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2
*
그 골렘이 나타난 건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혼전 속에서 불쑥 숲 속에서 튀어나올 때까지 제드도 눈치채지 못했다.
제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골렘이 무엇인지,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놈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고 있다.’
쾅. 쾅. 쾅.
하얀 골렘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제드는 곧장 아우로렐을 호출했다.
우우우우.
전장을 누비던 아우로렐이 고개를 돌리더니, 하얀 골렘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우드 골렘도 마찬가지다.
다른 골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동성이 빠른 우드 골렘이었으나, 하얀 골렘의 속도도 그에 밀리지 않았다.
하얀 골렘의 속도가 아우로렐과 거의 비슷한 지경이었으니, 일반 우드 골렘인 그레지안 급은 오히려 거리가 멀어질 따름이었다.
그 순간, 아우로렐이 팔뚝에 휘감고 있던 커다란 나무를 변형시켜 투창의 형태로 만들었다. 이미 부러진 나무를 변형시킨 것이었으므로 크기는 숲 속에서 날렸던 것보다 작다. 하지만 더 가벼웠기에 투창의 속도는 훨씬 더 빠르다.
쐐애애애액!
매서운 파공성과 함께 하얀 골렘의 등으로 날아드는 창. 이대로라면 꿰뚫려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하얀 골렘은 몸을 튕기더니 몸을 돌렸고 검은 무쇠의 칼로 적중 직전의 순간에 칼을 올려쳐서 투창을 걷어냈다.
콰아앙!
찢겨나간 나무가 널브러지는 가운데, 아우로렐은 멈추지 않고 하얀 골렘을 향해 덤벼들었다. 조금 전에 공격을 막아내면서 기동이 멈추었기 때문에 따라잡은 것이다.
아우로렐은 달려가면서 땅을 쾅 내려쳤다.
슈슈슈슉!
발에서부터 솟구친 나무줄기가 대지를 깨부수며 하얀 골렘의 발목을 묶었다.
우우우우.
고정된 적을 향해 아우로렐이 무섭게 달려나갔다. 부러진 나무에 넝쿨과 껍질을 덧대어 순식간에 거대한 해머를 만들어 적을 내려치며 공격을 감행한다.
매우 빠르고 변칙적인 공격이다.
그러나 하얀 골렘은 지금까지 아우로렐이 상대했던 다른 골렘과는 다른 존재였다.
콰아아앙!
우우우!
해머를 휘둘러오는 아우로렐의 오른쪽 쇄골 부근을 단숨에 깨부수며 칼을 밀어 넣는 하얀 골렘. 그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발목이 묶인 상황에서 상체에서 발생하는 출력만으로 달려든 아우로렐의 몸을 도리어 튕겨낼 정도였다.
땅에 튕겨 나간 아우로렐은 금방 몸을 일으켰다. 코어를 빗겨나간 이상, 마나만 공급되면 충분히 수복할 수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드는 그 한 번의 충돌만으로 알았다.
‘최소 300마력 이상은 족히 된다.’
실로 무시무시한 출력이었다.
지금 제드가 부리는 골렘 중에서 200마력을 초과하는 건 둘 뿐이다. 하나는 아우로렐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크였다.
그중 자크는 소형 골렘이었으므로 사실상 골렘전에는 무용지물이었고, 골렘전에서 가장 강력한 출력을 자랑하는 건 아우로렐이었다.
‘그 정도면 웬만한 골렘과는 힘겨루기에 들어가도 절대로 밀리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가볍게 밀리다니.’
제드가 낮게 신음했다.
해머락의 괴물.
그 괴물 같은 나이트골렘의 재림이라면 승산은 없다.
‘아직 단정할 수는 없다. 300마력 이상임은 확실하지만, 해머락의 괴물만큼 압도적인 출력은 아니야.’
제드가 그렇게 판단하는 건 해머락의 괴물이었으면 조금 전에 아우로렐은 완전히 박살이 나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을 터였다.
그런 가운데, 하얀 골렘은 이제 주변을 포위하고 선 그레지안 급 우드 골렘과 대치하고 있었다. 단 한 기의 골렘을 상대하기 위해서 10기의 골렘이 포진한 셈이었다.
우우우.
아우로렐이 낮게 울었고, 공격은 시작됐다.
*
“적을 돌파해라!”
“토르가의 군대는 오합지졸이다!”
