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조약2
*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 껴 있었다.
그것은 꼭 토르가 왕국의 미래를 암시하는 듯하였다.
토르가 왕국의 수도 피테르노의 왕성의 회의실에는 왕국 내각 수뇌부들이 모여 있었다.
동부 왕국 최고 권력자들의 얼굴은 저 창밖의 하늘만큼이나 어두웠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외교대신인 러스터 후작이 가져온 강화 조약의 조건 때문이었다.
“터무니없군······.”
겨우 꺼낸 한 마디엔 힘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근위대장 말콤은 괄괄하고 급한 성정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불과 얼마 전의 하이렐 회전의 패배로 그들의 입지는 이제 전과는 달라졌다.
토르가 왕국은 패배했고, 라이곤 왕국은 승리했다. 좌중 모두가 그걸 알기에 그저 입을 다물고 있을 따름이었다.
“배상금을 본국이 다 물어야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온 나라의 경제가 휘청거리겠지요. 이미 무리한 군비증강으로 국력이 크게 소모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 북부까지 이렇게 잃게 된다면······.”
“으음.”
좌중이 침음성만 흘릴 때였다.
“하지만 더 심한 조건을 내건다고 해도 받아들이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불쑥 끼어든 단호한 목소리.
좌중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이 자리에 있기에는 아직 젊은 인물이었다.
파비앙 오스터.
천재 마법사라 불리는 그는 이 나라의 골렘 개발과 전력의 핵심인재였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의 책임자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쾅!
“방법이 없다니. 잘도 말하는군! 애초에 라이곤 왕국에 내정간섭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났겠소! 본국이 이따위 요구를 들어줘야만 하는 상황이 왜 벌어졌단 말이오!”
“······.”
파비앙은 그 분노 앞에서도 담담했다.
그 태도에 근위대장도 이내 화를 삼켰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된 마당에 과거를 일일이 따지며 잘잘못을 열거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곧 파비앙이 좌중을 훑더니 말했다.
“예,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이 일이 라이곤 왕국의 전력을 정확히 분석하지 못한 일에서부터 비롯된 것임을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걸 따지는 건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지금은 냉정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음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파비앙은 냉정한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전쟁을 더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앞에 있는 것은 멸망뿐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원하는 걸 들어줄 수밖에요. 달리 이견이 있으신 분들은 빨리 말씀해주십시오. 하루라도 빨리 조약을 맺는 게 좋습니다. 배상금이라도 줄이려면 말입니다.”
좌중이 신음을 삼키며 답을 미루었다.
그러는 가운데, 파비앙은 심각한 얼굴로 마지막 조건을 곱씹고 있을 따름이었다.
‘발트 테바인의 신병이라고.’
배상금과 영토에 대한 요구. 그런 건 충분히 예상했던 수준의 이야기였다. 전력의 태반을 손실한 토르가 왕국은 이제 라이곤 왕국과 회전을 벌일 역량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발트 테바인의 신병 요구가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건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제드 크레인, 그의 두려운 점은 전략전술만이 아니야. 정보력을 바탕으로 한 냉철한 직관까지 갖추었어. 발트 경이 골렘 개발의 주축이라는 걸 아는 건 극히 소수에 불과할 터인데.’
파비앙으로서는 기실 그 조건이 가장 뼈아팠다. 그의 신병을 넘겨준다면 앞으로 골렘 개발에 큰 자질이 빚어지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거부할 수가 없는 일이다. 아니, 지금은 머뭇거릴 때가 아니다. 그를 라이곤으로 빼앗긴다면······ 그때의 후폭풍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파비앙의 눈매가 서늘하게 변했다.
“크흠. 그러면 폐하께 재가를 받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러스터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얼굴로 장내를 벗어나는 내각 수뇌부들.
파비앙 역시 바쁜 걸음으로 움직였다.
결단을 내렸다면 곧장 움직여야만 한다.
그는 복도를 가로질렀다. 회랑을 지나서 이 안쪽에는 왕실 연무장이 있었다. 그 연무장의 중심에는 상의를 탈의한 모습으로 칼을 휘두르는 한 사내가 있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의 사십 대 인물. 날카로운 칼을 연상시키는 그 인물의 기세는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르다. 과거 그와 대면한 적이 있었기에 파비앙은 알 수 있었다. 하이렐 회전의 충격적인 패배가 그를 변화시켰음을 말이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파비앙 경.”
흠뻑 땀에 젖은 모습으로 칼을 거두며 묻는 사십 대의 사내. 그가 바로 토르가 왕국 제일의 기사라고 불리는 하인리 엘스우드다.
“하인리 경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마법부의 내각 대신이나 되는 분께서 무슨 부탁을 하시려고 직접 찾아오는 수고까지 마다치 않았는지 한번 들어봅시다.”
“한 마법사를 생포하는 일입니다. 어설픈 수준의 실력자가 아니므로, 이렇게 하인리 경께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만약 일이 틀어지면 반드시 죽여야 하지요.”
“누굴 잡는 일이기에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오.”
