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2
*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꼬박 하루 전.
토르가의 군대가 포진한 하이렐 숲의 군영에 어떤 부산한 움직임이 있었다. 전령이 당도한 이후의 일이었다.
수뇌부 회의가 열린 것이다.
그 광경을 하늘 높은 곳에서 지켜보는 시선이 있다.
블라르다.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수십킬로미터 떨어진 곳.
북쪽의 심록의 숲 너머에 몸을 숨긴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제드와 사일러스다.
나뭇가지가 빽빽하게 밀집한 깊은 숲은 어둠에 휩싸여 있다. 그 어둠 속에서 제드는 가만히 숲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초점은 흐렸으니, 지금 제드가 보고 있는 건 숲이 아니다. 블라르와 동기화되어 있는 것이다.
‘회의가 길어지는군.’
짐작건대 군영에 당도한 전령이 전한 것은 바로 북부의 소식이리라. 포부르크의 반란. 그 소식에 토르가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이봐, 뭘 그렇게 보는 거냐.”
“적의 동태를 확인하는 중이다.”
“이 일대의 수십 킬로미터는 전부 숲이다. 군대가 있을 만한 곳은 남부로 더 내려가야 해. 근데 이곳에서 저 먼 곳의 상황까지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래, 포버의 상황을 그런 식으로 파악했다.”
“마법사 놈들의 수작질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이런 식으로 염탐하는 것도 가능하다니 말이야.”
사일러스는 혀를 내두르더니 이내 조용히 기다린다. 더는 재촉하지도 않는 모습이다.
“내 생각보다 얌전하군. 금방 달아올라서 싸우겠노라고 날뛸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나는 전사지만, 동시에 사냥꾼이기도 하다. 사냥은 선택과 집중. 그리고 한순간에 힘을 쏟아내 먹잇감을 잡는 거다. 내가 똥오줌도 못 가리는 머저리인 줄 알았느냐?”
으르렁대는 사일러스.
과연.
제드는 의문이 풀렸다는 표정을 했다.
사일러스에 관해서는 아는 게 별로 많지 않은 제드다.
전생에 제드가 활약하던 시기에는 사일러스와 접점이 없기도 했고, 이후에는 공화국의 마스터인 안투르프의 손에 그가 죽으면서 다시는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외적인 평가로만 그를 판단했다.
‘근데 생각보다 냉정하고 계산적인 부분이 있다. 그런 부분에서는 단순하다기보다는 교활하다고 해야 할 정도야.’
그게 현재 사일러스에 관한 제드의 평가였다.
이곳까지 오는 길목에 사일러스는 아이스본에 관해서 짧게 한 번 물어봤을 뿐이다.
-다 죽었나. 싸우다 죽었다면 썩 나쁘지 않은 최후군.
그게 사일러스의 대답이었다.
아마도 그게 그가 태어나고 자랐던 설인족 후예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인 모양이었다. 짐승과 같은 삶. 그들은 하나하나가 전부 전사였고, 사냥꾼이었다. 지금 그는 이 순간을 사냥의 때라고 여기고 있다.
그리고 그런 사일러스의 생각은 옳다.
제드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변은 발생할 것이다. 이 상황은 길게 이어질 수 없어. 북부의 사태는 포버라는 도시 하나에 그치지 않을 테니까. 토르가는 북부 전체를 억눌러야만 한다. 그러자면 지금 이곳의 상황을 타개해야 할 거다.’
지금 흘러가는 모든 상황이 그들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은 지금 제드의 손 위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제드는 기다렸다, 때를.
그리고 그때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일찍 찾아왔다.
‘움직였다.’
한나절이 다 흘러서 밤이 찾아왔을 때였다.
적 군영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 소수의 인원들이 작은 집단을 이루어 군영을 벗어나는 게 포착됐다.
제드는 그것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상공을 배회하던 블라르는 그 움직임을 따라 움직였다. 이미 꼬박 하루를 이곳에서 적진을 지켜보던 제드였다. 지금 저들이 움직이는 곳이 경계지대와는 무관하다는 것을 파악했다.
‘강습부대를 운용해서 양동작전을 펼치려는가?’
제드는 그 실체를 한눈에 파악하였다.
기사단과 마법사. 그중 마법사의 수가 제법 많다. 기사단의 수는 20남짓. 적은 수다. 마법사보다 기사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다. 추가 병력도 없었다.
그렇다면 적의 주력인 강습부대는 토르가의 최상위 기사단일 것이다. 이 정도로 위험한 작전을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기사단은 극소수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근위대 혹은 하인리 엘스우드가 이끄는 엘리엇 기사단.’
제드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인리 엘스우드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제드는 사일러스의 실력을 간접적으로 체감했다.
이전 자크는 사일러스와 10번을 싸우면 10번 다 이길 수 있다고 했지만, 그건 아닐 터였다.
