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조약1
하이렐 회전 이후, 라이곤의 육군은 하이렐의 도시인 햄벨을 점령하였다.
햄벨의 관리 귀족들은 이미 패전 소식을 들은 이후였기에 고위 귀족은 다 도망친 이후였고, 남아 있는 귀족들은 말단 귀족들뿐이었으므로 저항은 없었다.
따라서 유혈 사태는 없었고, 도시의 라이곤 육군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그렇게 하이렐 회전이 끝나고 일주일, 도시 햄벨이 점령된 지 나흘이 지났을 때, 공식적으로 토르가의 사신이 당도했다. 하지만 사신은 목적한 바를 달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누구도 그와 만나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꼬박 이틀을 더 머물던 사신은 그대로 왔던 길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직후, 제드는 회의실에 지휘관을 모두 불렀다. 회의실은 금세 꽉 찼고, 보병여단의 지휘관들은 저마다 앞으로의 일들에 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였다.
문이 열리고, 제드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걸어오는 제드의 모습에 장내의 지휘관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이 막힐 정도의 무거운 공기. 보병여단장들 태반은 육군 원수이자 왕국 재상인 제드를 실제로 보지도 못했다. 그저 말로만 들었다.
며칠 전의 하이렐 회전의 양상을 뒤집어 놓은 장본인이자, 전쟁영웅인 그를 힐긋 살피는 이들은 속으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허. 이렇게 젊다니. 이야기는 들었지만, 도무지 라이곤의 최고 권력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속으로 할뿐, 누구도 제드 크레인의 능력에 관해서 의문을 품는 이는 없었다.
“경례!”
모두가 거수경례를 하는 가운데, 제드는 인사를 받고 자리에 앉았다.
좌중 역시 착석했고, 제드는 상석부터 말단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모인 지휘관들의 면면을 살폈다. 아는 얼굴보다 모르는 이들이 더 많다.
“모두 알고 있나? 적국의 사신이 조금 전에 돌아갔다.”
제드가 별안간 그렇게 입술을 뗐다. 무미건조하지만, 몹시도 분명한 발음의 목소리였다.
“왜 그들이 사신을 보내왔는지 알겠나?”
대답하는 이는 없다. 제드는 좌중을 훑다가 한 명을 눈에 담았다.
“귀관의 이름은?”
“테일러 드렉입니다!”
“좋아, 테일러. 그대가 대답해보라.”
“적들에겐 더 싸울 힘이 없으므로 정전을 원할 것입니다.”
“타당한 의견이다. 그럼 하나 더 묻지. 내가 왜 그 사신과 만나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을 것 같나?”
“그건······.”
테일러는 난색을 보였다. 그 이유까지는 짐작 가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제드는 좌중을 훑었다. 하나같이 시선을 피할 따름이었다. 그러던 중, 제드의 시선이 상석의 루카스에게 닿았다.
“루카스 대위.”
“옛, 각하!”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지?”
“각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정전협정이 아니기에 만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귀관은 아는가?”
“적의 항복입니다.”
단호한 대답.
그 말에 제드가 흐하하 웃었다.
“그래, 아주 정확하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단 한 번의 회전으로 승리를 기념하기에는 너무 이르다는 얘기다. 오만한 적들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 전쟁은 그들이 끝내고 싶다고 해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싹.
언제 웃음을 터뜨렸느냐는 듯이 서슬 시퍼런 안광을 빛내며 좌중을 훑는 제드. 장내의 공기가 무겁다. 저 젊은 원수가 내뿜는 절대적인 카리스마 때문이다. 차갑고도 매서운 눈동자는 만족을 몰랐다.
“제군들, 진군을 명하겠다. 하이렐, 웰링스, 스턴벨. 세 지방을 이번 달 안에 점령한다.”
*
라이곤의 육군이 움직였다.
수천 명의 보병여단이 각지로 나아갔고, 불과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하이렐 지방의 전 도시가 완전히 항복하여 라이곤의 통제하에 들어왔다.
