 강철의 이빨을 휘두르며.

바람의 정령이 그녀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녀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을 안겨준다. 그들의 의지와 목소리가 실피드에 깃들어 칼에 맴돌던 산들바람은 서서히 폭풍이 되어갔다.

“잘 싸웠다, 발키리. 이제 끝내주마.”

파멸자가 종언을 선고하였다.

바람을 찢어발기며 쇄도하는 짐승의 이빨.

그 공격은 막을 수 없다.

그럼에도 에델노르는 실피드를 두 손으로 꽉 쥐었다.

마지막 일격.

폭풍의 검이 칼날이 되어 달려드는 이빨에 대항했다.

콰콰콰콰!

땅을 짓이기며 세차게 내달리는 폭풍의 일격.

그러나 그 폭풍의 칼날도 달려드는 푸른 불꽃의 이빨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산산이 흩어지는 바람의 너머로 죽음은 성큼 다가온 순간이었다.

광풍이 밀어닥쳤고, 마나가 성난 것처럼 휘몰아쳤다.

그리고.

꽈앙!

충격파에 떠밀린 에델노르가 붕 날아올랐다가 바닥을 향해 추락하였다. 이미 모든 힘을 다 쓴 까닭에 몸을 가눌 힘조차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바닥을 나뒹구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몸이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휘감겼기 때문이다.

“오랜만이군. 발키리 에델노르.”

에델노르는 가물거리는 시야 너머로 자신을 붙잡은 존재를 눈에 담았다. 무미건조한 그 육성을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제드······ 크레인.”

“아직 살아있군.”

제드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를 불길이 미치지 않는 땅에 내려놓았다.

“제드 크레인, 여기 어떻게······?”

에델노르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정령이 인도했다.”

그 대답에 에델노르는 눈을 크게 떴다.

이글거리는 대지와 맞물려 제드가 보였고, 그 너머로 파멸자와 마주 선 검은 갑주의 존재가 보였다.

정령과 인간의 냄새가 혼재된 존재.

-아주 강한 정령의 의지가 느껴져요. 그 정령의 의지가 이곳으로 향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인도자가 했던 말의 의미.

에델노르는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이해했다.

그것은 바로 제드 크레인을 뜻하는 것이었다.

“제드 크레인, 우릴······ 요정을, 도와줘.”

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부탁하지 않아도 그럴 참이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서 만든 무대였고, 이곳에 당도한 것이었다.

‘이로써 무대와 배우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제드의 눈빛이 세찬 불길의 그것처럼 일렁였다.

*

“크하하핫. 좋아, 이래야지!”

사일러스가 크게 웃었다.

칼끝에서 전달되는 묵직한 감각.

저 시답잖은 사냥꾼이라는 놈들과 줄곧 함께 움직였던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타오르는 불길 너머에 서 있는 검은 기사의 모습을 보면서 사일러스는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인리 이후로 자신과 처음으로 대등하게 싸웠던 적이다.

날름 메마른 입가를 쓸며 자세를 낮추는 사일러스. 이제 사냥꾼 사울은 이곳에 없다. 눈앞의 적은 약해진 발키리와는 격이 다른 상대였다.

“오늘이야말로 죽여주마.”

사일러스가 광기를 터뜨리며 달려나갔고, 검은 기사 자크 역시 이에 대응하며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꽈앙!

쩌저저정!

칼과 칼이 부딪치며 충격파가 발생한다. 으깨진 오러의 칼날이 사방으로 쏟아지며 땅을 짓이기고 불붙은 나무를 쓰러뜨렸다.

두 초월자가 백중세로 충돌하는 가운데, 교전 상황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났던 사냥꾼들은 뒤늦게 상황 파악을 했다.

일렁이는 불꽃의 너머로 마법사 한 명이 발키리를 가로막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자식이 발키리를 독식하려고 든다!”

카록이 고함을 질렀다.

그 순간, 사냥꾼들의 눈이 돌아갔다.

요정의 가치는 천문학적이지만, 그중에서도 발키리라면 그 가치는 헤아릴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검은 기사의 능력과 무관하게도 사냥꾼들의 이성은 마비됐다. 탐욕에 사로잡힌 그들의 눈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살기로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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