‘냉정하게 평가해서 거의 백중세. 조금 더 우세하다고 하더라도 6:4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하인리 엘스우드는 사일러스에게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다. 그건 끝끝내 뒤집어지지 않는 역사적 사실이야. 적어도 전생에는 그랬다.’
그 말인즉 적의 작전에 대응하는 건 쉽지 않다는 얘기다.
‘로톤 경의 근위대로는 어림도 없어. 그 뇌전의 기사가 이끄는 엘리엇 기사단이 상대라면 라이곤의 근위대는 최소 열 배는 있어야 겨우 시간이라도 벌 테지.’
자크와 사일러스를 둘 다 투입하고 제드가 보유한 나이트 급 골렘을 전부 쏟아낸다면 확실히 엘리엇 기사단을 궤멸시키는 건 가능하리라.
‘하지만 그러면 적의 양동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겠지. 강습전으로 내부를 흔들고 정면에서 공격을 해오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강습전 교리가 퍼지기도 전에 이런 과감한 전략을 세운 것은 꽤 놀라운 일이긴 하다만. 상대가 나빴다.’
그랬다. 제드는 강습전이라면 정말 질릴 정도로 맛봤다.
그래서 너무 잘 알았다.
적의 작전에 대응하는 식으로는 이 상황의 주도권을 끌어올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양동엔 양동으로 대응한다.
*
긴장감이 도는 새벽이었다.
적의 강습부대는 숲 속으로 움직였고, 들키지 않았다.
적들의 작전은 계획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토르가의 본대 역시 진격의 준비를 마쳤다.
매복지에서 꼼짝을 않던 골렘들이 아주 느리게 기동하면서 신호가 떨어지는 순간을 기다렸고, 적 보병여단도 전투 준비를 끝마친 상황.
폭풍전야의 그것처럼 토르가 왕국의 군영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짙은 구름이 희미하게 세상을 비추던 달빛을 감춘 새벽이었다.
짙은 어둠을, 군영 사방에 세워진 횃불만이 몰아내는 가운데 병사들이 조금씩 움직였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이다.
머잖아 선봉대의 대열이 갖추어졌다. 그리고 숲길의 저편에서 척후대가 말을 이끌고 다급히 달려오는 모습이 토르가의 진영에서 포착됐다.
불을 붙인 검은색 깃발로 허공을 크게 휘젓는 모습.
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진군!”
선봉대의 여단장의 고함을 시작으로 각 중대장들이 고함을 질렀다. 병사들이 움직이며 하이렐의 숲길을 따라 나아갔다. 이 숲의 협곡을 지나면 국경이었고, 그 너머에는 적진이 있다.
쿠웅. 쿵.
동시에 땅이 진동하였고, 숲 속에서 푸드득 새들이 날아올랐다. 나무 속에서 골렘들이 한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시작이었다. 보병여단이 줄줄이 군영을 벗어나 일정 제대 간격을 두고 움직였다. 수천의 병력이 줄줄이 움직이는 광경은 장엄하기까지 하다.
왜곡장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 골렘들의 수까지 헤아린다면 100기를 가볍게 넘기는 숫자. 라이곤 왕국이 대대적인 군비증강을 해왔듯, 토르가 왕국 역시 대대적인 군비증강을 했다.
땅의 진동이 사납다.
새벽의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 허공을 수놓았다.
마법사들이 뿌리는 마법의 빛이다.
진격을 시작한 순간부터 이제 숨을 필요는 없다. 횃불이 아닌 마법의 빛이 어둠을 밝혔고, 군대는 전진한다.
후위의 본대에는 지휘부 병력과 함께 다수의 골렘 마법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현 토르가 왕국의 핵심 전력 중 한 명인 오스터 형제 중 한 명이 있었다.
루베 오스터.
오스터 쌍둥이 중 동생이 바로 그였다.
골렘전술이 국제전쟁의 판도로 자리 잡기 시작한 지금, 그는 군대의 핵심전력이었다.
‘제드 크레인. 네놈이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라도 팔과 다리가 다 잘린 후에는 그 잘난 수작질도 부릴 수는 없을 것이다.’
루베의 눈은 전의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라이곤 왕국의 골렘 전력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이미 이전에 파악이 끝났다. 그래서 그동안 토르가 왕국도 많은 준비를 했다. 국력의 태반을 군비증강에 쏟았고 설비를 갖추었으며, 출력을 올리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모든 것이 전과는 달랐다. 대국의 총력을 기울여 전력을 완성했다. 이 새벽의 전투가 국제질서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꾸고 나아가 서부의 라이곤 전역이 토르가의 깃발 아래 불타오르리라.
‘내가 그리 만들 것이다. 우리 형제에게 실패는 없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콰콰콰쾅!