국경의 전열이 제1 기갑중대를 중심으로 돌파되면서 뒤이어 보병여단이 따라붙으며 우왕좌왕하는 토르가의 군대를 밀어붙였다.
승세를 탄 라이곤의 육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방진중대가 충돌할 때마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토르가의 보병들.
기갑중대를 중심으로 거침없이 물러나기 급급한 적 골렘 부대까지. 말을 타고 군대를 지휘하는 로톤의 고함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가운데, 제1 기갑중대를 이끄는 루카스가 적들의 본대가 있는 곳까지 진격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벌어진 풍경에 루카스와 기갑중대의 마법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떠오른 동녘의 햇살이 비춘 그 전장의 풍경은 국경에서부터 이곳까지 그들이 치러왔던 전투와는 차원이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한때 움직이는 골렘이었던 바위들이 바닥에 즐비하였고, 그 사이엔 갈려나간 시체가 가득했다. 역한 피비린내가 진동하였다.
‘각하께서 홀로 이 많은 적을 상대하셨단 말인가?’
절대로 늦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던 루카스는 자기 자신의 무능력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개를 든 그의 시선이 저편에서 저항 중인 적들에게로 닿았다.
전공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더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그것은 그들의 사명이었다.
“단 하나도 남기지 마라.”
루카스가 그렇게 나직이 명령을 내렸을 때였다.
콰앙.
별안간 오베르가 저편을 향해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큭!”
루카스가 멈추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그 명령은 통하지 않았다. 오베르는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루카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골렘, 뭐지?”
새하얀 골렘.
단 한 기의 골렘이 달려드는 골렘을 차례로 무너뜨리며 종횡무진 기동하고 있었다. 쓰러지는 골렘들은 모두 라이곤의 골렘들이었다.
“제1 기갑중대 전원은 나를 따른다.”
루카스는 지금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찌이잉.
두통이 일었다.
제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느새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이미 예상했던 전투 시간을 초과했다.
제드의 예상은 정확하였다.
적의 주력부대는 예상했던 시간 내에 분쇄됐고, 남은 건 도착할 기갑중대에게 맡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이 별안간 나타난 저 하얀 골렘 때문에 엉망이 됐다.
‘······벌써 10기가 쓰러졌다.’
그레지안 급 우드 골렘 3기. 라인 급 스톤 골렘 7기.
네임드 급 골렘인 아우로렐도 정면에서는 승산이 전혀 없을 지경이다.
물론, 흘러가는 상황만 두고 보자면 이대로 가다보면 결국 승기는 잡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문제는.
‘마나가 부족하다.’
제드는 더는 골렘전을 펼칠 수가 없었다.
한계란 얘기다. 이미 골렘 다수를 공간의 저편으로 보내서 소모되는 마나의 양을 줄이고 있을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에 자크쪽에서도 마나를 계속 사용해나가고 있었다. 자크가 조절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가?’
제드가 마침내 그 결론에 도달한 순간이었다.
적의 주력을 분쇄한 시점이었다.
즉, 남은 건 소탕전뿐이었지만, 더 욕심을 내다가는 더 큰 걸 잃을 수도 있었다.
제드가 외곽의 라인 급 골렘들을 속속들이 숲 속에 숨긴 후에 곧장 공간의 저편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이 상황은 토르가의 잔류 병력엔 기회였다.
“저, 적 골렘들이 이탈한다. 서둘러 물러난다!”
그들이 물러나는 그 광경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에 가깝다.
이미 패주한 것과 다름없는 모습.
그 모습엔 질서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토르가에는 지휘체계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총지휘관의 생사도 그렇고, 골렘 부대의 핵심 마법사인 루베도 생사를 알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라이곤의 추가 부대는 속속들이 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하얀 골렘을 중심으로 새로운 골렘들이 포진했다.
‘오베르? 과연, 기갑중대가 도착했나!’
마나를 갈무리하던 제드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국경 쪽의 라이곤 육군 본대가 드디어 숲길을 뚫은 것이다.
드드드드.
육중한 오베르가 바닥에 부서져 나뒹구는 스톤 골렘을 재구축하더니 하얀 골렘과 똑같은 칼과 방패를 만들었다.
[제드, 오베르가 왔다.]