“발트 테바인이라는 본국의 마법사입니다. 아마도 경은 잘 모를 겁니다. 문제는 그의 진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아무도 가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앞뒤 이야기를 들어봐야겠군.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소.”
파비앙은 하인리에게 모든 이야기를 전했다.
러스트 후작이 제드와 만나서 나눈 회담 내용과 강화의 조건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들은 이후 하인리의 표정은 무시무시했다.
“즉, 본국을 위해 헌신해온 이란 얘기가 아니오. 도무지 내키지 않는 일이군.”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토르가 왕국의 앞날을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를 라이곤에 빼앗긴다면 토르가의 앞날은 더더욱 어둡습니다.”
“······.”
잠깐의 침묵. 하인리는 곧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결단에서 그가 어찌 자유로울 수 있으랴. 작전의 실패. 전투의 패배는 그와도 무관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 역시 형제를 잃었다.’
파비앙은 감정을 숨기고 냉정함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하인리는 알았다. 그들 쌍둥이 형제는 곧 둘이자 하나였음을 말이다. 분신을 잃은 고통을 감히 누가 헤아릴 수 있으랴. 하인리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것 이상으로, 파비앙도 복수를 다짐하고 있을 것이다.
“좋소. 안내하시오.”
“고맙습니다.”
파비앙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 밖으로 향했다. 과거에는 마탑으로 쓰였고, 지금은 골렘 연구소가 된 탑으로 향하는 두 사람이었다.
‘발트 테바인은 속내를 알 수가 없고, 그 실력은 더더욱 알 수가 없는 마법사다. 어중간한 마법사들 다수를 데리고 움직이는 것보다 확실한 실력의 하인리 경과 함께 움직이는 게 맞다.’
쿠르릉.
때마침 먹구름이 꼈던 하늘이 울기 시작하더니 비를 쏟아냈다. 쏟아지는 빗물이 대지를 적시기 시작하는 가운데, 둘은 탑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는지요, 파비앙 님.”
“발트 경은 어디에 있나. 평소처럼 연구실인가.”
“예, 그럴 것입니다. 기별을 넣을까요.”
“아니, 내가 직접 찾아가지.”
연구탑의 마법사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파비앙은 탑의 중앙으로 손을 뻗어서 마법을 가동했다. 복잡한 마탑의 마법술식이 발동하였고 이내 눈앞의 문이 제3의 공간과 연결되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파비앙.
“발트 경.”
파비앙은 왜곡된 공간의 너머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늘 공방에서 지냈다. 그리고 아주 가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넌지시 그에게 전달하곤 했다. 파비앙과 루베가 보고 깜짝 놀랄 정도로 엄청난 마법적 성과를 말이다.
“어디 있지? 중요하게 이야기할 게 있어 찾아왔는데.”
“별스러운 일이로군요. 파비앙 님께서 이토록 갑자기 찾아오시다니 말입니다.”
커다란 창문. 그 너머 먹구름 사이에서 빛이 번쩍 터지는 게 보였다. 벼락이 치고 있다. 쏟아지는 빗물이 기세를 더하고 있었다.
그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발트 테바인.
이 공방의 주인이자, 안타레스 유산을 발견한 장본인. 이 토르가 왕국의 골렘 마도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다.
그렇게 잠깐의 무거운 침묵이 흘렀을 때였다.
“······과연, 외통수인가.”
발트가 불쑥 그렇게 중얼거렸다. 고개를 돌리지 않았지만, 파비앙은 알 수 있었다. 그가 미소 짓고 있음을 말이다.
“재미있는 인물이야. 그토록 치밀하게 만들어놓은 판을 이렇게까지 뒤집어놓을 수가 있다니. 덕분에 계획이 엉망진창이 되었군.”
“······무슨 혼잣말을 그렇게 하는가? 앞으로 국제질서의 흐름을 두고 그대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참인데.”
“그리 에두를 것 없다. 유감이다, 파비앙 오스터여.”
불쑥 들려온 말투는 변해 있었다. 머리를 쓸어넘기며 고개를 돌리는 발트의 눈빛은 냉정했다. 평소의 그 실없이 웃는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너희 형제는 시대를 이끌어가기는 부족함이 없는 인재였다. 계획대로라면 분명히 그랬을 터였지. 내 착오는 하나였다. 제드 크레인이라는 변수. 아니, 그라는 특이점을 몰랐다는 것.”
“······.”
파비앙이 긴장하였다.
발트의 태도가 어딘가 심상치 않게 느껴진 까닭이다.
그의 뒤에 서 있던 하인리도 말없이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아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그리고 판이 무너졌다면 다른 판을 준비해야겠지.”
“하인리 경!”
파비앙이 다급히 소리쳤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까닭이다.
그리고 벼락같이 달려나가는 하인리. 뽑혀나온 칼의 궤적에서 푸른 뇌전이 터져 나오며 공간을 찢어발겼을 때였다.
발트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운 순간, 그의 몸에서 마나가 방출됐다. 파비앙이 역시 놀란 얼굴로 찰나의 순간에 마법을 펼쳤고.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탑의 상층부에서 불꽃이 치솟았다.