별안간 배후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고 땅이 진동했다.
“뭐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치는 대지에 대열을 따라 움직이던 후위 본대가 멈춰 섰다. 어둠의 저편에서 자욱하게 치솟는 흙먼지.
몸을 낮추고 고개를 돌린 루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땅이 계속 진동한다. 이 진원지는 전위의 골렘들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저 흙먼지가 자욱하게 치솟은 곳에서부터 나고 있다.
“······골렘이다! 당장 골렘전에 대응하라!”
그 순간, 흙먼지 속에서 새까만 페인트를 칠한 골렘이 녹색의 안광을 흩뿌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이 유령과 같았다.
‘한둘이 아니야. 숫자가 많다!’
당장 시야에 보이는 것만해도 30기를 넘는 골렘. 임시 막사를 짓뭉개져 다가오는 적들의 모습에 병사들이 공황에 빠졌다.
‘도대체 언제 이렇게 적이 가까이 다가왔단 말인가?’
토르가의 본대 지휘부 인원들의 머릿속에 공통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저렇게나 많은 수의 골렘이 이렇게 바로 지척에 나타날 때까지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이 정도면 턱 아래까지 적이 들어와 칼을 겨누고 있었던 격이었다.
그 분위기 속에서 루베가 고함을 터뜨렸다.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라 움직일 때다! 골렘은 대열을 갖춘다. 적은 분단된 상황이다. 오히려 이 상황을 이용하란 말이다! 골렘을 앞세워라.”
아직 젊은 루베였지만, 그 카리스마는 대단했다. 골렘 마법사들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그랬다.
적이 어떻게 이렇게 은밀하게 병력을 움직였고, 골렘으로 배후를 급습했는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지만, 적들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토르가의 골렘 부대는 전후위가 있었고, 그중에서 후위의 골렘부대가 바로 진짜였다는 것을.
“놈들이 들어온 곳이 지옥이라는 걸 보여주는 거다.”
루베가 씹어 내뱉듯 소리쳤다.
그 순간,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숲 속에서 골렘들이 불쑥 튀어나왔다. 왜곡장이 걷히면서 한꺼번에 나타난 골렘들이 적 골렘의 앞을 막아섰다.
수십 기의 골렘이 한꺼번에 움직이자, 먼지는 금세 자욱하게 피어올랐고, 땅을 울리는 굉음이 귓전을 연이어 때렸다.
그리고.
콰콰콰콰쾅!
골렘과 골렘이 마침내 충돌했다.
불똥이 튀고 고막을 찌르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루베는 양손을 허공에 펼쳤다.
곧 마법이 발동되었고, 그의 양손에서 솟구친 빛이 눈이 되어 다양한 각도에서 전장을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전장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익힌 마법. 이 마법은 루베 휘하의 마법사라면 모두 익히고 있는 마법이었다.
“피아의 위치를 판별하고 적을 밀면서 아군을 지킨다!”
“옛!”
“적 골렘의 수는 아직 파악이 안 됐나?”
“시야가 안 나옵니다. 아직 정확한 숫자를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현재까지는 약 40여 기까지 파악했습니다.”
“40기가 넘는다고······. 많군. 이곳에 이렇게 많은 전력을 쏟아넣었다면 오히려 적 본대에 골렘의 수가 적을지도 모르겠어. 공작 전하, 머뭇거릴 때가 아닙니다. 적의 전력이 분단된 지금이야말로 적을 분쇄할 때입니다.”
“음! 알겠네, 이곳은 루베 경을 믿고 맡기도록 하지.”
총지휘관인 파르티안 공작이 결단이 선 듯, 패닉에 빠진 군대를 수습하고 다시 진격을 명했을 때였다.
꽈아앙!
별안간 바로 측면의 숲에서 울려 퍼지는 굉음.
땅이 진동했고, 루베가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하늘로 붕 떠오르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다.
“골렘!”
마치, 짐승의 그것처럼 도약한 골렘이 겨우 공황에서 헤어나온 병사들의 대열을 휩쓸었다.
콰콰콰콰콰콰!
30톤이 넘는 골렘이 뛰어올랐다가 내리 찍은 순간이다.
바닥은 짓이겨졌고 병사들 수십 명이 그대로 곤죽이 되었으며, 튕겨 나간 이는 뼈가 부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르르르르.
자욱한 흙먼지 너머에서 짐승의 울음이 울려 퍼졌다.
“저건 또 뭐란 말이냐!”
루베가 다시금 분노를 터뜨렸다.
단 한 순간에 지옥도가 되어버린 전장.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이가 있다.
완전히 개방된 마나에 펄럭이는 로브와 흩날리는 머리칼. 빛을 머금은 듯 시리도록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
“날뛰어라, 하운드.”
그는 바로 제드였다.