오베르가 선명하게 사념을 전달하더니, 그대로 하얀 골렘을 향해 달려갔다. 제드의 마나가 아니라, 루카스의 마나를 사용하는 오베르였기에 출력을 아낌없이 끌어내도 문제는 없다.
다만.
콰가가가각!
덤벼든 오베르가 오히려 밀려난다.
육중한 덩치의 오베르지만, 하얀 골렘의 앞에서는 그 거대한 덩치도 썩 크게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이내 방패로 후려치는 하얀 골렘의 공격에 그대로 밀려나 바닥을 나뒹굴었다.
콰아앙!
‘여전히 강력하다. 하지만 분명하게 출력이 떨어졌다. 전투 피해가 누적된 거야.’
제드는 하얀 골렘의 움직임이 둔해졌음을 알았다.
해머락의 괴물과는 다르다.
반쯤 깨진 방패. 파손된 복부 등이 그 증거다.
‘그렇다면 놈도 시간을 끄는 게 목적인가.’
덤벼들기 전에는 덤벼들지 않는다.
분명했다. 하얀 골렘은 전투를 피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제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숲의 깊숙한 곳. 심록. 우거진 그곳의 너머에서 선명한 마나의 흐름이 포착됐다.
그 마나의 흐름과 패턴을, 제드는 알고 있었다.
머잖아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안경을 쓴 남자는 뒤로 머리를 묶고 있었고, 고풍스러운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제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생애에선 처음보는 얼굴이었다.
“그대가 제드 크레인인가?”
안경을 쓴 젊은 마법사. 그가 웃으면서 말을 걸어왔다.
발트 테바인.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발트 테바인.”
“나를 알고 있나?”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지.”
“흥미롭군. 그대는 신기한 인물이야. 갑자기 나타나서는 이렇게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놀라게 하다니 말이야.”
발트가 곤란한 듯 즐거운 표정을 했다.
제드에겐 꽤 익숙한 표정이었다.
“궁금한 게 참 많은데······ 물어본다고 대답해줄 것 같진 않군. 그렇지?”
“나 역시 그대에게 궁금한 게 많은 건 마찬가지다.”
“나에게 무엇이 궁금해하는지조차도 궁금하군.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말이야.”
그러다 이내 발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두지. 쓸데없는 대화가 길어질 것 같군. 오늘 내가 그댈 이렇게 찾아온 건 그런 얘기 때문이 아니다.”
“싸움을 끝내자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나.”
“하하하. 이거 다 꿰뚫고 있군. 그래, 맞아. 그대는 토르가 왕국을 여기서 완전히 무너뜨리고 싶겠지만, 서로 알다시피 그럴 수 없다는 건 명확하지.”
“······.”
발트는 알고 있다. 제드의 마나가 이미 고갈에 다다랐음을.
그리고 반대로 발트 역시 끝끝내 이 싸움을 뒤집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저 골렘은 강하다.
그러나 저것은 나이트골렘이 아니다.
“좋다. 끝내도록 하지.”
“이야기가 잘 통하는군. 잘 생각했다. 그럼 오늘의 대화는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지. 머잖은 때에 기회가 찾아올 거야.”
“그때는 이렇게 허술하게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죽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일러주지. 싸움은 끝낼 것이다. 단, 내가 끝내고자 할 때 말이야.”
“그게 무슨······.”
발트가 그 말에 미간을 찌푸린 순간이었다.
퍼어어엉!
발트가 서 있던 발아래에서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무서운 진동과 세찬 열기가 이글거렸고, 머잖아 그곳에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겨나 있었다.
그러나 그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다.
‘마법의 환영이라고 해도 골렘 마법의 일종. 타격은 꽤 있었을 것이다.’
강제 파괴에 의한 동기화 해제. 그 여파는 시전자인 발트의 몸에 고스란히 전달되었으리라.
후우.
제드는 피로한 얼굴로 속삭이듯 말했다.
“자, 끝까지 싸워라. 목덜미를 물었으면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먹잇감은 놓지 않는 게 사냥이다.”
제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오베르에게 지시했다.
마나는 이미 바닥을 쳤다. 제드의 골렘들은 이제 기동을 멈추고 전선을 이탈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 자리는 기갑중대의 골렘이 대신하고 있었다.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제드는 나무에 기댄 채 너울거리는 마석의 불꽃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하얀 골렘과 수십 기의 골렘이 얽히고설키는 광경.
땅은 계속 진동했고, 굉음은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