콰르르.
무너진 건물의 파편이 흩날리고 새까만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세차게 떨어지는 빗물이 폭발과 함께 너울거리는 불꽃을 다급히 잠재우는 가운데, 지이잉 이명이 파비앙의 귓전을 맴돌았다.
“으음.”
파비앙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급히 만든 다중 마법의 방벽 태반이 깨져버릴 정도로 위력적인 마법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이 정도의 마법을 사용한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자폭이라니······.”
파비앙은 당혹스러운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주변은 엉망이었다. 폭발에 이 공방의 내부에 존재하던 것들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발트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마법사로군.”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하인리의 목소리였다. 무너진 건물의 파편 뒤쪽에서 흙먼지투성이가 된 모습. 과연, 왕국 제일의 기사답게 그 폭발의 순간에 몸을 숨겨 휘말리지 않았던 것이다.
“갑자기 이런 결단을 내리다니. 정보가 샜다고 하기엔 그럴 시간이 없지 않았소.”
“저도 뭐가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예사롭지 않은 마법사라는 건 알았지만, 이건 너무 과격하군요.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었습니다. 되도록 그를 안전하게 숨기고 싶었는데······.”
파비앙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제드 크레인과 발트 테바인.
그 둘의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
제드는 발트를, 발트는 제드를 알고 있었다.
“이제 어쩔 생각이오.”
“후. 일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기는 했지만, 본국의 미래를 생각하자면 썩 나쁘기만한 일은 아닐 듯하군요. 사실대로 전해야겠습니다. 제 예상이 맞는다면 이 소식을 거짓없이 그대로 전한다면 제드 크레인, 그 역시도 물고 늘어질 것 같진 않습니다.”
*
제드가 피테르노의 구 마탑의 폭발 소식을 들은 건 이틀이 지났을 때였다.
‘폭발이라고.’
제드는 그 일의 전말을 가늠해보았다.
거짓과 진실. 알 수 없는 일이나, 어느 쪽도 가능성은 충분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발트 테바인이라면.’
그리고 꼬박 하루가 지났을 때, 러스트 후작이 라이곤 왕국군이 머무르고 있는 도시 헨턴으로 다시 찾아왔다.
“왕실의 재가가 떨어졌습니다. 본국은 라이곤 왕국과의 강화조약의 조건을 모두 이행할 생각입니다. 다만, 세 번째 조항에 관해서는······.”
“역시 그 폭발이 발트 테바인과 연관이 있었소?”
“그, 그렇습니다. 크흠. 이미 들으신 모양이로군요. 그의 신병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그가 저항하다가 그만 자결을 하였습니다.”
“시신은 확보했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저도 그 상황을 전해 들은 입장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고 합니다. 그 폭발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마탑의 최상층부가 송두리째······.”
러스트 후작은 열심히 그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제드는 턱을 괸 채로 생각에 잠겨있을 따름이었다.
‘아니, 이대로 죽음을 택할 놈이 아니다.’
그렇다면 폭발은 일종의 쇼라고 볼 수 있으리라. 그게 아니면 왕실까지 한통속으로, 모든 게 치밀하게 계획된 작전이거나.
움찔.
러스트 후작이 제드의 시선에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는 제드를 두려워했다. 감히 자신의 앞에서 거짓말을 할 인물은 아니었다. 혹 치밀한 계획을 꾸몄다고 해도 파비앙, 혹은 왕실의 인물이 연관되어 있을 테지.
다만.
‘그 황제······ 아니, 왕은 그 정도로 치밀한 인물은 아니다. 이런 계획을 꾸밀 정도의 인재가 토르가에 있다고 한다면 그건 후계자인 황태자 바토리 정도뿐. 하지만 그 바토리는 지금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터. 즉, 왕실의 그림자 속에 숨었다는 것 자체가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다. 그리고 그 파비앙이라면 이런 눈에 띄는 방식이 아니라, 조금 더 은밀한 방법을 취했을 거야.’
왕실에 숨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확률이 낮다는 것은 확실했다.
‘발트 테바인은 하얀 골렘을 가지고 있다. 그 골렘은 내가 발견했던 극동의 칼베이 폐광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거야. 놈에겐 또 다른 유산이 있다.’
제드의 머리가 거침없이 돌아갔다.
발트 테바인은, 자기 자신의 의지로 토르가 왕국을 버렸다.
외통수임을 그 자신도 알아차린 것이리라.
다만, 그게 끝이 아니었던 거다.
“판을 다시 짤 셈이로군.”
제드는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흐흐 웃었다.
“가, 각하?”
“좋소. 강화를 맺도록 하지. 단, 3번째 조건 조항을 지키지 못한 만큼, 그 이전 조항에서 귀국이 손해를 더 보겠지만, 귀국이 그걸 거절할 입장은 아닐 테지.”
“아, 알겠습니다.”
“그럼 구체적인 논의 사항은 공식적으로 외무부를 통해서 전하겠소. 오늘의 이야기는 이걸로 끝이오.”
제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