웰링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산과 숲이 많아서 남부에 큰 도시 하나밖에 없는 웰링스 지방의 킬링턴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이라도 벌이려는 듯하였으나, 포병대가 성벽과 숲, 밭을 불바다로 만들자마자 곧장 항복을 선언했다.
스턴벨 지방의 도시들은 하이렐 전역이 떨어진 직후에 줄줄이 항복의사를 밝혀왔으니, 근 한 달간 실질적인 전투는 없는 거나 다름없었는데, 이미 토르가 왕국 서쪽이 전부 라이곤 왕국의 손에 떨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이 소식은 당연하게도 북부지방에도 전달됐다.
북부의 해방전선은 하이렐 회전이 라이곤 왕국의 승리로 귀결되자마자 포버를 중심으로 포부르크 왕국의 독립을 선언, 이후에 서쪽 일대가 순식간에 라이곤 왕국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억압된 북부의 땅을 차례로 독립시켰다.
그리고 록시는 자신의 본명을 내걸었다.
록산느 리베라.
그 이름을 역사의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포부르크의 후계자가 북왕국을 하나로 모으고 있었다.
포부르크의 성채의 집무실.
밤이 늦도록, 록산느는 쉬지 못했다. 일이 많기도 했고, 연일 들려오는 소식에 잠이 오지 않았던 까닭이다.
‘제드 크레인.’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며 펜을 멈춘 록산느.
그녀는 지난날 그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무미건조한 태도와 눈빛으로 말했던 젊은 재상.
그는 기어이 자신이 말했던 것들을 전부 해냈다.
대국 토르가와의 회전에서 승리했고, 보란 듯이 왕국 서부의 땅을 빼앗았다. 그리고 이 틈을 타서 북왕국은 독립하였다.
‘라이곤 왕국은 이제 명실공히 북동부 대륙에서 최강대국이 되었다. 우리가 이루어낸 승리는 자력으로 해낸 게 아니야.’
록산느는 이 승리를 그저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지난날의 과거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다.
제드 크레인은 무서운 남자였다.
그가 불과 1년 안팎 사이에 이루어낸 것을 보라. 만약 그가 북부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어떻게 독립을 할 수 있었을까.
‘기구하구나. 토르가 왕국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이대로 토르가 왕국이 무너져버린다면······ 그때는 라이곤 왕국을 누가 막을까.’
록산느로서는 그게 가장 우려스러운 일이다.
북왕국 연합은 약하다. 토르가 왕국이라는 공통의 적이 사라진 순간, 라이곤 왕국이 북왕국 연합을 흡수하려고 든다면 막을 수 없으리라.
밤이 깊도록, 록산느는 잠들지 못했다.
몹시도 긴 밤이었다.
*
토르가 왕국의 사신이 찾아왔다.
“이번이 몇 번째입니까?”
“네 번째입니다, 각하.”
로톤의 대답에 제드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이제 때가 됐다.
제드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접견실로 향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창백한 인상의 사신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헛걸음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군.”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재상 각하.”
사신은 어색하게 웃었다. 지난날, 공식적인 외교회담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아주 오랜만에 만났다.
“많이 기다렸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각하를 뵙는 일인데, 그게 어떻게 기다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준다니 다행이오. 최근 한 달간 아주 바빴소. 통 시간이 나질 않더이다. 그나저나 얼굴이 많이 상했군. 근심과 걱정이 많았던 모양이오.”
“하하.”
토르가 왕국의 사신은 멋쩍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게 다 누구 때문이란 말인가. 외교적 실패. 그 책임에 그는 없던 불면증까지 생겼다. 심지어는 라이곤의 첩자 소리까지 들을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걸 굳이 말할 이유는 없었다.
‘실패는 바로 잡으면 되는 일이다.’
“각하께서도 얼굴이 편치 않으신 듯합니다. 너무 많은 일을 생각하고 계시기 때문이겠지요. 각하께서는 왕국의 미래가 아니겠습니까.”
“적국의 외교대신이 내 건강을 그토록 신경 써주니 기분이 묘한 일이로군. 말은 고맙지만,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소?”
“······지극히 당연한 말씀입니다만, 본국과의 적대 관계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은 라이곤과 토르가 양국의 미래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 아닐는지요.”
“평화를 원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게 어찌 마음대로 되는 일이겠소? 손뼉도 합이 맞아야 하는 법일진대.”
“그렇다면 더더욱 이 회담은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본국은 더 이상의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끝내고 양국의 평화가 성립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랄 뿐입니다.”
“그렇소?”
제드가 담담하게 되물으며 턱을 매만졌다. 고민하는 듯한 태도. 그 모습을 보면서 후작은 가만히 눈치를 살폈다.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된다.’
후작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동안 계속 만나주지 않고 무시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던 라이곤 왕국군이었다.
그런데 오늘 드디어 회담이 이루어졌다.
그것도 라이곤의 최고권력자라고 할 수 있는 재상이 직접 나왔다. 그건 그 역시 대화의 의지가 있다는 얘기다.
곧 제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저 뒤에서 젊은 장교가 다가오더니 무엇인가를 건넸다. 양피지 두루마리였다.
제드는 그것을 탁자 위에 펼쳤다.
그건 라이곤과 토르가의 국경을 중심으로 한 지도였다.
“평화를 원한다면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것이 옳은 법. 이 전쟁으로 본국이 입은 피해는 막대하오. 전쟁배상금은 당연히 귀국이 내리라 믿고 있소만, 경의 생각이 다르다면 언제든 말씀하시오.”
“그, 그럴 리가요. 물론, 배상금은 지불하겠습니다. 구체적인 금액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를 생각하시는지, 구체적인 조정을······.”
“구체적인 수치는 내가 논할 문제는 아닌 듯하군. 지금은 아직 전쟁 중이므로, 구체적인 계산이 어려우니 말이오. 그 외에도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는 한둘이 아니오.”
“한둘이 아니라면······.”
쿵.
되묻기가 무섭게 제드가 품에서 칼을 뽑아서 지도를 찍었다. 러스터 후작이 화들짝 놀라는 가운데, 제드가 단검으로 꿰뚫은 지도를 가리켰다.
“하이렐, 스턴벨, 그리고 웰링스. 본국의 군대가 점령한 땅은 모두 본국의 영토로 삼겠소.”
“가, 각하······ 그, 그것은 너무······.”
“어렵겠소?”
제드가 되묻자, 러스터 후작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지만, 그걸 전부 달라고 하는 건 너무 과했다.
“······.”
“좋소. 그럼 웰링스는 철회하겠소.”
“가, 감사합니다. 하이렐과 스턴벨 지방이라면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대신에 한 가지 미리 말해두겠소. 포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북부왕국연합은 본국의 동맹이오. 본국은 그들의 독립을 지지하는 바이니, 귀국도 그걸 인정해야만 할 것이오.”
“······.”
반색하던 것도 잠깐이다.
러스터 후작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사실상 웰링스 한 지방을 뺀 대신에 북부 전역을 통째로 내어주게 생긴 까닭이다. 이걸 왕실에서 받아들일까.
······아니, 애초에 이 정도면 투항조건이 아니던가.
“받아들이기 어렵소?”
“······.”
꿀꺽.
후작은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이 젊은 재상의 푸른색 눈동자 너머로 서슬 시퍼런 냉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좋다.
그 눈동자는 흡사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노, 논의 사항을······ 잘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좋군. 나도 응원하겠소. 결과가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가장 중요한 걸 잊을 뻔했군.”
제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불쑥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러스터 후작이 다시 긴장하는 가운데.
“발트 테바인. 그자의 신병 역시 요구하는 바이오. 앞선 것들에 비하면 훨씬 쉬운 것 같은데, 안 그렇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조건인 듯 후작은 다소 의아한 기색이었지만, 이내 마음을 놓은 듯했다. 그리고 제드는 그 표정을 보고 알았다. 왕실 내부에서도 발트 테바인의 중요성을 아는 이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예상했던 그대로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야기는 대충 끝난 듯하군. 귀하의 수완을 기대하고 있겠소. 너무 기다리게 하지 마시오. 모름지기 일이라는 건 다 때가 있는 법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돌리는 제드의 입가엔 미소가 맺혀 있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하겠느냐. 발트 테바인이여. 외통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